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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문학총서 제1권 自傳 詩文集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13,500

발행일  2002.10.1
상세정보  양장 / 391page
ISBN  9788936506315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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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마음 가난한 삶을 산 예술가의 내면 풍경”
-시인 구상의 시와 산문으로 쓴, 자서전

한평생 올곧은 선비의 삶을 살아온 구상 선생의 자전적 시와 산문 모음집. 태질하는 시대 속에서 상처투성이로 산 시인의 실존적·정신적 편력이 시 100편과 산문에 오롯이 녹아들었다. 이 책은 시인 구상의 개인 생활사이자 정신사이며,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무게 602 g
크기 153 × 224 mm

저자

구상
동서양의 철학이나 종교에 조예(造詣)가 깊어 존재론적ㆍ형이상학적 인식에 기반한 독보적인 시 세계를 이룩한 시인. 현대사의 고비마다 강렬한 역사의식으로 사회 현실에 문필로 대응, 남북에서 필화(筆禍)를 입고 옥고를 치르면서까지 지조를 지켜 온 현대 한국의 대표적인 전인적 지성이다.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출생. 본명은 구상준(具常浚). 원산 근교 덕원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 수료 후 일본으로 밀항, 1941년 일본 니혼 대학(日本大) 전문부 종교과 졸업. 1946년 원산에서 시집 《응향(凝香)》 필화사건으로 월남, <북선매일신문> 기자생활을 시작으로 20여 년 넘게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시와 사회평론을 씀. 영국, 프랑스, 스웨덴,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에서 시집 출간. 금성화랑무공훈장, 대한민국 문학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 수상. 2004년 5월 11일 작고,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됨

차례

책머리에
시-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산문-구ㆍ불구(具ㆍ不具)의 변
인물록-내가 만난 기인 일사(逸士)
해설: 구상의 문학과 인간
저작 연보ㆍ일반 경력

책속에서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전문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그 칠흑 속 지구의 이곳 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利器)로 차 있고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
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처럼
중심도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달까?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
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
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100’ 부분(제1권 137쪽)

“나는 아버지가 쉰, 어머니가 마흔넷에 난 소위 만득이(晩得:늦둥이)인데 태몽(胎夢)에 ‘사슴이 내 허벅지를 꼭 물어뜯었기 때문에 그래서 멀쩡해 가지고는 애를 많이 태운다’는 어머니의 술회이셨다. 그도 그럴 것이 다섯 살엔가 천자문을 떼는 총기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인데, 어려서부터 악지(고집)가 세고 자라자마자 그렇게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신학교엘 들어가더니 뛰쳐나오질 않나, 노동판엘 굴러다니질 않나, 일본엘 밀항을 하지를 않나, 아무튼 일찍부터 동네에서는 주의자(主義者:그때 저항적 지식인의 통칭)로 호가 나고 유치장 출입을 자주 하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이 되었으니 부모님들께 끊임없는 불안과 상심거리였던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유훈과 형의 교훈'(제1권 150쪽)

“아무리 공산당 치하지만 해방 후 첫시집이라는 그 의의와 문학동인들과의 우애도 있고 해서 나는 작품을 다섯 편인가 제출했었는데 이 시편들이 이미 중앙문단에도 알려져 있던 강홍운(康鴻運), 노양근(盧良根) 두 분 작품과 함께 소위 기성대접을 받아 시집《응향(?香)》의 권두에 실렸고 일반회원 작품은 각 한 편씩 게재되었다.
그 시집의 장정은 바로 이중섭(李仲燮)이 맡았었는데 표지 그림은 역시 그가 즐겨그리던 군동상(群童像)이었고 종이는 한지를 쓰고 고풍하게 꾸며져서 그 시집의 외장(外裝)만으론 지금 서울 출판계에 내놓아도 호화본에 속할 것이다. 그 시집이 나온 것은 그해 11월쯤으로 기억되고 당시 북한의 정황 속에서는 가장 문화적 생산을 한 셈이어서 동인 중 우리 2세 소련군 장교인 정률(定率)이나 공산당 간부인 서창훈(徐昌勳)같은 사람도 이 시집 출판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판인데 그것이 배포된 지 한 달 남짓한 1946년 말 어느 날 평양서 날벼락이 떨어졌던 것이다.”
-‘시집 《응향》 필화사건'(제1권 278쪽) 

대향(이중섭의 아호)은 문자 그대로 천진무구하리만큼 착했다. 여기다 내가 체험한 한두 일화(逸話)를 곁들이자면 그가 즐겨 그리던 동자상(童子像)에도 이런 회포가 있다.
해방 이듬해 원산서 그는 조산아(早産兒)였던 맏아들을 돌도 안돼서 잃고 말았다. 우리는 관을 짜다 어린 것을 넣어 놓고는 시미즈 골목(원산의 유흥가)으로 달려가 흠뻑 취해가지고 돌아와 나란히 곤드라졌다. 그 이튿날 아침, 이제 관에다 못을 치고는 떠메서 나갈 판인데 그는 관뚜껑을 열고는 어린 것 가슴에다 간밤 그린 그림을 실로 꿰서 달아주는 것이었다. 거기 그려진 것은 뛰고 자빠지고 엎어지고 모로 눕고 엎치고 구부리고 젖히고 물구나무선 온갖 장난질치는 어린이 모상이었다. 대향은 입속말로 ‘상(常)! 밤에 가만히 생각을 하니 이 어린 것이 산소에 가서 묻히면 혼자서 쓸쓸해 할 것 같아서 동무나 해주라고!’ 하며 슬픔 속에서도 히죽 웃었다. 
또 언제인가 그는 내가 대구에서 병상에 누워 있을 때도 도화지에다 큰 복숭아 속에 한 동자(童子)가 청개구리와 노니는 것을 그려가지고 와서는 불쑥 내밀었다. 이것은 어쩌라는 것이냐고 내가 물었더니 그 순하디 순한 표정과 말로, ‘그거 왜 있잖아? 무슨 병이든지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天桃) 복숭아 있잖아! 그걸 상이 먹구 얼른 나으라고 이 말씀이지’ 하고 겸연쩍은 듯 또 히죽 웃었다.”
-‘이중섭과의 만남'(제1권 324쪽)

[출간에 부쳐]

“저자가 직저 감수하여 편집 마무리”
애초 선생님께서 전집 출간을 맡아달라고 하셨을 때, 문학 전문 출판사가 아닌 우리로서는 분에 넘치는 노릇이라고 했음에도 선생님은 수그러드시지 않았다. 당신이 손수 편집된 원고를 최종 감수하여 마무리하면 힘이 좀 덜어지지 않겠느냐고, 가벼운 산책도 힘이 들 정도의 건강 중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며 거듭 재촉하셨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선생님은 당신 손으로 일일이 검토해서 원고를 마무리지어 주셨다. 그리고 이 시문집에 나오는 시 100편은 저자 자신의 “에토스적 일생을 형상화한, 시로 쓴 자서전”으로, 이런 류가 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 시문집(詩文集)은 자전(自傳)이라는 관사(冠詞)대로 태질하는 시대 속에서 오직 자기를 잃지 않으려고 헤매고 몸부림치며 상처투성이가 되어 살아온 나의 실존적 삶의 현실적(역사적) 체험, 내면적(정신적) 편력과 추구를 지각(知覺)이 열리는 유년기로부터 이순(耳順) 중반에 이르는 1980년대까지를 <현대시학>지에 50회(90편) 연재하여 현대문학사에서 이를 간행한 것에다 그 뒤 나의 노경(老境)의 시 중 10편을 추가한 시들과 한편 여러 지면에 발표된 산문 속에서 나의 생활상을 발췌하여 엮은 《예술가의 삶》(혜화당)을 합본한 것이다. 그래서 이 시문집은 나의 생활사(生活史)인 동시에 정신사(精神史)요, 나아가서는 현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나는 과일 망신시킨다는 모과처럼 부실한 시인이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삶이 심신으로 더불어 악전고투의 심연 속에 있었어요. 그 응어리진 사연이 모과나무의 무성한 옹두리를 방불케 하지 싶어요.” 
– 제1권 ‘책머리에’ 중

서평

[신문기사] 

“시인 具常 문학총서 첫권 나와”

시인 구상(具常·84)의 ‘자전(自傳) 시문집’을 제 1권으로 하는 ‘구상문학총서’(홍성사 刊)가 출간됐다. 원로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노시인·작가가 ‘전집’이나 ‘총서’를 내는 일이 일상화된 요즘이지만, 이 시인의 총서에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형식의 연작시가 들어있다. 100편의 연작시로 자신의 일생을 담아낸 자전시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이다. 제1권의 1/3에 달하는 130여쪽의 분량에 노시인은 유년기부터 노년에 이르는 자신의 삶과 사회를 시어로 담아냈다.

‘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처럼/ 중심도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달까?/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 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 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100’ 중에서)

한 개인의 생활사와 정신사, 나아가서는 현대사의 한 단면이 그 안에는 응축되어 있다. 함경도 원산 출신으로 고향에서 펴낸 시집 ‘응향’ 때문에 공산당으로부터 “도피적, 반동적”이라며 겪었던 필화사건의 에피소드, 20년 넘는 언론인 생활을 거치며 써 온 산문 등 솔직한 기록들도 담담하게 적혀있다. 또 이중섭, 오상순, 마해송 등 당대의 예인들과 함께 겪었던 경험들도 흥미롭다. 절친한 관계였던 화가 이중섭이 돌도 지나지 않은 맏아들을 잃은 뒤, 그들은 관을 짜다 어린 것을 넣어 놓고는 유흥가로 달려가 흠뻑 취하고 곤드레만드레가 되었다고 했다.

“그 이튿날 아침, 이제 관에다 못을 치고는 떠메서 나갈 판인데 그는 관뚜껑을 열고는 어린 것 가슴에다 간밤 그린 그림을 실로 꿰서 달아주는 것이었다. 거기 그려진 것은 뛰고 자빠지고 엎어지고 모로 눕고 엎치고 구부리고 젖히고 물구나무선 온갖 장난질치는 어린이 모상이었다.”(이중섭과의 만남·324쪽)

구상문학총서는 시, 희곡, 시나리오, 서간문, 시 창작론, 신앙에세이, 금석문 등 각 분야에서 쓴 글을 모아 10여권으로 간행된다.

– 글/조선일보 魚秀雄 기자

[해설] 

“그의 일생은 진리의 모색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삶의 진정성이 공적인 발언과 사적인 행동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면 이 진정성을 뒷받침하는 진리, 즉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는 정태적인 교조(敎條)가 아니다. 구상의 일생은 진리의 모색으로 설명될 수 있고, 그래서 그의 시들은 그 길을 따라간 발자취의 기록이기도 하다.

-글/안선재, ‘해설’ 중에서


“실존적 전일성의 추구”

작품과 작가(인간)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비평적인 주장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가령 셰익스피어의 경우 그의 작품 뒤에 숨어 있는 인간 셰익스피어의 모습은 완벽에 가까운 수수께끼나 다름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이 셰익스피어 문학의 이해와 평가에 하등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T. S. 엘리어트 역시 작가 자신의 모습은 되도록 작품 뒤에 숨기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해 온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구상 선생의 경우는 인간과 문학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보다 적극적인 이유가 있다. 구상의 삶의 본질적 양식(樣式)은 이를테면 ‘실존적 전일성(實存的 全一性)’이라 할 수 있는 것이어서, 구상의 문학을 삶에서, 삶을 문학에서 떼어낸다는 것은 어떤 ‘상(像)’의 전체적 통일성을 훼손하는 것이 된다. 이 말을 좀더 부연하자면, 구상 선생의 사상(思想)에는 논리성(論理性)과 윤리성(倫理性)과 심미성(審美性)을 하나로 조화시키려는 의지가 있어, 이것이 ‘삶[生活]’과 형식[藝術]’의 경우에도 예외일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글/성찬경, ‘해설: 구상의 문학과 인간’ 중에서


[구상론]

“시인과 일상인과 신앙인의 비분리”

“그를 논의하는 좌표축은 실상은 종래 한국시를 논의하는 버릇에서 벗어난 곳에 놓여 있다. 그것은 시인과 일상인과 신앙인을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전인적(全人的) 실존으로서의 시인을 바라보는 좌표축을 필요로 한다. (……)

이러한 좌표축을 그 자신이 방법으로 제시해 놓지도 않았기에 시를 논의하는 한국적 관습들이 그의 시를 비시적(非詩的)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

그는 아마도 신현실주의가 주장하는 바 초현실주의가 치른 말초신경적 내부 이미지까지 채 도달해보지도 못했고 동시에 사회주의적 현실주의에까지 도달하지도 않은 자리에서 두 가지를 미리 통합해 버린 형국으로 우리에겐 보이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철저히 기교를 거부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비시적이다’라는 외침이 도처에서 들려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겐 보인다. 마치 그것은 온갖 기교를 사용하여 비시적이고자 했던 이상의 경우만큼 장관이라면 장관이라고 할 것이다.”

– 김윤식 ‘구상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