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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되는 진리

13,500

오지훈
2017. 7. 18
무선 / 444 Pages 
9788936512422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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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라르와 하루키가 폭로하는
‘범속한 대중의 전체주의’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욕망도 그가 말한 모방욕망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누구도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한편,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9~ )를 통해 우리도 ‘사유하지 않고 주어진 의무에 충실할 뿐인’ 범속한 대중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폭로하는 ‘범속한 대중의 전체주의’는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룬 많은 논의의 바탕을 이루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단순화된 논리 속에 희생되는 진리와 그 진리를 희생시키는 우리의 실체를 돌아보게 하고, 직면한 문제들을 직시하게 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자연과학 중심의 단순화된 논리구조와 그로부터 희생된 진리의 문제를 다룬다. 그런 논리를 전개한 대표적인 무신론자가 버트런드 러셀이다. 여기서는 그의 무신론의 철학적 기반을 짚어 보고, 러셀의 입장을 반박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괴델의 증명을 소개함으로써 그것이 지니는 신학적 의미를 이야기한다.

2부에서는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과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 보다 급진적이고 정의로우면서도 정통 복음을 옹호하는 지라르의 내러티브를 소개한다. 그리고 지라르의 논의를 확장시켜 니체를 비판하고, 하루키의 소설 《1Q84》와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을 분석하여 그 기독교적 의미를 찾아본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교회를 향한 비판적인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오해와 적대감에 기초한 비난, 엇나간 ‘희생양 근심’에 의해 희생되는 진리의 문제를 다루면서 기독교를 옹호하는 작업도 병행한다. 동시에 복음주의와 진보의 교집합과 둘 사이에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에 대하여 바람직한 기독교적 입장을 제안한다.

무게 600 g
크기 153 × 224 mm

저자

오지훈

복음주의 신앙인이자 지라르와 하루키 덕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인문학에 키치적 취향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주로 학창시절을 보냈고, 인문대학의 콜로키움에 자주 드나들었다. 우연히 집어든 르네 지라르의 책을 읽으며 전율하던 환희의 감정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공기업에 취직하여 직장 생활을 했지만 차츰 ’생각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서른일곱에 결국 퇴사했다. 그리고 도서관에 1년간 틀어박혀 읽고 싶은 책만 읽었다. 이 책은 그 독서의 결과다. 단순한 지적 변증보다 기독교 외부의 사유와 언어, 그리고 덕후의 촉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재발견하는 데 관심이 많다.

차례

책을 내면서

1부. 버트런드 러셀의 무신론과 그 적들, 비트겐슈타인과 괴델

프롤로그
버트런드 러셀의 연약한 무신론
러셀을 압도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신앙과 삶
괴델의 불완전성정리와 그 신학적 함의

2부. 르네 지라르, 문화인류학으로 십자가 복음을 변증하다

프롤로그
르네 지라르­희생양 이론과 십자가 복음
지라르의 니체 읽기,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면서 능가하려 한다
지라르의 관점으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그리고 기독교 
[보론] 지라르에 비춰 본 영화 〈곡성〉, 한국 교회를 비추는 일그러진 거울상

3부. 복음주의와 진보의 접점을 찾아서

프롤로그
하용조와 김규항의 교차 읽기: 복음주의와 좌파의 교집합, 진정성과 정체성을 중심으로
복음주의와 진보, 조화 이면의 긴장: 동성애를 중심으로
복음화 이후의 복음주의: 비정치적 경건주의를 넘어서

맺음말/ 주/ 참고문헌

책속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완전한 시스템을 만들 수 없으며, 그 시스템은 오히려 또 다른 폭력을 잉태할 수밖에 없다. 산술의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을 입증하려면 형식체계 외부의 근거가 필요하듯이, 인간 시스템의 완전성은 그 시스템 내재적으로는 보장할 수 없다. 인간이 선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자연법 원리, 더 나아가 신, 절대자에 토대를 두는 도덕이 필수불가결하다. 이로써 괴델은 수리논리학에서 러셀의 논리주의를 반박하고, 자신의 증명이 지닌 철학적인 의미로 러셀의 무신론과 도덕에 관한 견해를 반박한다.
_‘불완전성정리의 사회학과 신학, 하루키와 괴델’에서(1부, 112쪽) 

지라르에 의하면 오늘날 사탄, 즉 적그리스도(Anti-Christ)는 그리스도의 가면을 쓰고 그리스도를 흉내 낸다. 그리하여 지라르는 오늘날의 사회를 “기독교를 모방하며 기독교를 적대하는 희화화된 초(超)기독교사회”라고 말한다. 결국 안팎의 공격에 처하는 마지막 희생양은 이제 희생양을 박해하고 있다고 비난받는 ‘기독교’가 되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사회는 기독교적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화적이다. … 지라르는 신화를 분석하면서 군중의 인지불능을 언급했다. 희생양 메커니즘이 알려지고, 희생양에 대한 근심이 절대적인 가치가 된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은 희생양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희생양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_ ‘이 시대의 마지막 희생양, 기독교’에서(2부, 201쪽)

하루키는 개개인의 사랑이 진정으로 숭고하고 진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랑에 모델이 필요한데, 그것을 기독교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은 신의 은총에 의해 맺어진다. 그리고 그 사랑은 ‘리틀피플’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는 힘이다. 그 사랑은 군중의 폭력으로부터 한 사람을 지켜 내는 소중한 용기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이다. 
이렇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토리는 르네 지라르의 논지와 연결되고, 복음의 핵심에 가까이 가게 된다. 지라르에 따르면 박해받을 수밖에 없는 소수를 보호하는 힘은 결국 ‘성령’에 의해 감동된 제자들에 의해 가능했다. 그렇게 볼 때, 하루키의 텍스트에서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은 성령에 감동된 사랑이 아닐까? _ ‘그런데 왜 하필 신인가’에서(2부, 251쪽)

우리는 내용과 상황 전개에 함몰되어 현혹되지 말고 〈곡성〉을 다시 한 번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즉, 영화의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중략) 
“외지인이 정말로 악마였을까?”라고 의심하고 반문하며 그가 무고한 희생양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면 이 영화를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렇게 수용할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사안을 명확하게 판단하지 않고 소문만으로, 어떤 사람들의 의견의 대세를 모방하면서 그 모방의 소용돌이에 가담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우리도 본능적인 모방욕망에 의해 그러한 소용돌이와 광기에 휩싸일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아이러니하지만 악마로 부활한 외지인이 실은 악마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그런 역설적인 수용이 기독교적인 수용인 것이다.
_ ‘열린 결말에서 우리가 선택할 기독교적인 해석과 수용은?’에서(2부, 275-276쪽)

동성애적 성향은 선천적인 사람도, 후천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선천적이면 죄가 아닌가? 선천적이라면 그것은 면책되는가? 또한 동성애적 성향 자체가 죄인가? 아니면 그 성향대로 동성애적 성행위를 하는 것이 죄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동성애적 성향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20세기의 영성가 헨리 나우엔(Henri J. M. Nouwen, 1932~1996)처럼 동성애적 성향이 있지만 그것을 절제하면서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에 대한 일정한 성향이 있고, 그것을 절제하며 산다. 성향 자체를 죄악시할 수는 없다. 그 성향을 절제하지 않고 외부로 여과 없이 표출하여 행위로 나타내는 것, 그것에 대해서만 논해야 한다. _‘동성애, 논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에서(3부, 3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