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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7,500

마르틴 융 (Martin H. Jung)
이미선 (역)
2013. 12. 9
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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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15년 앞선 《신학총론》의 저자, 필리프 멜란히톤!

국내 첫 소개되는 그의 전기!

1. 루터의 신학을 루터에게 돌려준 인물

150센티미터의 키에, 목소리는 가늘고, 약간의 언어장애까지 있었던 사람. 그러나 훗날에는 ‘독일의 교사’, ‘유럽의 교사’로 불린 사람, 필리프 멜란히톤. 그는 체계화의 대가요 가톨릭이 탐낸 종교개혁가였으며 언어의 천재였다. 중세 말이던 1497년, 독일의 소도시 브레텐에서 태어난 멜란히톤은 스무 살에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가 되어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다가 1560년에 사망한다.

루터와 달리 신학을 체계화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인 그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1536)보다 15년 앞서 《신학총론》(1521)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종교개혁 신학을 체계화한 저술로 18세기까지 교과서로 사용되었으며,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 유럽 곳곳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루터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친 멜란히톤은 히브리어 실력도 루터를 능가하였기에 성경 번역 작업에 적극 참여했다. ‘루터 성경’은 실질적으로 ‘루터‒멜란히톤 성경’인 것이다.

멜란히톤의 삶과 그의 시대, 주변 인물과의 관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는 국내에 소개되는 멜란히톤의 첫 전기로서, 루터와 칼뱅을 넘어서서 종교개혁 시기를 들여다봄으로 종교개혁의 양상과 그 결과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입문서다. 상세한 옮긴이 주와 원서에 없는 여러 컷의 도판이 내용 이해를 돕는다.

2. 개혁적이면서 중세적인, 투쟁과 모순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는 멜란히톤이 남긴 수많은 저작물과 편지를 바탕으로 그의 공적 삶은 물론 사적인 삶까지 보여 주면서 화해주의자 멜란히톤의 모순된 면을 그려 내고 있다. 멜란히톤은 성찬식, 유아세례, 자유의지, 성자숭배 등 종교개혁 당시 제기된 첨예한 문제에 대해 인문주의자와 가톨릭, 재세례파 사이에서 자신만의 논리를 만들어 간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빵 안에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가톨릭의 ‘화체설’과 성찬은 상징적 의식이라는 츠빙글리의 ‘기념설’에 대해 그리스도가 ‘빵 안에’가 아니라 ‘빵과 함께’ 계신다는 ‘활동적 현존’의 논리를 만들었으며, 유아세례를 철저히 거부한 재세례파와 달리 성서적 근거를 토대로 유아세례를 인정하는, 어찌 보면 가톨릭에 가까운 주장을 한 인물이다.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벌인 자유의지 논쟁에서 멜란히톤은 루터의 입장을 차츰 벗어나 에라스무스에게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열한 살에 학업을 위해 부모를 떠나 열두 살 무렵 아버지를 여읜 멜란히톤은 24세 무렵 결혼을 했다. 그는 결혼을 그리 원하지 않았으나 젊은이들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또 육신의 약함 때문에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멜란히톤에게 결혼식은 “슬픔의 날”이었고 그는 “이제껏 이렇게 힘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라고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어린 여자와 결혼하는 당시 풍습과 달리 동년배와 결혼한 그는 쪼들리는 신혼 생활을 보낸다. 또한 딸의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에 훗날 크나큰 괴로움을 겪으며 인생의 위기를 맞기도 한다.

유대인에게 양가적(兩價的) 감정이 있었고, 이슬람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전쟁으로 맞서라고 주장하기도 한 그는 점성학을 기독교적 학문으로 생각하여 심취하였으며, 꿈 해몽을 즐겨 자신이 죽을 날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종교개혁가인 동시에 철저히 중세적이었던 멜란히톤의 모습에서 인생의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

마르틴 융

1956년생. 튀빙겐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종교개혁 신학을 공부했고, ‘경건주의 시대 뷔르템베르크 교회와 유대인’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튀빙겐 시 네렌 지역에서 2년간 목회를 한 후 튀빙겐 대학으로 돌아와 1996년에 교수가 되었다. 교수 자격 논문의 주제는 ‘필리프 멜란히톤의 경건과 신학—종교개혁가의 삶과 가르침에 드러난 기도’이다. 2002년부터는 오스나브뤼크 대학에서 역사신학,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역자

이미선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에서 독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존넨알레》(유로), 《별을 향해 가는 개》, 《불의 비밀》(이상 아침이슬), 《막스 플랑크 평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여행의 기술》(이상 김영사), 《불순종의 아이들》, 《천사가 너무해》(이상 솔), 《수레바퀴 아래서》, 《유대인의 너도밤나무》(이상 부북스),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홍성사) 등이 있다.

감수

박준철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유럽 종교개혁사를 전공하였으며 ‘필리프 멜란히톤의 비텐베르크 대학 커리큘럼 개편’에 대하여 박사논문을 썼다. 문화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서양의 인문주의 전통》(공저,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양 중세사 강의》(공저, 느티나무) 등의 저서가 있다.

 

차례

“멜란히톤? 그게 뭐죠?” 7 / 아버지의 이른 죽음 9 / 인문주의자들을 사사하다 14 / ‘나는 그에게서 복음을 배웠다’ 19 / 새것이 아니라 처음 것 23 / 체계화의 대가 30 / 마지못해 한 결혼 36 / 946굴덴짜리 집을 하사받다 41 / 작센의 종교개혁 43 / ‘독일의 교사’ 49 / 수녀원장 피르크하이머 56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63 / 세속정부에 복종하라? 71 / 개신교 교황을 제안하다 78 / 황제가 주선한 종교회담 82 / 쾰른, 오스나브뤼크 89 / 가톨릭이 탐낸 종교개혁자 94 / 멜란히톤과 칼뱅 99 / 카메라리우스, 900통의 편지 105 / 빵 안에? 빵과 함께! 108 / 왜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가 116 / 자유의지는 있는가 124 / 성자를 존경하라, 하지만 128 / ‘나는 삶과 작별했으면 한다’ 136 / 친구의 아내에게 헌정한 《신학총론》 145 / 루터의 죽음 148 / 전쟁과 망명 151 / 살아남은 비텐베르크 대학 156 /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협약과 ‘라이프치히 잠정협약’ 160 / 아디아포라 논쟁 165 / 공의회로 가는 길 168 /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 174 / 의견 일치 신조 180 / 유대인, 형제인가 적인가 184 / 하나님의 채찍, 투르크인 188 / 점성학은 학문이다 196 / ‘나를 늙을 때 버리지 마시며’ 202 / 독일의 교사, 유럽의 교사 210 / 현대인과 멜란히톤 215 / 멜란히톤 깊이 읽기 222

연표 226 / 주 229

책속에서

브레텐 출신의 이 사람은 루터와 함께 손꼽히는 종교개혁가였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촉발했지만 멜란히톤이 그 꼴을 갖췄다. 멜란히톤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개신교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16세기 문헌이 언급하는 빈도로 보자면 상위권에 속한다. 그의 삶은 생애별로 자료가 있다. 저작물은 거의 다 남아 있고, 포괄적으로 서술된 전기도 있다. 또 그가 썼던 수많은 편지도 보존되었기에 그의 내면도 부분적으로 공개되어 있다. 이렇게 보자면 멜란히톤은 루터보다 많은 문서를 남겼다. 따라서 신앙과 인격의 발전 과정을 연구해 볼 만한 대상이다.
멜란히톤은 교육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쳐 1590년대에 ‘독일의 스승’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지금은 ‘유럽의 스승’이라 불려 마땅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멜란히톤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곳곳에 영향을 끼쳤고, 각 나라의 교회사와 교육사에 깊이 관여했다고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 영향력은 아이슬란드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보헤미아, 포메라니아, 폴란드까지 미쳤다. 멜란히톤은 자기 집 식탁에서 한때 11개 언어가 오갔다며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종교개혁가였고 종파 간 화해를 도모한 화해주의자였으며 교회 통합주의자였다. 그렇기에 21세기에도 그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이미 16세기에 미래 교회를 구현하지 않았던가?

_9~10쪽, “멜란히톤? 그게 뭐죠?”

***

멜란히톤의 기본 교육 개념은 달변Eloquentia, 읽기Lectio, 모방Imitatio, 연설Declamatio이었다. 그중 제일은 달변이었다. 언어와 사실, 문법적 관점과 현실 인식은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데, 명료하게 표현해 내는 능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해는 제대로 된 이해가 아니었다. 이해와 말하기는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달변의 길은 읽기로 이어진다. 고전을 읽음으로써 언어와 그 내용을 동시에 배울 수 있다. 성서 읽기도 물론 중요하며 매일의 과제이다. 읽기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고전 작가의 모방, 특히 키케로의 모방이다. 이렇게 공부하면 자신만의 라틴어 연설문을 작성하고 말하는 능력을 갖춘다. 1524년 멜란히톤은 비텐베르크 대학에 하나의 관례를 만들었다. 즉 연설을 학업에 도입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대학 교육 방식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된다.

_53~54쪽, “독일의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