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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김정준

9,000

발행일  2009.7.24
상세정보  양장 / 232page
ISBN 9788936507992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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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경건의 삶의 신학자 만수晩穗 김정준
국내 구약학의 스승으로 불리며 신학자ㆍ신학교육자ㆍ저술가로 왕성히 활동하면서도 고난 받는 목회자로서 외롭게 하나님의 공의를 외친 예언자 김정준 목사를 기억하는가?

만수晩穗 김정준은 1914년 경남 동래에서 태어나 숭실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도쿄 아오야마학원, 캐나다 임마누엘대학, 토론토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3년 5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경주 구정교회, 김천 황금동교회에서 목회했고, 이후 서울 성남교회에서 시무했다.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교수를 시작으로 연세대 교목,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원장과 한신대 학장을 역임했다.

구약학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교육행정가, 에큐메니컬 운동가, 기독교 연합기관 이사장, 편집위원장, 목회자로서 열정을 다해 살았다. 이러한 그의 경력을 보고 사람들은 화려한 삶을 살았다고 평하지만,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뿐이다. 가난한 살림에 학업을 이어갈 수 있을까 늘 고민이었지만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서른셋에 폐병에 걸려 마산 요양소에 입원하여 석 달 시한부 인생을 진단받았으나 1981년 67세까지 살았으니, 그의 고백대로 “다만 은총의 손길에 붙잡혀” 산 인생이었다.

그는 방대한 학문 활동과 함께 신학교 육성 및 토착적土着的 신학 수립, 신학적 교류를 통한 교단 간의 협력체 발전 등에 크게 기여하며, ‘학문과 경건의 조화’, ‘목회와 선교를 위한 교육’이라는 신학교육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헌신했다.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섬기고, 학생들에게 새벽기도회를 강조했으며, 경건 훈련에 도움이 될 만한 고전을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보수화되고 획일화되어 가는 한국 교회에서 이러한 그의 모습이 잊혀져 가는 것이 아쉬운 이때,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 원장 김재현)은 그의 삶과 신앙을 기릴 수 있는 글들을 모아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 일곱 번째 책으로 엮어 냈다.

1부는 김정준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었던 글들을 모았다. 그의 신학은 삶의 고통 속에서 재해석되어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의 삶을 다룬 내용을 앞부분에 배치한 것이다. 특히 “나의 생애와 신학”은 어린 시절부터 60세까지의 인생 고백이 담겨 있다. 2부는 폐병과 싸우는 데 가장 힘이 된 시편명상 중 일부를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그의 신학사상의 중심 텍스트는 ‘시편’이다. 그의 시편 연구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3부는 그의 목회를 엿볼 수 있는 설교 중에서 택하여 구성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부활 신앙, 크리스천의 사회의식 등을 엿볼 수 있다. 4부는 김정준 목사의 신학을 한국 사회에 토착화시킨 ‘민중신학’, ‘한恨의 신학’, ‘목민牧民신학’에 대한 논문을 중심으로 엮었다. 인간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동참하시어 함께 고난당하심으로 새 생명, 새 희망을 주신 것처럼 우리 또한 억울하고 비참한 고통의 현실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해야 함을 ‘한의 신학’을 통해 밝히고 있다.

학문적으로는 매우 엄격하였지만 사랑으로 제자를 가르쳤던 사람, 가는 곳마다 목회하며 새벽기도회를 강조했던 사람, 성경 말씀에 충실한 예언자적 설교를 하며 비복음적인 설교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격했던 사람, 단순히 지식인이 아니라 지知ㆍ정情ㆍ의意가 겸비된 학자이자 목회자, 시인이자 문필가로 살았던 사람 김정준. 경건과 신학이 점차 분리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늦은 이삭’ 김정준의 글이 신학과 신앙의 일치를 향한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무게 332 g
크기 138 × 190 mm

저자

김정준
1914년 11월 6일 경남 동래군 구포읍 금성리(현 부산시 금정구 금성동) 산성에서 출생.
1935년 3월 평양 숭실중학교 졸업.
1936년 2월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 1년 수료.
1937년 3월-1938년 3월부산 성빈학사에서 월간지 <성빈> 편집.
1939년 2월 서울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2년 수료.
1943년 3월 도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 본과 졸업.
일본 기독교단 교사보 시험(목사 자격 시험) 합격.
1943년 5월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동노회에서 목사 안수 받음.
1943년 5월-1945년 3월 경주 불국사 구정교회 시무.
1945년 4월-1945년 8월 경북 자인읍(현 대구) 자인교회 시무.
1945년 8월-1946년 6월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 시무.
1946년 폐병 진단받고 마산 요양소 입소.
1947년 6월-1948년 11월 경남 마산 가포리 국립요양소 교회 창립 및 목회.
1948년 11월 퇴원.
1949년 2월-1958년 8월 서울 성남교회 시무.
1949년 2월-1963년 4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 구약학 교수.
1953년 4월 캐나다 빅토리아 임마누엘대학교 신학사(B.D.).
1954년 5월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Th.M.).
1959년 5월-1959년 9월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연구.
1961년 7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교 신학박사(Ph.D.).
1963년 4월-1966년 7월 연세대학교 대학교회 시무.
1963년 4월-1970년 4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1968년-1980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위원.
1970년 5월-1979년 2월 한국신학대학 교수.
1971년 5월-1974년 1월 동북아시아신학대학협의회 회장.
1971년 8월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1980년 1월-1981년 2월 한국신학대학 명예교수.
1981년 2월 3일 6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한국고등신학연구원
KIATS(Korea Institute for Advanced Theological Studies, 한국고등신학연구원)는 세대를 잇는 기독교 인물 양성, 한국 기독교 유산의 집대성과 세계화, 동양과 서양 기독교의 상호이해와 소통,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범 교단적인 장을 마련하기 위해 2004년 설립된 단체로 ‘사람, 인프라, 네트워크를 강조한다.
‘하늘의 비밀을 훔쳐보고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을 발굴하여 세계적 시각으로 기독교 연구를 수행할 능력과 비전을 갖춘 인물을 키우고, ‘한국 기독교를 위한 연구의 장을 마련’하여 한국 기독교인들이 교회와 신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적절한 기반과 여건을 제공하며, ‘아시아 기독교와 서구 기독교의 파트너 관계를 형성’하여 상호이해와 공동번영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차례

머리말_주재용(한신대학교 전 총장)

1. 약함과 강함의 경건: 약하지만 강하다_ 삶에 이르는 병_ 나의 생애와 신학
2. 시편명상: 신에 목마른 인간_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_ 용궁에서 나온 자_
내가 산 이유_ 내 잔이 넘치옵니다
3. 삶을 향한 외침: 땅에 묻힌 하늘_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_ 돌들의 소리
4. 만수의 신학: 민중신학의 구약성서적 근거_ 한恨의 신학_ 목민牧民의 신학

김정준 목사 연표_ 김정준 목사 연구를 위한 참고문헌

책속에서

<약하지만 강하다>(27~28쪽) 강자와 약자의 차이는 소유에 있지 않고 그 마음과 정신에 달려 있습니다. 가난해도 부요富饒한 사람보다 강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노동자라도 그를 지배하는 자본주보다 강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무 권력도 없어서 짓밟히는 대중이라도 권력층의 사람보다 강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강자가 약자가 되고, 약자가 강자가 되어 있음을 봅니다. 역사상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 중에 약자이지만 강자로 살아가는 사람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란 분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약자였습니다. 유대의 종교적 권위가 그를 심문했고, 로마의 법이 그를 사형수로 처벌했으며, 당시 군중은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아우성쳤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까지도 그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이처럼 처참한 약자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죽음에 대하여 한 마디 반항도 못한 약자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예수를 약자로 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한 인간으로서 이처럼 역사상 우뚝 솟은 강자가 어디 있습니까? 약하지만 강한 자는 이러한 예수의 정신을 배워서 사는 사람입니다.

~ * ~ * ~

<삶에 이르는 병>(31~32쪽) 병은 결코 죽음으로만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올바로 깨달은 사람은 그 병에서 새 생명을 찾고 새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삶으로 이끄는 병이 있습니다. 투병 기간을 하나의 교육 과정으로 생각하면서 자기를 알고, 인생을 배우고, 또 종교를 알고 믿을 수 있는 마음자리가 선 사람에게 병은 절망이 아니라 새 삶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사람의 생명은 결코 사람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우리 인간이 보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이 귀한 생명을 잘못 보관할 때, 생명은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상처 난 생명을 치유하셔서 더 좋게 쓸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일생은 하나님께서 수리해 주시는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생명의 주인께 얼마나 감사를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삶으로 인도하는 병을 알 수 있습니다.

~ * ~ * ~

<신에 목마른 인간>(75~76쪽) 신에 대하여 목이 타도록 사모해 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이니 사모함이니 하는 개념의 일부만 알고 느낀 것에 불과합니다. 연애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알 수 있느냐 하지만, 신을 목이 타게 그리워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함이 이 시인의 항변입니다. 학문, 명예, 연인, 지위, 금력, 자유, 향락 등이 우리 인간의 사랑과 사모의 대상이기 전에 하나님이 사랑과 사모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읊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신에 목이 타는 ‘목마른 나무들’이라 외칩니다. 존재와 실존의 밑바닥이 온통 신을 사모하는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목마른 사슴처럼 신을 사모합니다.~ * ~ * ~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134쪽) 죽음은 종지부period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콤마comma와 같아서, 이 죽음이라는 콤마 다음에 우리 생의 가장 빛나고 영광스런 문장들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우리 인생의 페이지는 결코 마지막 페이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죽음의 페이지 다음에 사도 요한이 이미 계시받은 바와 같이 죽음도 애통도 슬픔도 없는 새 예루살렘, 새 하늘, 새 땅에서 사는 생활이 적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종결이 없는 영원을 우리에게 주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영원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나라의 모든 영광을 누리면서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 * ~ * ~

<한恨의 신학>(207~208쪽) 과학 지식 및 의학 지식의 보급과 인간 지식의 개발, 고급 종교의 영향으로 무당의 역할이 민족의 문화사 한구석으로 밀려가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억울한 죽음이나 고통을 당한 사람의 한을 풀어 주는 일은 이것을 미신이라고 여기는 크리스천들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만군의 하나님, 권능과 지혜의 하나님,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웃에 있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얼마나 너희들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는가? 오늘 이 역사 위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인간고에 지쳐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인간의 한을 풀어 주려는 생각을 얼마나 진지하게 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눅 18:3] 하고 애원하는 호소가 충천沖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순이요 역사의 불합리한 모습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비록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서 한의 문제를 극복했다고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한을 품은 인간 군상群像들이 가득 차 있음이 현실입니다. ……누가 이 한을 풀어 주겠습니까! 이것이 크리스천의 의무임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 크리스천들이 예수의 무당, 성령에 의한 액막이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왜 억울합니까? 누가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한 맺힐 일을 합니까? 사람들에게 한 맺힐 일을 하면서도 아니라고 하는 거짓은 왜 생기는 것입니까? 오늘의 정치가 얼마나 한 맺힐 일들을 합니까? 가진 자들은 얼마나 큰 욕심을 부리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하여 호소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