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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까지 웃게 하라

9,000

뉴스마
2008.5.21

무선 / 256 Pages
9788936502560

품절

치과의사로서 탁월한 임상 및 강의 실력을 갖추고도 보장된 부와 미래를 버리고
척박했던 이 땅에 와서, 자신을 파송한 선교회의 급여만을 받으며 일터에서
온몸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한 인간 드라마!

한국에 와서 두 아이를 입양하고 자신의 젊음을 송두리째 바치게 된 사연, 동서양의 전혀 다른 문화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와 이에 얽힌 유쾌한 에피소드, 가난한 무의촌 환자들과 썩은 냄새가 나는 구강암 환자들을 마치 오랜 친구 대하듯 농담을 하고 웃겨 가며 신나게 치료하던 모습, 철저한 수련과정으로 전문인 양성에 힘쓰고 진료 현장에 필요한 장비뿐 아니라 북한에 이동식 치과 차량을 개발해 보급했던 과정 등 파란 눈의 치과의사 닥터 뉴스마의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도전, 한국 사랑이 펼쳐진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쁜 소식을 나누는 일입니다”
대한치과의사협회 치의신보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3만여 종이나 되는 생업에 종사하는 직업 중 화공약품을 취급하는 업을 가진 사람 다음으로 치과의사의 자살률이 높다고 한다. 2006년 9월 세계보건기구(WHO)의 정신건강 담당인 호세 베르톨로테 박사 역시 “치과의사, 수의사들이 특히 자살의 위험성이 높다”고 말한 바 있으며, 최근 미국 국립직업안전 보건연구소 소속 로버트 파크 박사는 연구를 통해 치과의사의 경우 타 직종에 비해 65세 이전에 발생하는 ‘조로성 치매’에 걸려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치과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고소득과 칼퇴근이 보장되는 안정적 직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직 낯설기만 한 것이 현실이다. 비단 자살은 치과의사만의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이라면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의 자살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고 수준인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까닭이다.
사람의 생명을 구해야 할 의사가 스스로 생명을 끊고 또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살기가 힘들어졌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늘날 자신의 일터에서 진정으로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1961년 가난했던 한국에 와서 25년간 광주기독병원 치과에서 일하면서 고통 받는 한국인들과 함께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끊임없이 봉사의 삶을 살았던 닥터 뉴스마.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힘든 일보다는 기쁜 일을 더 많이 나누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기쁜 소식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함께했던 주위의 사람들은 그런 그에 대해 “언제 어느 곳이든 재미있고 즐거운 장소가 되게 만드는 사람, 언제나 즐겁고 기쁘게 일하는 사람, 동시에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완벽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증언한다.
《영혼까지 웃게 하라》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많은 현대인들이 상실해 버린 ‘기쁨과 웃음’이라는 가치에 그 누구보다 가까이 있던 한 사람의 자서전으로, 그는 치통으로 고통 받는 환자의 입뿐 아니라 영혼까지 미소 짓게 했다. 과연 그의 삶은 어떠했으며 고난 중에도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 최고의 의술로 한국 치과 발전의 초석을 닦다!
그의 삶은 크게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의사로서의 삶이다. 그는 치과의사로서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당시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의 수많은 인재들이 광주기독병원과 학술대회로 모여들었는데, 이에 대해 치과의료선교회 양유식 회장은 “그는 특히 가르치는 일에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난 사람으로 당시 서울대 교수들에게 열 번을 들어도 못 알아듣는 내용을 한 번에 이해시켜 쉬우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명강의가 무엇인지 보여 주었고, 이는 아무리 어려운 미적분도 간단한 산술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으로 비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탁월한 임상 실력으로 제자들의 손을 친히 잡고 실습을 시켜 주며 그들에게 임상의 희열을 맛보게 해 주었다. 또한 처음 부임했을 당시 열악했던 상황에서도 그의 시술은 질적으로 뛰어나 그가 해 준 의치는 오랜 세월 동안 건재했다.
단 한 번의 강의나 진료도 대충 넘긴 적 없으며 철저한 수련과정으로 전문인 양성에 힘썼고, 호남지방 최초로 조선대학교 치과대학과 서원전문대학 치위생과 개설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진료 현장에 필요한 장비뿐 아니라 북한에 이동식 치과 차량을 개발해 보급한 과학자이기도 하며, 미국에서 휴가를 돌아올 때면 외국의 최신 치과 기술과 장비를 들여와 그야말로 한국 치과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쉰이 넘은 나이에도 밤늦도록 연구와 공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불태웠던 그는, 그럼에도 치과의사가 된 이유에 대해 그 직업에 대한 원대한 꿈과 비전, 부모님에 의한 강요 혹은 부와 안정된 미래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요, 자신도 그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주어진 일터에서 부단히 능력을 개발하고 기회를 창출해 사랑을 전하는 일이었다.

‘한국 치과의료선교의 아버지’ 닥터 뉴스마의 선교의 힘!
그의 삶에 있어 두 번째 면모는 낮은 자리에서 헌신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한 선교사로서의 모습이다. 그는 치과의사로서 부와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음에도 풍요로운 미국을 떠나 척박했던 이 땅에 와서 자신의 젊음을 송두리째 바쳤다. 또한 초라하고 남루한 무의촌 환자들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치료해 주었으며, 썩은 냄새가 나는 구강암 환자들을 마치 오랜 친구 대하듯 농담을 하고 웃겨가며 신나게 치료했다. 한국에 와서 지내는 동안에도 서울에서 병원을 개업해 자신을 위한 큰 이득을 취할 수도 있었으나 계속 광주에 남아 제자들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렇다고 병원에서 월급이나 그 밖의 대가를 받은 것도 아니고 자신을 파송한 선교회에서 보내오는 급여만을 받았다.
그런 그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난 뒤 일부 사람들은 그를 두고 실패한 선교사라 부르며 그를 선교의 모델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의 눈에는 얼마나 많은 교회를 세우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느냐가 선교의 척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많은 치과의사들은 현재 국내에서 가장 활발히 치과의료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으며 해외로 뻗어나가 인술과 복음을 나누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는 말로는 제자를 삼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영적 지배와 다름없고 양적 증대만을 중요시하며 결국 단발적인 선교에서 그치고 마는 일부 한국 교회의 선교 모습과 비교했을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지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오직 말이 아닌 솔선수범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써 현지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헌신을 이끌어 냈다는 점, 이것이 바로 닥터 뉴스마가 보여 준 선교였다.

기쁨과 웃음을 상실한 이 시대에 전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메시지!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특성 한 가지는 닥터 뉴스마만의 문체와 유머이다. 다른 사람들은 최고로 알아주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업적을 잘 드러내지 않은 점, 인생의 고비고비와 질곡 앞에 자신이 겪었던 역경과 고민, 희로애락의 ‘감정’들을 쏟아 놓지 않은 점, 대신 사건과 사실 위주의 서술 방식 등으로 이 책은 다른 자서전처럼 절절하진 않다. 하지만 어쩌면 그러하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 그만의 겸손함과 진실함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그가 한국 문화를 접하며 겪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과,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온갖 역경을 즐기며 헤쳐 나가려 했던 모습들이 더하여 잔잔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행복한 삶을 살았던 그에게도 고난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늘 가까이 있었다. 선교사의 길을 택하면서 가족과 헤어져야 했던 아픔과 그리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볼 것을 예감하며 아버지와 작별했던 사연, 신뢰받는 직원이 환자들의 진찰비를 착복하고 부자 환자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려 하지 않았으며 술 취한 거지는 당장 공짜로 치료해 달라고 큰 소리로 떼를 썼던 상황, 김치와 한국어 등 전혀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체화해 가는 과정, 한국에서의 헌신으로 한쪽 귀가 멀고 손가락이 마디마디 갈라졌으며 결국 간경화증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기까지. 또한 ‘머리말’에서 밝힌 바 솔직함을 넘어 순수함 혹은 용감함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고백처럼, 사실 그는 한국에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생의 곳곳에서 순간마다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뜻과 다른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순종하고, 그 상황을 의지적으로 즐기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치과의사도, 선교사도 아닌 치과의료선교사였다. 그의 삶에 있어 직업과 봉사는 결코 별개의 개념이 될 수 없었다. 《영혼까지 웃게 하라》는 하나님이 한 인간을 택하여 훈련시키고 선교 현장으로 보낼 때, 그리고 보냄 받은 종이 주님의 뜻에 충성하며 사랑을 전할 때 그 땅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밝히 보여 주는 등불이며, 오늘을 사는 메마른 영혼들에게 가슴속까지 시원함을 선사하는 청량음료가 되어 줄 것이다.

* 동영상 제작: 치과의료선교회

무게 358 g
크기 223 × 152 mm

저자

닥터 뉴스마 (Dick. H. Nieusma, Jr.)
1930년 미국 미시간 주 홀랜드에서 태어나 가난한 형편 속에서도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호프 대학 재학 시절 치과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졸업 후 1952년 미시간 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 이후 아내 루스 슬롯체마와 함께 1961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치과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2년간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한국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1963년 전라도 광주로 내려와 광주기독병원 치과에 부임, 치과 전공의 수련과정을 개설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의료진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무의촌 진료 봉사활동을 펼쳐 연평균 1만여 명의 환자를 진료했으며, 암 환자들을 위한 특수 보철 치료를 시행했다. 또한 호남지방 최초로 조선대학교 치과대학과 서원전문대학교(현 광주보건대학) 치위생과를 개설했으며, 한국 최초의 언어병리학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등 치과 발전에 기여했다. 한국에서 활동한 25년간 탁월한 강의 및 실습과 더불어 외국의 현대 치과 의술과 장비를 들여와 전문의 배출에 힘을 쏟았으며,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세계로 나아가 사랑을 베풀도록 1982년‘ 치과의료선교회’를 창설했다.
1986년 미국으로 돌아간 뒤 네브라스카 치과대학, 오랄 로버츠 치과대학 교수로 봉직했고, 은퇴 후에도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의료 봉사활동을 계속했으며 이동식 치과 차량을 개발해 북한에 보급했다.
그의 헌신을 기념하며 2003년 치과의료선교회에 의해 한국이 아닌 우즈베키스탄에 ‘닥터 뉴스마 기념 치과병원’이 설립된 것은, 한국인과 더불어 살며 오직 솔선수범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써 제자들로 하여금 동일한 사랑을 자발적으로 우즈베키스탄에 전하고 또한 그 사랑이 제2, 제3의 곳으로 계속해서 이어져 나가게 하는 진정한 선교가 무엇인지 보여 주는 하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차례

추천의 글
머리말

1장 “넌 좋은 설교자가 될 게다”
가난이 가져다준 빵 / 조선, 의용군, 그리고 나의 운명 / 내 일생의 여인 / 왜 치과의사가 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 동양에 대한 첫인상 / 불모지에 맺힌 성령의 열매 / 내 아들의 나라, 한국 / “광주에서 일할 치과의사를 구합니다” / 나눌 수 없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 파도에 부서지는 이별의 아픔

2장 반드시 넘어야 할 언어라는 산
쥐들의 벤허 전차 경주 /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른 한국어 체험기 / 두 번째로 주신 아이 / 다사다난했던 2년간의 어학당 생활 / ‘사람을 구하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 / 작은 예수가 되어

3장 한국인의 영혼까지 웃게 하라
치과 전공의 수련과정을 오픈하다 / 나의 치의술 철학 열 가지 / 암 환자를 위한 특수 보철 치료 시행 / 돌팔이 치과의사들과 삼뿌라 / 마지막을 예감하며 아버지와 작별하다 / 막내를 하늘에 묻은 코딩턴 박사 / 혹 떼러 갔다가 / 백일홍에 둥지를 틀다 / 무의촌 봉사활동 / 휴가도 식힐 수 없는 학업의 열정

4장 어려웠던 시절과 정이 담긴 풍경들
똥통과 기생충 / 한국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 “한국인에게 절대로 돈을 빌려 주지 마라” / 아는 것도 물어 가기, 싫은 것도 인정하기 / 몸과 마음의 안식처 대천해수욕장 / 잊지 못할 지리산의 물소리 바람소리 / 김치만큼 특별했던 한국 음식들 / 인턴과 연탄

5장 예수의 깃발을 휘날리며
푯대를 향하여 / 인턴으로 뽑아 주신다면 / 가슴을 찔렀던 아들의 한마디 / 2주 만에 준비한 치과대학 개설 / 제자의 만년필 / 치위생과를 개설하다 / 한국 최초의 언어병리학 프로그램에 참여하다 / 홀로 되셨으나 여동생을 얻으신 장모님

6장 이제는 한국인 치과선교사 양성이다
10년을 뒤돌아보며 깨달은 중요한 한 가지 / 광주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 문화 충격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 / 치과의료선교회 사역의 본격화 / 한국인처럼 살다 한국인처럼 죽은 인휴 선교사 / 새니-슬리브를 개발하여 전 세계에 공급하다 / 이런 마음을 시원섭섭이라 하던가!

7장 민들레 홀씨처럼 뿌려지는 사랑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길 / 우리 생에 가장 좋았던 시절 / 이제는 가족의 품으로 / 간경화증으로 시한부를 선고받다 / 선교 대회를 통해 다시 찾은 한국 / 이동식 치과 진료소를 개발해 북한에 보급하다 / “김일성 주석이 우리 하나님입네다!” / 우즈베키스탄에 설립된 뉴스마 기념 치과병원 / 사랑은 멈춤이 없다 / 내가 웃을 수 있었던 이유

후기를 대신하여

책속에서

■ 가족사진을 찾기 위해 명동에 있는 사진관에 들렀는데 사진사가 말했다.
“아, 그 미인 사진을 찾으러 오셨군요!”
나는 그가 루스를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미인이 미국인을 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적잖이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 첫 학기에 치른 구두시험은 예상대로 어려웠다. 고사장에서 나온 루스는 심란해했다.
“한국에 뭣 하러 오셨어요?”
“배 타고 왔습니다.”
루스는 2학기 때 치른 구두시험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말았다.

■ 나는 한국어 공부를 즐기려 했고 가능한 한 많이 연습하고자 노력했다. 어느 날 저녁, 치약이 필요하던 차에 연세대 앞 길모퉁이에 있는 약국까지 걸어내려 가면서 “치약 주세요”를 반복했다. 하지만 약국에서 그 말을 했을 때 점원이 내놓은 것은 다름 아닌 쥐약이었다! 쥐약으로 양치질을 할 뻔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실수였다.

■ 병원에서 일을 시작할 때도 좌충우돌 한국어 체험기는 계속되었다. 본동사에 어미 ‘게’를 붙이고 보조동사 ‘하다’를 써서 사동형 문장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진료대에 누우려 하는 환자의 편의를 위해 간호사에게 말했다.
“좀 누게 하세요.”
그런데 환자와 간호사가 입을 가린 채 웃기 시작했고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소변을 보는 데는 전혀 도움이 필요치 않은 환자였기 때문임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어와 관련하여 내가 겪은 경험들은 도전적인 취미와 더불어 치과 진료, 교육, 선교에 있어 향상된 봉사를 필요로 한 데서 비롯되었다.

■ 나의 치의술 철학 열 가지
첫째, ‘황금률 치의술’을 실천하라.
둘째, 환자의 총체적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라.
셋째, 가장 앞선 기술과 재료와 장비로 훌륭한 치료를 제공하라.
넷째, 영구적 조치를 취하기에 앞서 환자의 구강 상태를 개선하라.
다섯째, 제 때에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
여섯째,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자를 치료할 때와 똑같이 관심과 존중의 마음을 갖고 대하라.
일곱째, 치과 의료진에게 온유하게 대하고 가르쳐라.
여덟째, 환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라.
아홉째, 환자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주라.
열째, 환자의 영적 상태에 관심을 가지라.

■ 제가 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졸업 요건 중 하나로 부분 의치를 해 넣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2년간 어떤 환자를 치료한 한 학생이 졸업할 때가 되어 부분 의치를 해 넣는 작업만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환자가 갑자기 병들어 죽었습니다. 담당 교수는 그 학생을 도와주기로 결심하고서 병원의 시체 보관소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서 학생은 주검이 되어 있는 그 환자의 입에 부분 의치를 끼워 넣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치료하는 진정한 선교사들이 우리 가운데 과연 얼마나 될까요? 환자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데 그들의 육체적인 문제들만 다룬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죽은 사람의 입에 부분 의치를 끼워 넣는 행위와 똑같은 것입니다! 어떤 봉사를 하든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과 생명의 떡을 함께 나누기를 열망하고, 생명을 주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그들도 경험할 수 있길 기도합시다.

■ 1993년 5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제6회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학술대회에서 강연해 달라는 초대를 받고 뜻하지 않은 기쁨을 느꼈다. 광주기독병원 출신 사람들과 재회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전에 광주기독병원에서 함께 근무했던 오랜 친구들을 만났다. 헤어질 무렵이 되자 고영자 선생이 나를 껴안고 얼굴을 품에 묻고는 울었다.
“아버지! 아버지!”
광주를 떠난 후 전화와 편지를 통해 같이 일했던 한국인들로부터 “그때가 우리 생애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라는 말을 종종 듣기는 했지만, 그 시절 모두가 얼마나 친했는지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