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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로교 총회 창립 100년사 1912-2012

22,500

저자 김수진

발행일 2012.9.21

상세정보 무선 / 520page / 170×235(mm) / 916g

ISBN 9788936509415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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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로교 100년의 역사와 그 의미

한국 교회사에서 큰 흐름을 주도해 오면서 영욕의 자취를 함께해 온 장로교, 이 장로교의 핵심 조직이자 최고의 치리 기관인 총회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을까?

이 책에서 저자는 1912년 9월 2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된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는 장로교 총회 100년의 발자취를 방대한 문헌과 사진 자료를 토대로 엮었으며, 한국 교회가 성장과 정체기를 거치며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의 과제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한국 교회는 국권을 빼앗기고 국호조차 바뀌어야 했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수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났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장로교 총회는 시대가 요구하는 당위의 과제에 온몸으로 대처하며 분투의 선봉에 서기도 했지만, 장기간 고난을 겪자 안정의 유혹 앞에서, 안정을 찾고는 부와 권력의 유혹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처럼 교회가 걸어온 길에서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일뿐 아니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도 소개하는 까닭은, 현재 당면한 문제에 대한 원인과 해답을 찾기 위해서다.

장로교 오늘의 모습, 그 연원과 해결책은?

장로교 총회 100년의 역사 가운데 저자는 특히 장로교의 분열 과정에 주목한다. 민족 교회는 자유주의, 이단과 사이비 종교, 공산주의로 인해 분열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거나 용서하지 않음이 내분의 씨앗이 되었다. 특히 대교단을 이룬 장로교는 고신, 합동, 통합, 개혁, 합동보수, 대신 등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는 양상으로 치달았다. 기독교 윤리학자 리처드 니버의 말처럼, 당시 상황이 어떠하든 교단의 분열과 교파주의는 ‘교회의 윤리적 패배’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질곡의 역사에도 굴하지 않은 우리 조상의 신앙은 한국 교회의 부흥을 일으켰지만,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타협한 연약함은 현재에도 교회를 약화시키고 있다. 한편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라고 회개하고 연약한 교회를 품었던 고 한경직 목사님과 같이, 회개한 지도자와 성도들이 곳곳에서 비가시적인 진정한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급성장기를 거치면서 한국 교회에는 하나 되기 위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교회 연합을 위한 운동은 물론, 남북한의 평화 통일을 위한 초석을 다지기 위해 힘쓰기도 했고, 세계 선교 사역에도 주력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교회는 내부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 상처로 곪아 있다. 결과적으로 신자의 감소는 물론 개신교 정체성의 위기가 대두되기까지, 본연의 모습을 잃고 표류하게 되었다. 저자는 한국 장로교회가 초창기의 신앙을 회복해 인맥, 지역, 이념을 넘어 ‘하나의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을 이 책에 담았다.

 

○ 우리 역사의 격변기와 함께한 한국 장로교 총회 100년, 그 현장을 증언해 주는 방대한 문헌과 사진 자료 수록.
○ 한국 교회에 영향을 준 굵직한 사건의 연표 소개.

저자

김수진

전남 신안 출생.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부(Th. B), 단국대 문학부(B. A),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대학원(Th. M), 미국 풀러신학교(D. Min), 코헨신학교(Th. D)에서 학위를 받았다. 1970년 초 일본 유학 시절, 일본 개신교회사, 중국 개신교회사와 한국 교회사에 관한 일본인 스승의 연구와 지적 수준에 자극받은 이후, 당시로서는 거의 미개척 상태에 있던 이 분야들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지금까지 기독교 교회사가(敎會史家)의 길을 걷고 있다.

한영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및 대학원, 평택대 대학원, 대전신대 대학원, 한세대 대학원, 중앙총신대학원에서 강의를 했으며, 한일교회역사연구회, 호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이자 KNCC남북평화통일위원, 예장(통합)역사연구회 예장총회 90년사 집필위원, 예장 총회(통합)교육자원부 총무, 황등교회 담임목사로도 활동했다. 

저서로《중국개신교회사》,《일본개신교회사》,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이상 홍성사), 《한일교회의 역사》, 《호남기독교100년사》, 《목포지방기독교100년사》, 《광주 초대사교회연구》, 《코리아의 선각자 서재필》, 《한국기독교선구자 이수정》, 《예수 오실 때까지》, 《광주제일교회100년사》 등 많은 개교회사 역사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

현재 개신대학원대학교 외래교수, 한국교회사연구원 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전문위원장, CCK기독교문화제 도록발간위원 본부장, 예장 역사학회 감사 등을 맡고 있다. 

차례

들어가는 말/ 한국 장로교의 하나됨을 위하여
1. 대한예수교 장로회총회의 출범 
2. 조선에 묻힌 선교사들 
3. 조선 교회의 저항과 민족운동 
4. 신사참배와 기독교 말살 
5. 일제의 패망과 교회의 재건 
6. 한국전쟁과 교회의 수난 
7. 장로교의 분열 
8. 민족과 함께하는 한국 교회 
9. 21세기를 향한 한국 교회 
나오는 말/ 새 시대를 위한 회개와 용서를 바라며
주/ 참고문헌/ 한국 기독교 연표

책속에서

◀1907년 6월 20일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최초로 7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리회에서 파송한 선교사 33명, 장로 38명이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獨老會)를 조직해 최초로 7명의 졸업생에게 목사고시 문답을 실시했다. 이들 모두 합격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독노회는 5년간 운영되었다. 그리고 1910년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후부터는 대한(大韓)이라는 국호 대신 조선(朝鮮)을 사용해야 했다. 이때부터 조선이라는 슬픈 단어가 총회에 등장하게 된다. 1911년 전라대리회가 전라 노회로 승격되면서 각 지역 대리회가 모두 노회로 승격되었다. 총 7개 노회가 형성되자 1912년 9월 2일 비로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13면)
◀평양 시내에서 전도를 하던 모펫 선교사는 어느 날 이기풍이라는 깡패가 던진 돌에 아래턱을 맞았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이후 1894년에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이기풍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원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곳 장터에서 매쿤(G. S. McCune, 윤산온) 선교사를 본 그는 갑자기 모펫 선교사의 인자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 길로 평양으로 달려가 모펫 선교사에게 사죄했다. 이후 그는 모펫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24면)

◀이날 강사로 나선 길선주 장로는 광야에서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던 세례 요한의 모습이었으며, 그가 전하는 말에 회중이 통회하는 모습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마가의 다락방 같았다. 첫날부터 뜨겁게 시작된 장대현교회 집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성령의 불길이 더욱 뜨겁게 임재했다. 모임이 거의 끝날 무렵, 블레어(W. N. Blair, 방위량) 선교사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말씀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이때 자신들의 사랑이 부족해서 신도와 신도 사이, 외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쌓였던 갈등이 일어났다는 블레어 선교사의 고백적인 설교를 들은 회중 사이에서 회개 기도가 일기 시작했다. (64면)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모이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향하던 중 군산 앞바다 근해에서 다른 배와 충돌하자 자신의 조사 조성규와 정신여학교 여학생이 보이지 않자 그들을 구하기 위해 배 밑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했다. 그가 늘 외치던 성경 구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말을 실천하다 하나님 곁으로 간 것이다. 배재학당 동창들이 양화진에 그의 추모비를 세웠다. (93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회 총회는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한 제27회 총회 결의인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므로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한다.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이행하고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향후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한다’는 결의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내린 결정이었으나, 이것이 하나님 앞에 계명을 범한 것임을 자각하고, 남부총회는 신사참배 회개운동을 결의하고 실행한다. 따라서 총회는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함을 전국 교회 앞에 성명한다. (283-284면,〈신사참배 취소 성명서〉)

◀한국 교회는 지난 100년 동안 길고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다. 잔인한 일제 강점기,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싸운 한국전쟁, 암울했던 군사 독재 등 혹독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오직 성령의 능력과 베풀어 주신 지혜로 이겨 낼 수 있었다. 자기 자신보다 이웃을 위해 산 선교사와 신앙의 선배 들을 통해, 우리 자신과 이 민족이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을 알고 그들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다. (47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