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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우간다에서 23년

7,500

유덕종
2016. 3. 10
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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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우간다로 파견된 코이카 1기 정부파견의사,
유덕종 의사가 받아온 삶의 처방전


코이카 25주년, 코이카 최초 정부파견의사의 23년간의 기록
한국 정부는 1968년부터 40년이 넘도록 우수한 한국 의사들을 개발도상국에 파견해 질병으로 고통받는 현지 주민들에게 질병 예방, 치료, 보건환경 개선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도주의적 사업을 펼쳐왔다. 유일하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해외 원조를 하는 나라로 비약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민의 자긍심과 국제 사회의 관심도 높아졌다. 그 중심에 우리나라의 공적개발원조(ODA) 활동을 담당하는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와 묵묵히 파견 업무를 수행하는 봉사자들이 있다.
코이카는 1991년 4월에 설립되어 올해 4월 창립 25주년을 맞는다. 그리고 때마침 코이카에서 최초로 아프리카에 파견한 1기 정부파견의사(이하 정파의) 유덕종 의사가 우간다에서 23년간 의료 봉사를 하면서 남긴 기록물이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그 열악한 곳에서 고군분투한 그의 일생이 담긴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사반세기를 맞이하는 코이카로서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 대한민국 해외 원조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기록이 될 것이다.

32세 젊은 의사, 우간다로 떠나다
의대생 시절부터 막연히 슈바이처와 같이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저자는 안동에서 근무하던 1991년, 막 창설된 코이카에서 낸 정파의 모집 공고를 보게 된다. 그는 학생 시절 품었던 꿈을 위해 큰 결단을 내리고 병원을 그만두었다. 의사로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떠나려는 그를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고, 부모님도 전도유망한 아들이 고생길이 훤한 아프리카로 간다고 하니 처음에는 많이 힘들어하셨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가 떠날 곳은 1990년대 초반에는 세계 최고의 에이즈 유병률로 널리 알려진 우간다였다. 그는 당시 코이카에 정파의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한 아프리카 나라 가운데, 영어가 가능하고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를 선택했는데, 그곳이 바로 우간다였다. 그의 나이 32세,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는 홀로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에이즈에 대한 우려로 셋째를 임신한 아내와 두 딸은 우선 한국에 남겨두었다.

생각보다 훨씬 열악한 우간다,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잃다
당시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는 한국의 소도시만도 못했다. 치안도 불안해 강도와 도둑이 들끓었다. 강도와 도둑을 막기 위해 모든 집이 쇠창살과 자물쇠로 잠겨 있었는데, 문마다 자물쇠가 잠겨 있어 기본적으로 열쇠를 열 개 정도 가지고 다녀야 했다. 기르던 경비견이 도둑에게 독살당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는 동부 아프리카 최고의 대학병원이라는 물라고 병원에서 의료 봉사를 시작했지만, 중요 시설이라 우선적으로 전기를 공급받는 그곳도 열악한 인프라 때문에 정전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도 의약품과 제대로 된 진단 장비가 태부족이었다. 심지어는 병실에 체온계와 혈압계도 없었다. 살릴 수 있는 환자가 의약품과 장비 부족으로 죽어가는 걸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의사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고통이 그의 마음을 파괴시켰다.

병원을 설립하려는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다
2년 뒤 다른 곳으로 파견 갔던 정파의는 모두 계약을 갱신하지 않아 1기 정파의 가운데 혼자만 남게 되었다. 아프리카 의료 봉사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저자도 말라리아의 위협 때문에 항시 모기를 조심해야 했고, 에이즈로 인해 급증한 결핵 환자를 치료하다가 결핵에 걸렸으며, 잘 들지 않는 바늘로 에이즈 환자의 피부를 봉합하다가 손가락이 바늘에 찔리는 아찔한 사고를 당했다. 비슷한 사고로 총 여섯 차례나 에이즈 검사를 받아야 했다.
결국 열악한 의료 환경 때문에 큰딸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는 사건을 겪는다. 저자 자신이 우간다에서 가장 큰 병원에서 일하고 있지만, 갑자기 뇌수막염 증세를 보이는 큰딸을 제대로 치료할 병원이 없어 집에서 치료해야만 했다. 우간다에 인공호흡기도 하나 없던 시절이라 호흡이 멈춘다면 의사인 그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큰딸이 살아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간다에 가난한 사람들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설립하려는 비전을 세우게 된다.

우간다에서 오히려 삶의 처방전을 받아오다
병원 설립 계획을 들은 독일인 동료는 그를 ‘꿈꾸는 사람(Dreamer)’이라고 놀렸지만, 그는 결국 2002년 베데스다 클리닉 개원이라는 결과물을 얻었다. 베데스다 클리닉은 캄팔라 고아원들의 어린이를 무료로 치료해주고 있다. 커다란 좌절도 겪었다. 한국 의료팀과 함께 의대가 전혀 없는 아테소 지역에 의대를 설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설립학장직을 맡은 그는 현지인의 무관심과 만연한 부정부패를 극복하며 우간다 정부의 허락만 받으면 바로 의대를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내놓았지만,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베데스다 클리닉을 종합병원으로, 열대병 연구소로, 종국에는 의대로 발전시키는 꿈을 꾸고 있다.
이런 20년이 넘는 봉사의 결과로, 물라고 병원 ‘베스트 의사’로 선정되고, 마케레레 의대생에 의해 ‘올해의 교수’로 뽑혔으며, 마케레레 의대는 그의 업적을 기려 명예교수로 임명했다. 또 2,000명이 넘는 제자를 둔 ‘우간다 의사의 스승’이 되었다. 전직 우간다 보건부 장관과 현직 보건부 부장관도 그의 제자일 정도로 우간다 곳곳에서 제자들이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반대로 말한다. 베푼 것보다 얻은 게 더 많다고. 교만했던 자신이 우간다에서 진정한 삶의 방식을 배웠다며, 우간다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며, 이렇게 고백한다. “삶이 허락할 때까지 이곳, 아프리카에서 최선을 다해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의료 봉사를 할 계획이다. 내가 그들을 치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들을 통해 내가 치유받았기 때문이다. 내 병의 처방전은 낮아짐이었다.”(262면) 아프리카에 일생을 바친 의사가 오히려 삶의 처방전을 받아온 것이다. 이 처방전을 독자들에게 공개한다.

‘코이카의 꿈’ 해외 봉사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해외 봉사를 향한 젊은이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덩달아 코이카에 지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991년 코이카 봉사단 37명이 7개국에 파견된 것을 시초로 지금까지 5만 명 이상이 개발도상국 100여 나라에 파견되었다. 현재도 코이카는 매년 전 세계 50여 개국에 4,500명 이상의 월드프렌즈코리아(WFK) 봉사단원을 파견하고 있다.
그러나 해외 봉사를 준비하는 젊은이들은 보람찬 일을 한다는 장밋빛 이상만 생각하면 안 된다. 현실에서는 워낙 많은 변수와 위험 요소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하나의 해결책은 먼저 그 길을 걸어갔던 선배의 발자취를 확인하며 앞으로 벌어질 일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봉사하는 삶을 꿈꾸는 분들에게 간접 경험을 제공하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믿을 만한 가이드가 될 것이다. 특히 코이카를 통해 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끝없는 사투를 펼쳐야 할 봉사자들의 건투를 빈다.

책속에서

“약품을 사용할 환자들을 선별해야 했다. 약품을 사용하는 기준은 두 가지였다. 먼저, 이 약품을 사용했을 때 살 가능성이 많은 환자였다. 너무 중한 환자는 약품을 써도 사망할 가능성이 높아 죽어가는 환자들에게는 약품을 사용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환자 보호자의 유무였다. 물라고 병원에서는 약이 없는 경우가 많아 필요한 약은 환자나 보호자들에게 사오게 한다. 따라서 보호자가 없는 중한 환자를 소생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 하지만 내가 누구기에 살 환자와 죽을 환자를 가르고 투약을 선택한다는 말인가? 이 선택은 내게 커다란 아픔으로 다가왔다.”(56면, 살 환자와 죽을 환자를 가르는 아픔)

“한국 같으면 아이들이 열이 나더라도 감기로 보고 증상 치료를 하면서 기다리면 되지만 열대지방에서는 항상 말라리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더구나 우간다에 있는 말라리아의 95퍼센트는 치명적인 열대성 삼일열 말라리아다. 다른 종류의 말라리아는 말라리아 증상 자체만으로 사람을 죽게 하지 않지만 열대성 삼일열 말라리아는 치료하지 않으면 대부분이 사망하는 치명적인 병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라리아가 백인들의 손에서 아프리카를 구했다고 농담을 할 정도다. 아이들이 우간다에 온 초기에는 열이 나기만 하면 애들 손가락을 찔러 나오는 피로 말라리아 검사를 해야 했다.”(61~62면, 가족들이 우간다로)

“어느 날 복막생검을 하던 중 바늘에 찔렸다. 에이즈 환자인데, 결핵성 복막염이 의심되어 복막 조직검사가 필요했다. 복막 조직을 채취한 후 피부를 봉합해야 하는데 바늘이 너무 들지 않았다. 무리하게 힘을 주다가 바늘에 손가락이 깊이 찔린 것이다. 당시에는 노출 후 예방조치라는 게 없었다. 아찔했다. 순간적으로 손가락을 잘라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HIV 잠복기를 감안해 노출 후 5~6주 뒤에 검사해야 했다. 한 달간 침울해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환자를 찌른 바늘에 찔려도 HIV에 감염될 확률이 0.3퍼센트밖에 되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HIV는 치료약이 없었고 걸리면 죽는 병이었다.”(116면, 에이즈 검사를 받다)

“우간다에는 결핵 환자가 많다. 특히 에이즈가 창궐하면서 결핵 환자가 급증했다. 나는 물라고 병원에서 기관지경 검사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우간다 전역에서 그걸 할 수 있는 의사는 나 혼자였다(현재는 내가 교육한 우간다 의사 두 사람이 더 있다). 기관지경 검사를 받는 환자 가운데 결핵 환자가 많았다. 당시에는 마스크도 없어 겨우 고글만 쓴 채 기관지경 검사를 해야 했는데 결국 나도 결핵에 걸린 것이었다.”(121면, 결핵에 걸리다)

“초등학교 2학년인 큰딸 주은이가 두통을 호소했다. 처음에는 열이 나지 않았고 특이한 증상도 없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곧 발열이 시작되고 구토도 시작되었다. 증상은 갑자기 악화되었다. 며칠 후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경련을 하기 시작했다. 뇌수막염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내가 우간다에서 가장 큰 병원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곳도 내 딸을 믿고 입원시킬 만한 병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집 안방이 중환자실이 되었다. 아이 머리 곁을 지키고 있다가 아이가 경련을 시작하면 항경련제를 주사했다. 곧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되었다. 침대에 비닐을 깔고 대소변을 치웠다. 딸의 호흡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보통 환자들이 사망 직전에 보이는 체인스토크스 호흡이 시작되었다. 두뇌에 심각한 병변이 있다는 증거였다.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수직눈떨림도 관찰되었다. 절망적이었다. 당시에는 우간다에 인공호흡기도 하나 없었다. 호흡이 멈춘다면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 나중에 병원에 다시 출근하게 되었을 때, 함께 일하던 독일 의사가 다시는 내게 이런 불행한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이미 큰 고난을 많이 겪은 유 박사에게 또 나쁜 일이 생길 확률은 제로라는 것이었다. 우린 함께 웃었다. 뒤늦게 어느 교민이 했다는 ‘유 박사는 전생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기에 그런 일들이 연이어 생기는가?’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내게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물속에 빠져야 공기의 소중함을 알게 되듯이, 그런 아픔을 통해 내게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배웠다.”(128~129면, 죽음의 위기에 처한 큰딸)

“한번은 한국으로 휴가를 떠나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엔테베에서 부친 짐들 중에 가방 하나가 도착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탔던 대한항공에 신고를 하니 죄송하다며 대구에 있는 집까지 가방을 배달해주겠다고 했다. 짐을 찾기 위해 공항에 다시 올 필요가 없고, 더군다나 대구까지 배달해주겠다니! 우간다에서는 그런 서비스를 상상할 수 없었기에 감격했다. (…) 그런 경험만 하다가 이런 서비스를 받으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조국이 자랑스러워 입이 벌어졌다. 그런데 내 옆의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의 서비스가 엉망이라며 불평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오셨는지 물어보니 하와이에서 왔다고 했다. 미국에서 오신 분은 한국의 서비스가 엉망이라고 불평하고, 우간다에서 온 나는 한국의 서비스가 너무 좋아서 입이 벌어져 있었다.”(233면, 한국에서 당연한 것도 우간다에서는 큰 기쁨)

“사실, 내게는 자존심이라는 큰 병이 있었다. 어릴 때는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적이 많았다. 자존심이 힘든 상황과 유혹의 순간에 나를 어느 정도 지켜줄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지내는 동안 높아지고자 하는 본성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거의 사반세기를 보낸 후에야 낮아짐에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깨달았다. 결핵에 걸려보고, 에이즈 환자를 찌른 바늘에 찔려보니 그들의 고통이 마음에 와 닿았다. 자녀 학비가 부담이 되었을 때, 자녀 학비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의 마음과 하나 될 수 있었다. 열악한 의료 환경 때문에, 더욱이 큰딸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을 때 진정으로 그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었다. 이런 고난 덕분에 나는 진정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아니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261~262면, 우간다에서 배운 철학: 낮아짐의 축복)

차례

들어가는 말: 아프리카는 푸른 대륙이다

32세 젊은 의사, 우간다로 떠나다
코이카 1기 정부파견의사/우간다로 떠나다/거미줄이 쳐져 있는 국제공항/한국의 소도시보다 못한 수도/동부 아프리카 최고 대학병원/의사로서의 정체성을 잃다/우간다에서는 기름칠을 하라/“네가 타고 다니는 벤츠 좀 빌려달라”/은행 직원은 갑, 고객은 을/피살당한 한국 교민/살 환자와 죽을 환자를 가르는 아픔/막내아들이 태어나다/가족들이 우간다로/첫 성탄절에 이사를 가다/우간다에서는 큰 열쇠 꾸러미가 필수/개성인삼을 맛보다

우간다에서의 악전고투
1기 정파의 가운데 나 혼자 남다/평균수명이 짧은 이유/르완다 사람의 시체가 떠내려오다/우간다에서 가장 위험한 기간, 선거철/삶의 질을 떨어트리는 곤충들/목숨을 위협하는 말라리아/말라리아 박멸을 위해 DDT를 쓸 것인가/강도 피해가 많은 우간다/기후는 세계에서 가장 좋지만/음식을 남기는 게 미덕/열대과일의 천국/여자를 사고파는 결혼 문화/인터넷으로 가까워진 우리나라/한글학교를 시작하다/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은 짜장면/에이즈 검사를 받다/에이즈 발병률이 높은 이유/결핵에 걸리다/든든한 대학 후배가 오다

새로운 비전을 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큰딸/베데스다 의료 프로젝트를 시작하다/이디 아민의 장인 집으로 이사 가다/에이즈에 걸린 제자/베스트 의사로 뽑히다/독살당한 경비견/응급실에서 도망친 의료인들/생활을 바꾸는 유통의 힘/허리 디스크도 축복이었다/월드컵의 뜨거운 열기/코니 반군의 끔찍한 만행/우간다의 젊은 의사들은 대다수가 제자/우간다 의료진을 믿지 않는 대통령/한국에서 연수 교육을 받다/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의료팀들/미국 대학과 공동 연구를 하다/너무 흔한 시위/아프리카에서 느끼는 일본의 힘/우간다의 인구가 정체되었던 원인/VIP 환자를 치료하다/백인 환자에게 물린 과도한 입원비/소형 초음파기로 많은 환자를 살리다/아이들을 케냐로 떠나보내다/용서는 겁쟁이가 사용하는 단어?/음바라라 대학교에서 느낀 점/영연방 정상회의가 열리다

열악한 일상에서 발견한 행복
코이카 정파의 제도가 폐지되다/주술 신앙에 빠진 사람들/테니스를 치다 걸린 오십견/코이카 중장기 자문단에 선발되다/기득권의 욕심이 빚은 교통 지옥/점점 심해지는 대기오염/의료와 치안이 보장되지 않는 두려움/우간다에선 청진기 튜브가 길다/내시경 검사 도중 정전이…/부정부패가 심해 도와주기도 힘든 나라/부동산 부자가 된 의사/가장 가기 싫은 곳, 이민국/부족 간의 갈등이 심한 우간다/내가 거쳐간 물라고 병원장들/우간다에서 한국 가곡을 듣다/유리문을 뚫고 나온 하우스보이/외국에 나오면 다 애국자가 된다더니/한국에서 당연한 것도 우간다에서는 큰 기쁨

의대 설립을 추진하다
의대 설립 프로젝트 1–쿠미 의대 설립학장을 맡다/의대 설립 프로젝트 2–의대 커리큘럼을 발표하다/의대 설립 프로젝트 3–예상치 못한 결말/우간다에 남느냐 떠나느냐

나가는 말: 우간다에서 배운 철학: 낮아짐의 축복

저자

유덕종
1959년 경북 왜관 출생. 아프리카 의료 봉사자. 중고등학교 시절 허무주의에 빠져 방황하다 막연히 아프리카에서 봉사할 생각을 품었다. 1978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기독교인이 되면서 아프리카를 향한 마음이 확정되었다. 이후 동대학병원에서 내과 전문의 과정을 마쳤다.
1992년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의 1기 정부파견의사로 우간다에 파견되었다. 우간다의 국립후송병원인 물라고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며, 동부 아프리카 최고로 평가받는 마케레레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주로 에이즈 환자와 결핵 및 열대병 환자들을 진료했다. 열악한 의료 환경 때문에 큰딸이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을 계기로 우간다에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설립하려는 비전을 품게 되었다. 그 결과로 우간다 수도인 캄팔라에 베데스다 클리닉을 개설했다. 이 클리닉이 종합병원으로, 열대병 연구소로, 종국에는 의대로 발전하는 꿈을 꾸고 있다.
1999년 물라고 병원 ‘베스트 의사’로, 2014년 마케레레 의대 ‘올해의 교수’로 선정받았다. 마케레레 대학교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 마케레레 대학교 명예교수로 임명했다. 1999년 대한민국 수교훈장 숙정장, 2012년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국무총리상, 2015년 아산상 의료봉사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