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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없이 미래 없다

13,050

발행일 2009.8.13
상세정보 무선 / 342p
ISBN 9788936508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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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노벨평화상 수상자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의 치유와 용서, 화해에 관한 메시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 설립은 국제적으로 선구적인 사건이었다. 그 어떤 나라도 과거에 저질러진 잔학 행위를 드러내면서 이전의 억압자들과 화해를 시도하여 폭정에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추구하지 못했다. 한 나라를 치유하려는 이 전례 없는 시도의 한복판에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있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그를 ‘진실화해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투투 대주교는 남아공이 이 고통스러운 과업을 이루어 내도록 돕는 과정에서 얻은 심오한 지혜를 이 책에 오롯이 담았다.

《용서 없이 미래 없다》에서 투투 대주교는 과거를 부정하고서는 참된 화해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 나라가 “야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화해하는 일도 결코 쉽지 않다. 그는 용서에 대한 상투적인 말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할 수 있는 끔찍한 일들을 인정하되 화해에 대한 이상주의도 포기하지 않는 담대한 영성을 제시한다. 수십 년간의 경험에서 나온 명확한 관점으로, 더욱 새로운 세상, 더욱 인간다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정직과 긍휼을 겸비하고 전진하는 법을 보여 준다.

* * *

남아공 인종 차별의 역사
17세기 중엽 백인 이주와 더불어 시작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우월주의는, 1948년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너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의 단독정부 수립 후 강화되어 아파르트헤이트(인종 차별/인종 격리) 체제를 낳았다. 국민의 16퍼센트밖에 안 되는 백인이 84퍼센트나 되는 유색 인종을 무참하게 차별한 이 정책은 46년간 계속되다가 1994년 4월 27일 남아공 최초의 민주 선거가 치러지고, 그 해 5월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 종식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4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법적으로 금하고, 인구등록법에 따라 백인, 컬러드인(흑백 혼혈), 인도인, 흑인이라는 네 개 인종으로 나누고, 집단지역법을 만들어 인종별로 거주지를 규정하여 강제 이주시켰으며, 유권자 분리대표법을 두어 유색 인종이 중앙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했다. 또 반투(Bantu)교육법을 실시하여 모든 흑인 아동의 취학을 정부 통제하에 둔 뒤 흑인 아동들에게는 고등 교육을 시키지 않고 급식도 제한했다. 이뿐 아니라 그들은 인종 차별 체제를 지키기 위해 잔혹 행위를 수도 없이 저질렀다. 희생자의 목에다 타이어를 끼우고 석유를 가득 부은 뒤 불을 지르기도 했고, 노인의 머리를 쇠파이프로 때려 살해하기도 했으며, 사람을 죽인 뒤 증거 인멸을 위해 시체를 태우면서 옆에서 바비큐를 즐기기도 했다. 고환을 꺼내 골프공 크기가 될 때까지 힘껏 쥐어짠 뒤 강하게 내리치기도 했으며, 염소를 잡듯이 전지가위로 목을 찔러 죽이기도 했다. 이것이 불과 한 세대 전에 남아공에서 있었던 일이다.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와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는 동포들에게 화해를 위해 일하자고 촉구한 뒤 스스로 화해의 사도가 되었다. 과거 백인 정부가 저지른 흑인들에 대한 잔혹의 역사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만델라는 남아공의 과거를 다루기 위해 ‘진실화해위원회’를 설립한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화해는 매우 중요한 축이 된다. 이 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에서 저지른 수많은 잔혹 행위들을 인정하고 가해자들에게 그 진상을 소상히 듣되, 이로 인해 사람을 처벌하는 대신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를 치유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특히 만델라 대통령은 이 중요한 임무를 위해 남아공 성공회 대주교인 데즈먼드 투투를 진실화해위원회 의장에 임명했다. 데즈먼드 투투는 신앙에서 우러난 맑고 투명한 통찰과 지혜로 남아공을 위기에서 구해 냈다. 19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이미 세상에 이름을 알렸지만,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그는 남아공을 빛낸 10인에 들어갈 만큼 남아공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데즈먼드 투투는 이 책에서 진실화해위원회가 추구했던 철학과 신앙, 그리고 피나는 노력의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관대함의 정신-우분투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진실화해위원회를 이끌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우분투 철학이다. 응구니족 언어로 ‘우분투’(Ubuntu)는 인간됨의 본질을 뜻한다. 관대하고 호의를 베풀며 친절하고 다정하며 남을 보살필 줄 알고 자비롭다는 뜻이다. 또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분투가 있는 사람은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인격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 앞에서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더 큰 전체에 속한 존재임을 아는 그에게는 온당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족들에게 고문, 강간,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안에 용서와 아량을 베푸는 관대함, 즉 우분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맥을 같이하여 투투 대주교는 징벌을 주된 목표로 하는 ‘응보의 정의’가 아닌 ‘회복 의 정의’를 강조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법제도의 특징으로, 회복의 정의의 주된 관심사는 징벌이나 처벌이 아니라, 우분투 정신에 따른 불화의 치유, 불균형의 시정, 깨어진 관계의 회복, 희생자와 범죄자 모두의 복권 추구이다. 범죄자도 자신이 상처 입힌 공동체에 재통합될 기회가 필요한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회복의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유와 용서, 화해를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남아공에는 기독교가 없었는가?
하나님이 만드신 백성을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해 오는 동안 남아공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놀랍게도 남아공은 인구의 75퍼센트가 기독교인이다. 물론 인종 차별 반대를 외치며 싸워 온 교회들도 있었지만, 남아공의 네덜란드 개혁교회 같은 경우에는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고, 인종 분리를 하나님이 승인하신 것으로 인정하며 제도화하는 법률을 정치가들보다 앞서 제안했다. 그들은 바벨탑 건축과 이후에 나타난 언어의 혼란과 인종의 분산, 함의 저주 등의 성경 이야기들을 원주민들을 적절한 자리에 묶어 두기 위한 근거 구절로 제시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내 이웃을 차별하라는 말이 있었는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기독교의 근본정신이다. 이들은 바벨탑을 쌓은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에 인종 분리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바벨탑 사건의 모든 결과가 극적으로 뒤집어졌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 괴상한 성경 해석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들을 억압해 온 것이다.

용서 없이는 미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이 지금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힘 있는 자와 없는 자, 좌와 우, 여성과 남성, 고용주와 근로자, 종교인과 종교인……. 과거 우리의 처절한 역사를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우리는 여전히 싸움터 한복판에서 상처로 얼룩져 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응보의 정의는 외칠지언정 회복의 정의는 없는 사회. 이 사회에 지금 필요한 건 데즈먼드 투투가 시종 일관 견지해 온 대로 우분투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용서’다. 용서는 그저 이타심만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용서하는 자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된다. 상대를 비인간화하는 것은 틀림없이 나도 비인간화한다. 용서는 사람들에게 회복할 힘을 주어 그들을 비인간화하려는 온갖 시도를 이기고 여전히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한다.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사회, 우분투를 실천하는 사회. 그 사회에 참된 미래가 있다. .

무게 482 g
크기 223 × 152 mm

저자

데즈먼드 투투
남아프리카공화국 성공회 성직자. 노벨평화상 수상자. 1961년 성공회 교구사제로 임명되어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신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이후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교회협의회(WCC) 부의장(1972-75), 요하네스버그 대성당 수석사제(1975-76)를 지냈으며, 1986년 흑인 최초로 케이프타운 대주교가 되어 160만 명의 신자가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성공회의 수장이 되었다. 1980년대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 교회협의회에서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을 이끌어 왔으며, 1994년 흑백연합정부가 수립된 뒤 1995년 진실화해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남아공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했다. 지금은 전 세계를 다니며 활발히 강연하고 있으며, 애틀랜타 에모리 대학 방문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하나님의 뜻》(The Divine Intention), 《희망과 고통》(Hope and Suffering) 등이 있다.

홍종락
서울대학교에서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사랑의집짓기운동연합회에서 4년간 일했다. 지금은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으며, 번역하며 배운 내용을 자기 글로 풀어낼 궁리를 하고 산다. 저서로 《나니아 나라를 찾아서》(정영훈 공저, 홍성사)가 있고, 《성령을 아는 지식》,《루이스와 톨킨》, 《루이스와 잭》, 《교회 다니는 십대, 이것이 궁금하다》, 《개인 기도》, 《꿈꾸는 인생》, 《영광의 무게》(이상 홍성사), 《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좋은 씨앗)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했다. <2009 CTK(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판) 번역가 대상>을 수상했다.

차례

1. 새 시대의 시작
2. 용서를 향한 제3의 길
3. 때가 차매
4. 어떤 정의를 택할 것인가?
5. 용서의 물꼬를 트다
6. 피해자 청문회
7.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8. 밝혀지는 과거사
9. 위원회에 닥친 위기
10. 그들만의 진실
11. 용서 없이는 참으로 미래도 없다
12. 상처 입은 치유자

책속에서

‘우분투’는 서구 언어로 번역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것은 인간됨의 본질을 뜻한다. “유, 우 노분투”(Yu, u nobuntu, 이봐, 아무개가 우분투가 있어)라는 말은 최고의 찬사다. 관대하고 호의를 베풀며 친절하고 다정하고 남을 보살필 줄 알고 자비롭다는 뜻이다.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내 인간성은 당신의 인간성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여러 사람과 한데 묶여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사람이 된다”는 말도 같은 뜻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다. “나는 속하고 참여하고 나누기 때문에 인간이다”라고 해야 마땅하다. 우분투가 있는 사람은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인격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 앞에서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더 큰 전체에 속한 존재임을 아는 그에게는 온당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욕을 받거나 위축되거나, 고문이나 압제를 당하거나, 실제보다 못한 취급을 당할 때 그 자기 확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조화, 친절함, 공동체는 모두 가치 있는 선이지만, 사회적 조화는 우리에게 숨뭄 보눔(summum bonum), 즉 최고선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추구해 온 이 선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모든 것을 역병처럼 피해야 한다. 분노, 적개심, 복수심, 심지어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성공은 이 선을 좀먹는다. 용서는 그저 이타심만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된다. 상대방을 비인간화하려는 것은 틀림없이 나도 비인간화한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회복할 힘을 얻고,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려는 모든 것을 이겨 내며 여전히 인간답게 살 수 있다. pp.41-42(용서를 향한 제3의 길)

~ * ~ * ~

그러나 응보의 정의 외에 또 다른 정의가 있다. 회복의 정의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법제도의 특징이었다. 회복의 정의의 주된 관심사는 징벌이나 처벌이 아니다. 우분투의 정신에 따른 불화의 치유, 불균형의 시정, 깨진 관계의 회복, 희생자와 범죄자 모두의 복권 추구이다. 범죄자도 자신이 상처 입힌 공동체에 재통합될 기회가 필요한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범죄를 사람들에게 벌어진 일로, 그 결과를 관계의 파괴로 보는, 훨씬 더 인간적인 접근법이다. 따라서 정의, 즉 회복의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유와 용서, 화해를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p.68(어떤 정의를 택할 것인가?)

~ * ~ * ~

우리는 백인 동포들에게 인종 차별의 어리석음을 자주 지적했다. 그들이 당혹감을 느끼고 그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코가 큰 나는 피부색 대신 코의 크기를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치하에서처럼 대학은 백인들만 다닐 수 있다고 말하는 대신, 코가 큰 사람만 다닐 수 있게 하면 어떻겠는가? 학업 성적이 아니라 큰 코를 대학 입학 자격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코가 작은 불행한 사람이 코 큰 사람 전용 대학에 다니려면 작은코부 장관에게 허가를 얻어야 한다. 자, 이러면 상황이 어떻게 될까? 내가 강연장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면 청중 대부분은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얘기에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다. 인종 차별이 이런 식으로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문제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슬프게도 절대 그렇지 않았다. pp.109-110(피해자 청문회)

~ * ~ * ~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세상의 중심에는 소외와 파괴, 분열과 적의, 부조화가 만들어 내는 끔찍한 원심력을 거스르려는 움직임이 있다. 하나님은 중심을 향한 움직임, 하나됨과 조화, 선함과 평화, 정의를 향한 구심력을 작동시키셨다. 이것은 장애물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양팔을 쭉 펴신 것은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우주적인 포옹으로 품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 모든 것이 그분께 속하게 될 것이다. 외부인은 없고 모두가 내부인, 모두가 한 무리가 된다. 이방인은 없고 모두가 한 가족, 하나님의 가족, 인간 가족의 일원이 된다. 유대인과 그리스인,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의 구분은 더 이상 없다. 분리와 나눔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모든 차이는 근본적인 통일성 위에 서 있기에 오히려 풍부한 다양성을 이루는 데 필요한 긍정적인 요소가 된다. 우리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철저하게 자족적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자족적인 인간은 인간 이하의 존재일 따름이다. pp.308-309(용서 없이는 참으로 미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