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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16,200

저자 김경래

발행일 2013.4.25

상세정보 무선 / 456page / 210×297(mm) / 1040g

ISBN 9788936509743

카테고리:

품절

한국 교회의 숨은 일꾼, 김경래 장로의 삶을 통해
대한민국 현대사와 교회사의 굴곡을 되짚어 보다

“나는 이 책의 출판을 바라지도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당신만이 겪은 한 세대의 공동 관심사를 후대의 누군가를 위해 남겨놓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요’라는 권유를 묵인하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받은 친필 서신 40여 통을 사후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도, 양화진과 순교자기념관에 스며든 비화들을 기탄없이 옮겨놓는 것도 위의 묵인에 속한다.
생업에 몰두하던 많은 사람들이 나의 ‘가시오 오시오’ 하는 소리에 걸음을 멈춰 시간을 내주고 지갑을 열었다. 동참해 준 많은 분들께 폐를 끼치고 신세를 져, 미안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기자 30년, 장로 30년’의 삶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심을 관통해 온 김경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생생한 증언과 고찰의 기록이, 역사적 의미가 깃든 140여 장의 사진들을 징검다리 삼아 독자들에게 다가선다.
김경래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기자 생활을 시작하여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당하기까지, 격변기 역사의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가슴에 ‘정론직필正論直筆’을, 지면에 먹을 새겼다. ‘20세기 한국 언론이 보도한 10대 특종’으로 꼽히는 월남 파병 기사, 한국 경제를 뒤흔든 삼분三粉 폭리 사건과 사카린 밀수 사건 기사가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1부 ‘언론인의 길을 걸으며’는 기자 김경래를 다루며, 월남 파병 특종 전말, 정․관계 진출의 숱한 유혹을 받으면서도 언론인의 본분을 지킨 까닭, 언론계 대선배인 오소백․홍종인 선생과의 에피소드, 고달팠던 시절 기자로 산다는 것과 편집국장으로서의 애환 등을 담아냈다.

김경래가 만난 사람과 사연들
기자 신분으로 그가 만난 사람, 그를 거쳐 간 사람은 참으로 많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함태영 부통령, 장도영 의장, 박정희 의장, 김형욱 정보부장, 정일권 총리, 김종필 정보부장, 이후락 실장, 한일회담의 주역 이동원 장관,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 새마을운동을 주창한 김용기 장로,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 <경향신문> 파리특파원 시절의 이어령 박사, 작곡가 박재훈 목사, 평양과기대 김진경 총장……. 시대의 격랑 속에서 이들에 관한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이로 김경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든다. 국정 운영에 관한 제언 등을 서신에 담아 박 대통령에 보내고 그에게서 40여 통의 친필 답신을 받은 이는 김경래뿐일 것. 월남 파병 기사로 인해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박 의장을 처음 만나던 순간, 이후 박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 입성 제의를 받고 거절하던 순간 등을 회고하는 내용을 보며, 우리는 인간 박정희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보게 된다.

세상의 빛으로
1982년 한경직 목사의 뜻밖의 부름을 받고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사무국장으로 취임한 그는 당시 분열된 교계와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던 교계 일들에 광폭적 시야와 속도를 더한다. 그가 이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어렸을 때부터의 남다른 신앙 생활 때문인데, 2부 ‘행동하는 믿음으로’에서는 그의 가정사와 성장 과정이 소개된다. 또한 교회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신앙인이 아니라 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했던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다니엘학교, 기독실업인회, 기드온협회, 연예인교회, 매스컴선교회,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나라와 대통령을 위한 25기도모임 등 지금도 우리 귀에 익숙한 여러 기관과 단체를 조직하고 운동을 벌인 이가 바로 김경래임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 일들에 얽힌 사연과, 함께한 신앙 동지들의 이야기가 흥미를 더하는 한편 우리를 숙연케 한다.

주님의 그림자로
3부 ‘양화진 언덕에 서서’에는 김경래가 한경직 목사를 도와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여 온 이야기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경직 목사와 함께 일하게 된 계기에서부터 한국 교회 연합 사업을 추진하며 보람되었던 일과 어렵고 힘겨웠던 일들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1984년 한국 기독교계를 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는 한국 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무려 40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참가한 가운데 여의도에서 열린 이 대회는 한국이 미국 다음의 제2의 선교 대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된다. 이 현장을 감독한 이가 김경래다. 대회의 기획․준비․진행 과정을 거쳐, 마친 뒤의 여러 일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 한국 교회가 ‘선교 200주년의 빛’을 어떻게 밝혀야 할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지금은 한국 개신교의 성지로 거듭난 양화진楊花津, 그러나 이를 둘러싼 숱한 오해와 갈등으로 수년간 소송전訴訟戰을 벌인 이야기도 기탄없이 밝혀져 있다. 그간 일부 외국인 선교사 후손들, 한국 교회의 주요 교단 및 교단에 속한 언론에 의해 행해진 작태를 돌아보며, 우리는 한국 교회의 현주소와 일그러진 자화상을 마주하게 된다. 또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의연히 양화진을 지키고 가꿔 온 손길들과 조우하며 새로운 미래와 희망을 그려 보게 된다.

빛을 닮은 그림자, 김경래의 삶을 기억하며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가 걸어온 역사의 중요한 길목에 누구보다 가까이 서 있었던 사람. 역사의 주인공 뒤에서, 실무 책임자로 빛도 없고 이름도 없는 자리를 충실히 감당해 온 그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무거운 울림을 준다. 마지막 ‘덧붙이는 말’로 김경래 장로의 둘째 딸 김원숙 씨가 쓴 글은 우리에게 뜻밖의 사실을 일러 준다. 바깥일로 너무도 바빠 얼굴 보기가 힘들었던 아버지의 내면에 해학과 웃음이 가득했다는 것. 희생을 먹고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간 수많은 윗세대를 떠올릴 때, 그의 웃음은 숙연해진 아랫세대의 어깨를 말없이 다독인다. 그리고 힘주어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기보다는, 스스로 일어서게 하는 힘을 불어넣어 준다.
지금도 초심을 잃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그가 세운 단체와 모임들을 볼 때, 책 제목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는 그에 대한 시대의 고백이기도 할 터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누군가에겐 김원숙 씨의 글 제목 ‘우리 아버지’가 본문의 어떤 내용보다 가슴에 오래 남을 듯싶다.

 

*책에 수록된 사진 가운데 (사진의 저작권은 김경래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_1972년경 <경향신문> 편집국장 시절.


_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될 때가지 그에게 받은 편지가 40여 통에 이른다. 김경래는 언론인이기에 앞서 그리스도인으로, 사회의 중견 지도자로 편지에 비판과 제언을 담아 보냈다.


_한국 교회사에 이제껏 없었던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그것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1984년 8월 15일부터 19일까지 5일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에 국내와 해외에서 참가한 인원이 총 400만 명에 달했다.

_김경래 장로는 실무 책임자로서 수시로 현장을 감독하고 자원봉사 교육 장소를 찾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_어느 봄날, 광주제일교회에서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 준비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한경직 목사와 함께.

저자

김경래
1928년 4월 3일 경상남도 통영 출생. 독실한 신앙을 지닌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와 연을 맺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부산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고, 1957년 《사회악과 사교운동》 출간으로 한국 사회에 신흥 사이비 종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1960년 <경향신문>에 입사하며 언론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다. ‘20세기 한국 언론이 보도한 10대 특종’으로 꼽히는 월남 파병 기사, 한국 경제를 뒤흔든 삼분三粉 폭리 사건과 사카린 밀수 사건 기사가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1971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에 취임한 그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당하기까지 정론직필正論直筆을 위해 숱한 유혹과 격랑의 시대에 맞섰다.
이후 1982년 한경직 목사의 부름을 받고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사무국장에 취임하여, 당시 분열되고 느슨해 있던 교계 일들에 광폭적 시야와 속도를 더한다. 19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를 맞아 4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한국기독실업인회 활동, 기드온협회 운동,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 나라와 대통령을 위한 25기도모임 등을 총괄 기획하고 조정자 역할을 했다. 또한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건립 및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성지화 사업을 추진하는 등 한국 교회 연합의 기틀을 세우고 발전의 역량을 마련했다.
지은 책으로 《사회악과 사교운동》, 《사회부 기자 미국 루포》, 《애국가와 안익태》 등이 있다.
백시열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사무국장.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졸업. 기업체에서 20여 년간 홍보 및 출판 업무를 담당했으며, 2010년 1월부터 양화진에서 사역하고 있다.

차례

추천의 말 _이어령, 강병훈, 손봉호
머리말 _김경래

1부 언론인의 길을 걸으며

기자의 매력에 빠지다 
미국 여행에서 만난 새로운 세계 
《사회부 기자 미국 루포》 
<경향신문>에 둥지를 틀다 
월남 파병 특종 전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의 첫 만남
시대의 아픔을 드러내다 
삼분 폭리 사건과 사카린 밀수 사건 
특파원으로 세계를 누비며 
<경향신문> 31대 편집국장 
박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하다 
한국 사회의 내일을 생각하다 
박 대통령과 주고받은 편지 
새마을운동을 주창한 김용기 장로 
한일회담의 주역 이동원 장관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 
파리 특파원 이어령 
별명과 결혼식 주례에 얽힌 이야기 
꺾인 꿈, 강제로 마감된 언론인의 길

2부 행동하는 믿음으로

믿음의 그루터기 
믿음의 동반자, 아내 차은희 권사 
나의 자녀들 
믿음의 스승들 
믿음의 동지들 1 
믿음의 동지들 2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함없는 교회를 꿈꾸며 
집 판 돈에 얽힌 이야기 
사이비 기독교 비판 
“각하께서도 예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목포 공생원 윤학자 여사 
다니엘학교 이야기 
기독실업인회와 기드온협회 
연예인교회와 매스컴선교회 
기업가의 꿈을 내려놓다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 
한기총과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나라와 대통령을 위한 25기도모임 
작곡가 박재훈 목사 
연변과기대・평양과기대 김진경 총장

3부 양화진 언덕에 서서

100주년협의회 탄생 과정 
한경직 목사의 뜻밖의 초대 
100주년 선교대회를 치르다 
순교자기념관을 건립하다 
순교자기념관과 전두환 대통령 
양화진의 위기와 전택부 장로 
양화진에 선교기념관을 세우다 
선교기념관과 유니온교회 
한경직 목사 이후의 100주년협의회 
양화진 성지화 마스터플랜
100주년기념교회와 이재철 목사 
성지로 거듭난 양화진 
오해와 갈등 
모 교단의 개입 
‘양화진 소송’의 전말 
양화진은 나의 ‘땅끝’

덧붙이는 말 _김원숙
약력

책속에서

■ 월남 파병 기사가 나간 날 느지막이 출근하던 나는 세 명의 기관원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곳은 내가 늘 출입하던 경복궁 옆 최고회의 건물 안에 있는 이후락 공보실장 방이었고, 곧이어 박정희 의장실로 안내되었다. 취재기자로서 취재원을 만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추궁당하기 위해 잡혀 온 신세였으므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1년 전부터 최고회의를 출입하며 수많은 기사를 써왔지만 박정희 의장을 코앞에서 일대일로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긴장감 속에서도 박정희 의장의 손을 보았다. 타들어가는 담배 외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박 의장이 말문을 열었다. _‘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의 첫 만남’에서

■ 1982년 11월 어느 날 아침, 강남 말죽거리 인근에 살던 우리 집에 한경직 목사가 찾아왔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그가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교단과 출석 교회가 달랐으므로 나는 한경직 목사와 함께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내가 매스컴선교회 회장으로 있던 1970년대 중반, 선교회 월례모임에 한두 차례 오셔서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을 뿐이었다. 나로서는 한경직 목사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가 나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김 장로님, 저와 함께 일합시다.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을 하려고 하는데, 함께해 주시지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너무나 돌연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53세였고 대한아이소플라스트 사업뿐 아니라 국내 최초의 외식사업체인 던킨도너츠 국내 시장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성공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사업을 포기하고 교계 일에 동참해 달라는 한경직 목사의 제안은, 그래서 더욱 뜬금없는 것이었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1년 초 박정희 대통령의 청와대 입성 제의 이후 다시 맞닥뜨린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_‘한경직 목사의 뜻밖의 초대’에서

■ 선교대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동안 나는 거의 쉴 틈이 없었다. 여의도광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정부와 서울시를 설득하는 일, 선교대회 기금 확보를 위해 독지가와 교회를 찾아 모금하는 일, 선교대회 행사장에 각종 시설을 설치하는 일들이 나를 필요로 했다. 무엇보다 내가 신경 쓴 일은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어떠한 사고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과 이 행사로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가 손상되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행사가 끝난 뒤 많은 언론들이 선교대회와 한국 기독교인들의 성숙한 질서의식을 높이 평가했다. 지금 돌아보아도 당시 성도들의 의식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다. 선교대회가 한국 기독교 200주년을 준비할 일꾼들에게 좋은 선례가 된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평소 한경직 목사는 한국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이익과 안위를 버린 순교자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이 순교자기념관 건립의 주춧돌이 되었다. _‘100주년 선교대회를 치르다’에서

■ 법정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그동안 가슴에 맺혔던 말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전했다. 
“판사님, 이 사람들은 한국에서 추방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가 참 자존심도 없는 나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들이 일본이나 독일이나 프랑스에 있었으면 당장 추방되었을 사람들이에요. 선교사 후손이란 이들이 선조들이 묻힌 선교지에 와서 선교 현지에 있는 교계 지도자와 어른들을 들어 고소를 한다는 것은, 이 자체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선교사는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기 위해 선교지에 옵니다. 주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땅 내놓으라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이 사람들은 선교사가 아닙니다.”
나는 피터 언더우드에게도 “당신 아버지 어머니를 내가 잘 안다. 참 훌륭하신 분들이다. 당신 부모님은 이런 재판, 생각도 못하실 분들이다. 양화진을 이렇게 만들어 줄 때 한국 교회에 얼마나 감사해하셨는지 모른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_‘양화진 소송의 전말’에서

추천글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신을 다해 일하고 박수는 다른 사람이 받게 하는 삶을 일관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초지일관하며 그 많은 일들을 해왔는지 경이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과 실천으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_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한국 기독교 선교 100년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일을 할 당시 한경직 목사를 도와 그 일들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추진하고, 마무리 지은 분이 김경래 장로입니다. 그 역사적인 순간에 김경래 장로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_강병훈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이사장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변화와 굴곡 많은 시대를 거치면서 누구보다 풍부하고 다양하며 극적이기까지 한 그의 삶 자체가 우리의 거울이 되며,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한 헌신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큰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한국 교회사에 남긴 김경래 장로의 족적은 크고 오래도록 남을 것이며, 새로운 역사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_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추가정보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에 관한 소회

김경래 장로님과의 인연은 이렇다. 홍성사가 합정동에 자리하고 바로니까 1980년대 말이다. 통성명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에서 멀다. 어슴푸레 떠오르는 기억 하나는 정신여고 동창회에서 묘원에 식수를 하면서이지 싶다. 분명한 첫 기억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도로 포장을 위해 헌금을 부탁받으면서다. 20만 원. 어느 동네 보도블록 교체로 인해 철거된 중고 블록으로 묘원의 진흙길 포장을 하려는 데 쓰일 자금 동원의 귀퉁이를 감당하면서다.
그 인연은 시차를 두고 용인순교자기념관에 도서 기증을 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또 다른 인연은 홍성사가 독자들을 위해 집회를 여는 과정에서였다. 장소로 당시 유니온교회가 쓰던 선교기념관이 적합하여 대여하려는데, 관리인이 본인의 개인 일정에 맞추어 대관 일자를 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앞서 인연의 끈을 핑계로 ‘관리인 설득’ 협조 부탁을 드렸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허락되지 않았고 홍성사는 연말행사를 부득불 해를 넘겨 치렀다.
이렇게 간헐적으로 드믄드믄 이어진 관계이나, 인연의 확대재생산은 예측희박이었다.
그런데 김경래 장로님이 홍성사로 직접 그것도 여러 어른들과 함께 오셨다.
2005년 100주년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김경래 장로님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과 용인순교자기념관의 향후 보존 관리를 목적으로 한국유니온교회 곧 100주년기념교회를 설립하고 그 첫 목회자를 이재철 목사로 결정하고는 그를 만나 담판을 지으러 오신 것이다. 그날이 2005년 4월 21일이다. 나를 통해 이재철 목사와
약속을 잡으셨는데 꼭 함께 만나자 하셨다 했다. 그날 아침 이재철 목사와 나는 양화진묘원과 절두산 성지를 산책하면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어른들이 왜 오시지? 책을 내고 싶으신 건가? 그러면 굳이 당신(이재철 목사) 안 만나도 되는데……”
“글쎄.”
“묘원이 이렇게(형편없이) 관리되는데, 이 묘원을 관리 좀 하라면 몰라.”
웃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웃지도 말았어야 했다!
김경래 장로님과 어른들이 홍성사의 쿰 응접실로 당도하셨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일을 조심스럽게 부탁하셨다. ‘당신들(100주년기념사업회)의 현실적 한계로 인해 묘원과 순교자기념관이 방치되고 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려 한다. 와서 이 일에 동참해 다오’가 요지였다.
……생략.
김경래 장로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드믄드믄 쭈욱 점점 깊고 튼실해졌다. 그러면서 평생 ‘도발자’로 살아오신 인생 내력이 우리가 겪어 왔던 한 시대의 사건 사고와 밀접했음에 놀랐고 또 놀란다. 게다가 어느 순간 주님의 부르심에 조금도 뒤를 보지 않고 줄달음치신 행보는 가히 ‘순교적’이다. 이 책은 장로님의 사회참여의 이력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아카이브에 등재될 가치가 충분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장로님의 으뜸 캐릭터인
‘해학’을 담지 못한 점이다. 그래서, 그것도 지인들의 증언으로 다시 따로 묶어 남겨지기를 간곡히 희망한다.

_정애주 홍성사 대표이사 (2013.5. 쿰회보에서)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출판 경과보고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경과를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기자 30년, 장로 30년의 삶으로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신 김경래 장로님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자는 취지로 기획되었습니다. 
원래는 전 사회자인 김종찬 선생님이 김경래 장로님을 인터뷰하여 정리한 내용을 책으로 엮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2010년 8월 4일 원고가 탈고되고, 편집팀은 2010년 9월 중순 출간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원고의 수정․보완 작업을 위해 김종찬 선생님과 논의를 거듭하던 중 선생님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작업이 중단되게 되었습니다.

본래는 텍스트가 주가 되고 중간중간 사진을 수록한 일반적인 형태의 회고록을 생각했으나, 작업이 중단된 이후 사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새로운 컨셉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내용 면에서 원고를 좀더 객관적으로 정리해 줄 수 있는 저자를 물색하던 중,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의 백시열 사무국장님께 후속 작업을 부탁드렸고, 백 국장님이 흔쾌히 맡아 주셨습니다.
2011년 10월 백 국장님은 구성안을 보완하고 이를 토대로 집필을 시작하셨고, 방대한 자료의 고증을 거쳐 2012년 5월 말 탈고해 주셨습니다.

이후 2012년 말까지 구성과 내용에 대해 김경래 장로님, 백시열 국장님 그리고 출판사 실무진은 의견을 조율하며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특히 양화진 관련 부분에서 일부 내용은 적절히 덜어내고, 부족하다 싶은 부분에는 장로님의 증언을 토대로 보완하는 등 내용과 편집에서 완성도를 높이고자 했습니다.

이 책의 구성과 짜임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 ‘언론인의 길을 걸으며’는 ‘세상의 빛’으로 한국 사회의 내일을 밝히고자 한 언론인 김경래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3부 ‘양화진 언덕에 서서’는 ‘주님의 그림자’로 묵묵히 한국 교회를 섬겨 온 장로 김경래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1부와 3부 사이에 있는 2부 ‘행동하는 믿음으로’는 그가 교회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신앙인이 아니라, 사회 활동과 현실에 적극 참여하며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신앙적 배경과 가정사, 그리고 성장 과정을 다뤘습니다.

책 내용에서 세간에 가장 주목받을 만한 이야기를 꼽자면, 김경래 장로님이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친필 서신 40여 통을 받은 점일 듯싶습니다. 이 내용은 박 전 대통령 사후 30여 년 만에 최초로 공개되는 것입니다.
월남 파병 특종기사로 인해 당시 일선 기자이던 김경래 장로님이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박정희 의장을 처음 만나던 순간과, 이후 박 대통령에게 청와대 입성 제의를 받고 거절하던 순간 등의 내용을 보며, 우리는 인간 박정희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내용은, 오늘날 기독교 성지로 거듭난 양화진과 관련하여 그간 있어 온 숱한 오해와 갈등의 내막이 기탄없이 드러나 있다는 점입니다. 그간 양화진묘지에 대한 일부 외국인 선교사 후손들, 한국 교회의 주요 교단 및 교단에 속한 언론의 모습을 돌아보며, 한국 교회의 현주소와 일그러진 자화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또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의연히 양화진을 지키고 가꿔 온 손길들과 조우하며 새로운 미래와 희망을 그려 보게 됩니다.

책을 보면 편집과 디자인에서 여느 책과는 다른 모습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일단 표지는 이 책이 갖는 기록적 가치를 표현하고자 신문 이미지를 이용했고, 판형은 신문의 한 면 대판 사이즈를 44퍼센트 축소한 것으로 했습니다. 장로님이 만난 사람들과 해오신 일들이 워낙 많아 관련된 사진이 수백 장에 이르는데, 그 사진들을 일일이 선별하고 구성의 묘를 살려 본문에 배치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간추린 140여 장의 사진들과 텍스트가 현재의 모습으로 정리되기까지 디자인의 고민도 컸습니다. ‘역사적 의미가 깃든 사진이 텍스트보다 주가 되어야 한다’, ‘과거의 기록이 오늘에도 잘 읽혀야 한다’는 기준에 부합하는 레이아웃을 위해 시안 마련과 검토 작업을 거듭했습니다. 그리하여 기존 책에서 흔히 보는 글과 사진의 평면적인 병렬식 결합을 넘어, 팩트를 바탕으로 사진과 텍스트를 입체적으로 융합시킨, 출판물의 또 하나의 장르를 시도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앞표지 상단에 보이는 ‘1980년 7월 15일’이라는 날짜는 장로님이 신군부에 의해 언론사에서 강제 해직당한 날짜입니다. 장로님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는 의미 있는 시점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가 걸어온 역사의 중요한 길목에 누구보다 가까이 서 있었던 사람. 역사의 주인공 뒤에서 실무 책임자로 자신이 맡은 소임을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충실히 감당해 온 김경래 장로님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크고 무거운 울림을 줍니다.
1984년 한국 기독교계를 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는 한국 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 현장을 총감독한 분이 김경래 장로님임을 우리는 이 책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 연합을 위해 그가 벌인 일들의 기획, 준비, 실행 과정 이면에서 우리는 그의 너른 시야와 희생정신을 헤아려 보게 됩니다. 또한 ‘선교 200주년의 빛’을 어떻게 밝혀야 할지 가늠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은 책의 기획 의도와 취지,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책을 구성하는 내용적․외형적 요소에 관한 것인데, 책을 만들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바를 조금 보태고 싶습니다.

본문 마지막에 있는 ‘덧붙이는 말’은 김경래 장로님의 둘째 따님인 김원숙 선생님이 쓴 글인데, 우리에게 다소 뜻밖의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바깥일로 너무도 바빠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던 아버지의 내면에, 다른 무엇보다도 해학과 웃음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장로님이 다름 아닌 해학꾼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슨 모임에서든, 상대가 누구이든 웃음을 나눠 주며 그것을 본인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장로님의 이러한 면모를 알고 있던 편집팀은 책에 어떻게든 그것을 나타내고자 고민했는데, ‘구술-정리’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어, 결국 김원숙 선생님께 글을 청탁드린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 실리지 못한 수많은 사진들 가운데, 지금도 제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어느 모임 뒤편에서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은 채, 정장을 입고서 피아노를 치고 계시던 장로님의 모습이 담긴 사진입니다.
가난과 혼돈 등 시대의 질곡 속에서 희생을 먹고 스러져 간 수많은 윗세대를 떠올릴 때, 장로님이 지닌 경쾌함은 제게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누군가에겐, 본문의 어떤 내용보다 김원숙 선생님의 글 제목인 ‘우리 아버지’라는 두 단어가 가슴에 더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
지금도 초심을 잃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그가 세운 여러 단체와 모임들을 볼 때, 책 제목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는 그에 대한 시대의 고백이기도 할 터입니다.

2013년 2월 28일, 100주년기념재단을 피고로 한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는 대법원 확정 판결을 통해, 6년간 양화진을 둘러싸고 이어진 소송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 지금까지 말씀드린 편집 과정에 마침표를 찍으며 이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첫 원고가 편집팀에 온 지 2년 8개월 만입니다. 이 기록이 기획된 것은 더 이전입니다. 오랜 편집 과정을 거치는 동안 책의 알찬 구성과 내용을 위해 애쓰신 백시열 국장님과 김종찬 선생님, 책에 귀한 글을 보태 주신 이어령 박사님, 강병훈 목사님, 손봉호 교수님, 김원숙 선생님, 그리고 모든 것을 믿고 기다리며 귀한 증언을 남겨 주신 김경래 장로님께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3. 4. 29. 출판기념회에서
홍성사 편집팀 과장 김기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