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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

6,500

박재순
2014. 11. 10
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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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을 지킬 때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된다”

서구의 인식론과 신학 방법론을 반성하고 우리 신학의 길을 트는 역작!

※ 모름의 인식론 : 우리말 ‘모름지기’는 ‘반드시’, ‘꼭’을 의미하는데 유영모는 이를 ‘모름직이’(모름을 지킴)로 풀었다. 생명과 물질의 세계에는 이성이나 물질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즉 밖에서 규명할 수 없는 모름의 차원이 남는다. 이 모름의 차원을 이성이나 개념으로 훼손하지 않아야 생명과 물질의 성격을 밝힐 수 있다. ‘안다, know’의 부정어가 다른 나라 말에서는 ‘안 안다, don’t know’인데 우리말은 ‘모른다’ 즉 ‘못 안다’라고 표현한다. 인식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겸손한 인정이 ‘모름’이란 말에 담겨 있다. 대상을 지배하고 부수어서 파악하려는 이성 중심의 접근법과 달리 내가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물으면서 스스로 알려 주기를 기다리고 내가 깨달아 알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인식론에서는 인식 대상이 수동적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인식 행위에 참여한다.

1. 죽고 죽이고 죽임 당하는 시대, ‘생명’이라는 화두

인간의 탐욕과 무관심으로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시대에 ‘생명’은 절실하고도 깊이 생각해야 할 주제다.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우리 철학 1, 2013)를 통해 20세기의 우리 철학인 씨알사상을 풀어 소개한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장은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우리 철학 2)에서 ‘생명’이 왜 기독교인의 신앙과 연결되는지, 생명을 바르게 대하고 맞이하는 법에 대해 생각한 바를 펼쳐 보인다. 생명 사건이 성경에 어떻게 증언되고 있는지, 한민족의 언어와 사상에 생명 체험이 어떻게 담겨 있는지, 한국 근현대사에 생명 이해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이 책은 밝힌다.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생명신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는 한국 근현대사 속의 민중의 삶과 의미를 드러내고(1장), 외래신학의 무분별한 수입이 아닌 우리의 신학을 주체적으로 할 것을 제안하며(2장), 묘합(妙合)과 서로 살림이라는 우리의 생명 체험을 드러내고(3장), 생명의 관점에서 삼위 하나님을 기술하며(4장), 생명 이해의 방식으로 서로 울림과 서로 느낌을 제시한다(5장). 2부 ‘평화를 이룩하는 신학’은 오늘날의 문명에 절실히 요구되는 평화를 생각한다. 먼저 한국 문화와 민주화 운동의 평화적 전통을 밝히고(1장),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을 김재준, 함석헌, 문익환을 중심으로 소개하며(2장), 군사 문화에 물든 이 땅에서 반전(反戰)의 의미를 묻고(3장), 동아시아의 평화로 가는 길을 우찌무라 간조, 함석헌, 김교신의 사상에서 찾는다(4장). 3부 ‘살림의 신학과 실천’은 어떻게 생명의 삶을 살 것인지 구체적 실천을 다룬다. 서구 문명의 인식론을 근본에서 비판하고 우리의 인식론을 제안하며(1장), 성경 읽기에서 생명 사건을 찾고(2장), 성경의 증언대로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 논하며(3장), 더불어 살아갈 존재로서 장애인을 어떻게 맞아들여야 하는지(4장) 논의가 이어진다.

2. 서구 철학의 인식론을 근본에서 반성하는 신학

서구 철학은 플라톤 이래 근본적으로 인간 이성의 인식 능력을 신뢰해 왔고 그 기반에서 서구 문명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 문명이 초래한 위기는 서구는 물론 서구 이외 지역에서도 생명 경시와 뭇 생명의 파괴, 죽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은 서구의 인식론, 생명에게 다가가는 근본 태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즉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을 깨뜨리고 파괴함으로써 대상을 파악하려는 반(反)생명적 인식론으로는 깊은 삶의 세계,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길은 ‘모름의 인식론’이다. 이는 서구의 인식론과 신학으로는 성경의 생명 사건과 우리의 삶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오늘 내가 있는 자리에서 생명 사건을 일으킬 수 없다는 반성이 깔려 있다. ‘모름의 인식론’은 인식 대상이 아니라 인식 주체가 깨지는 인식론이며, 인식 대상을 신뢰하고 인식 대상과 하나가 되는 인식론이다. 생명의 관계가 아닌 거래와 사업적 관계가 주를 이루어 생명을 생명으로 만나지 못하는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 필요한 인식론이자 신학이다.

3. 한민족의 생명 체험에서 시작하는 신학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은 한민족의 시원(始原)과 뿌리를 밝혀 들어가 우리의 생명 체험과 생명 이해가 어떤 것인지 밝힌다. 한민족은 “수천, 수만 년 전부터 해 뜨는 동쪽, 밝고 따뜻한 나라를 찾아” 한반도까지 이르렀다. 밝고 따뜻한 삶을 추구한 한민족은 동쪽에서 환히 비치는 태양의 광명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예맥(濊貊) 또는 한(韓=桓, 밝음)을 부족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산천과 사람 이름에 많이 쓰이는 ‘白’은 ‘희다’와 ‘밝다’, ‘밝고 따뜻한 햇빛’을 의미하며 ‘배달의 겨레’에서 배달은 ‘밝달=밝은 땅’을 뜻한다. 한민족을 나타내는 말에는 이 땅에서 산 사람들의 근원적 생명 체험과 생명 이해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을 살리는 분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은 우리 속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이자 사랑을 낳는 영이다. ‘셋과 하나’의 묘합을 말하는 삼일(三一) 사상은 기독교가 이 땅에 전파되기 이전에 이미 한국인의 심성 깊이 새겨져 있다. 서구 문명의 위기를 넘어 새로운 문명의 미래를 열어갈 씨앗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이 책은 한민족의 생명 체험을 통해 밝혀 놓고 있다.

저자

박재순

박재순은 1950년 충청남도 논산군 광석면, 강경평야 언저리 작은 마을 말머리에서 태어났고 대전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새벽예배도 열심히 다녔으며, 고등학교 때는 머들령이라는 문학동인회에 가입하여 시를 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에 매력을 느끼며 공부했다. 문리대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았고 독재정권의 억압과 최루탄 가스가 싫었다. 대학 졸업 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대문 구치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1981년 전두환 정권 때 한울공동체 사건으로 다시 2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두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 책 읽고 공부하며 생각할 시간을 넉넉히 가질 수 있었다.
1974년 가을 한신대학교에 입학하여 자유롭고 실천적인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다. 안병무 교수에게서 성서신학과 민중신학을 배우고, 박봉랑 교수로부터 카를 바르트 신학을 배웠다. 학사·석사학위 논문은 카를 바르트 신학, 박사학위 논문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으로 썼다. 서구 주류 전통 신학자 카를 바르트에게서 복음적인 신학의 깊이를 배우고, 서구 전통 신학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본회퍼에게서 신학적인 자유와 영감을 얻었다. 1980년부터 안병무 박사가 세운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번역실장으로 일하면서 국제성서주석 번역을 하였다. 독일 성서주석서 폰라트의《창세기》, 요아힘 그닐카의《마르코복음》I, II, 독일 여성신학자 도로테 죌레의《사랑과 노동》등 10여 권을 번역했다. 당시 한신대학교에서 해직 상태였던 안병무 박사는 매주 1~2회 연구소 직원들에게 성서와 신학에 관한 강의를 들려주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신학자였던 안병무 박사를 가까이 모시고 자유롭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고 특권이었으며, 연구소 번역실에서 아홉 살 어린 아내를 만나 결혼한 것은 그에게 축복이었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민중신학, 생명신학, 씨알사상 연구에 몰두했다. 대학 4학년 때부터 함석헌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 시작하여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을 연구하게 된 것은 보람이고 사명이었다. 함석헌은 그가 만난 가장 뛰어난 인물이고 위대한 정신이었다. 씨알사상연구회 초대회장(2002~2007)을 지낸 박재순은 2007년 재단법인 씨알을 설립하고 씨알사상연구소장으로서 함석헌과 그의 스승 유영모의 씨알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씨알사상》,《다석 유영모》,《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유영모·함석헌의 철학과 사상》(공저),《모색: 씨알철학과 공공철학의 대화》(공저),《씨알·생명·평화》(공저),《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민중신학과 씨알사상》,《한국생명신학의 모색》등이 있다.

차례

머리글

1부 / 생명신학, 어떻게 할 것인가

1장 생명신학, 어떻게 할 것인가? / 2장 생명신학—주체적인 학문하기의 한 시도 / 3장 한국인의 생명 체험과 생명 이해—묘합妙合과 서로 살림 / 4장 생명 살리기에 대한 신학적 고찰 / 5장 한민족의 생명 이해와 생명신학—서로 울림과 서로 느낌

2부 / 평화를 이룩하는 신학

1장 한국 문화의 평화적 성격과 한국 민주화 운동의 평화사상 / 2장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전통과 신학적 유산 / 3장 반전反戰, 평화를 위한 신학적 성찰 / 4장 동아시아의 평화—우찌무라 간조와 한국 제자들, 함석헌과 김교신 /

3부 / 살림의 신학과 실천

1장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관념에서 실천에로 / 2장 삶 속에서 몸으로 성경 보기 / 3장 21세기와 생명 교회론 / 4장 장애인의 현실과 장애인 신학


참고문헌

책속에서

자기주장과 탐욕과 체념, 절망에 빠진 인간은 자기 얼굴을 모르고 남의 얼굴을 모른다. 자기의 삶이 감추어져 있고 남의 삶도 감추어져 있다. 삶과 삶이 만날 수 없다. 내가 나를 보고 이해하는 것과 남이 나를 보고 이해하는 게 다르다. 내가 남을 보고 이해하는 것과 남이 자신을 보고 이해하는 게 다르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만 통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느끼고 불러야 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영에 맡기는 삶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영이 감동해야 내 삶이 열리고 남의 삶도 열려서 삶과 삶이 만나지고 통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은혜로 삶과 삶이 만나고 감동이 생기고 변화가 온다. 삶과 삶이 만나면 생명 사랑과 생명력이 솟아나고 생명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영은 사랑을 낳는다. 사랑은 생명의 울림이고 감응이다. 사랑은 생명을 낳고 살린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우주적 생명의 공명이 일어난다. 성령이 감동하면 내 속에 끊임없이 생명의 감동과 기운이 생겨난다. 그러면 지치지 않고 이웃과 생명을 나눌 수 있다.

__1부 4장 ‘생명 살리기에 대한 신학적 고찰’에서, 105쪽

*

그런데 기존의 서구 신학은 성경의 역동적이고 생명적인 사유와 언어에서 벗어나 그리스의 관념적이고 실체론적인 사유와 어법에 매이게 되었다. 페터 아이허Peter Eicher는 신학Theologie이란 말 자체가 성경의 말이 아니며, 기독교의 신학이 그리스의 정신과 철학의 맥락에서 생겨났음을 밝혔다. 서구의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의 철학과 결합됨으로써 그리스 철학의 관념과 실체에 근거한 교리 논쟁과 사변에 사로잡혔고, 국가 권력과 결탁됨으로써 교권과 제도에 매여 복음의 생명력과 실천력을 잃었다. 따라서 서구 신학은 삶과 유리된 신학이 되었다. 이성 중심의 신학, 로고스 중심의 이론과 해석을 추구하는 신학, 교권과 체제 유지를 위한 신학이 되었다. 그리스에서 인간 본성의 원리이면서 우주의 존재와 생성의 원리였던 로고스가 중세에는 인간 본성의 원리였고, 근대에는 비판적 계몽의 원리였다.

로고스 개념이 협소해짐에 따라 신학도 우주 자연과 인간 본성을 논하는 신학에서 성경과 신앙에 대한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이론 신학으로 전락했다. 오늘날 한국의 신학도 이러한 교리 신학, 이성 중심의 지식과 논리를 탐구하는 신학, 서구의 이론을 해석하고 소개하는 신학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신학이 아니라 교권과 제도와 권력에 복종하고 길들이는 신학이다. 이것은 ‘나’를 죽이는 신학이며 ‘너’에게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신학이다. 삶의 현장과 유리된 신학이고, 삶의 현장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는 신학이다.

_3부 1장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관념에서 실천에로’에서, 2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