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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임락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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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락경
2018.12.6
978893651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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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느냐가 건강을 결정하고,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이정배 교수(감신대 통합학문연구소 소장) 추천


임락경 목사, 그가 만난 한국 교회사의 인물들
2010년 11월부터 2014년 7월까지 월간 〈복음과상황〉에 ‘한국 신학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이 소개되었다. 《임락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는 이 연재 원고를 토대로 하여 내용을 보완하고 다듬어 묶은 것이다. 학교 안 가고, 병원 안 가고, 농약 안 쓰고 살아온 농사꾼인 저자가 만난, 혹은 간접적으로 들은 한국 교회사의 인물들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보는 저자는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인 까닭에 일찍이 제도권 내에서는 스승을 만나지 못해 스승을 찾아 나섰다. 무엇보다 동광원의 이현필(1913~1964) 선생을 뵙고자 하여 1961년 여름, 광주로 가서는 무등산으로 이현필 선생을 찾아 올라간다. 그러나 매일같이 피를 토하는 이현필을 직접 만날 수 없어 당시 82세 된 노인 목사님과 한 방에 기거하게 되는데, 그분이 애양원을 세운 최흥종(1880~1966) 목사였다. 비록 이현필과 최흥종 목사를 몇 년 모시지 못했지만 그들의 신앙하는 태도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그 철저함을 본받게 된다.
1972년에는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 다석 유영모(1890~1981) 선생을 직접 뵙는다. 다석은 김교신, 함석헌, 이현필 등이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던 인물로 1일 1식을 행하고, 널빤지 위에 늘 무릎을 꿇고 앉으며, 노망이 들어서도 실수하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수신(修身)하며 산 인물이다. 기독교는 물론, 불교와 노장, 공맹 사상을 두루 꿰었던 유영모는 한국이 내세울 대철학자로 주목받고 있다.

학교 가지 말자, 고기 먹지 말자, 약 쓰지 말자
저자는 이 땅에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세종(1883?~1942), 이현필이다. 이세종은 전남 화순에서 3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지게 목발이 닳도록 열심히 일을 하여 머슴살이에서 벗어나 부를 모으게 된다. 마흔 살쯤 되어 예수를 믿게 된 그는 남의 물건을 훔친 것, 남의 논밭을 빼앗은 것을 서너 배로 갚고는 늘 거지꼴로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 구제에 힘을 쓴다. 이름을 ‘李公’이 아닌 ‘李空’으로 고쳐 불리었던 그는 철저한 자기 비움으로 예수를 전하며 산다. 신사참배를 피해 화학산 등성이 각씨바위 밑에 움막을 짓고 산 이세종은 성경 하나만 보면서도 앞일을 꿰뚫어 보았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한다.
이현필은 이세종의 제자였다. 청년 시절에 이세종을 따라다닌 이현필은 이세종의 사상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구현한 인물이다. 머리가 명석하고, 곤충까지 살생하지 않으려 한 이현필은 전쟁고아를 거두고자 동광원을 시작하였고, 이현필의 지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함께하고자 들어온다. 이현필이 자주 했던 말이 ‘학교 가지 말자’, ‘고기 먹지 말자’, ‘약 쓰지 말자’ 등이었다.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을 말이었으나 지금 돌아보면 교육 정책 잘못되었다고 대안학교가 줄줄이 생기고, 고기를 많이 먹어 병이 생기며, 병원 안 가도 고쳐질 병을 약을 먹어 더 키우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의 말이 시대를 앞선 예언이었다 하겠다. 이현필은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아, 기쁘다, 기뻐. 내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교인을 양성하는 선교사, 예수 잘 믿는 선교사
저자는 자신이 소개하고픈 인물들에 앞서 어렸을 적 자신의 고향에 왔던 선교사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한다. 마을 사람 절반이 먹을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받아먹고, 당시 귀했던 사과를 찾아 식후에 설탕을 쳐서 먹으며, 동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실내 버너에 불을 붙이고 프라이팬에 돼지고기를 세 점 깔아 기름을 내고, 그 기름에 빵을 구워 먹고, 계란 한 개를 익혀 이것저것 음식들과 함께 먹었던 선교사의 모습. 저자는 예수 잘 믿으면 이처럼 배불리 먹고살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꼬집는다. 저자는 이런 선교사를 기독교인을 많이 양성한 선교사라고 이름을 붙인다.
이에 반해 예수를 잘 믿었던 선교사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서서평(1880~1934), 유하례(1893~1995), 고허번(1920~2003) 선교사 등이다. 서서평은 1880년에 독일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가 되어 1912년,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간 한국을 선교지로 택하여 온다. 서서평은 주로 광주제중병원(현 기독병원)에서 민중 구제사업에 몸을 바쳤다. 당시 불치병이었던 나병(한센병)환자를 돌보았고, 걸인들을 보면 집에 데려와 밥 먹이고 옷을 주어 평생 두 벌 옷을 지니지 못하고 살았다 한다. 또한 여성을 위해 학교를 세워 교육을 받게 하고 간호협회와 부인조력회(여전도회)를 조직하여 일제에 저항하고 우리 민족과 아픔을 같이하였다. 저자는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한 일들을 복음전파, 병원·학교·사회사업으로 분류한다. 저자가 꼬집는 부분은 호화로운 생활을 해가며 전하는 변질된 복음, 돈 버는 곳이 된 병원, 건물이 커지고 등록금이 올라가는 학교, 세우면 커지고 원장이 부자가 되는 고아원, 양로원 등이다. 그러나 서서평 선교사는 이웃 사랑을 일회적으로 실천했을 뿐 사회사업을 하지 않아 그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저자

임락경

1945년 순창에서 태어났다. 유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동광원에 들어가 결핵환자들과 15년을 지냈다. 1980년부터 강원도 화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장애인 ‘안장애인’이 섞여 사는 집 시골교회(집)에서 유기농 콩을 심어 된장과 간장을 만들고, 직접 꿀벌을 친다. 돌파리突破理, 즉 ‘이치를 돌파한 사람’이라 말하는 그는 정농회 회장, 북한강유기농업운동연합 초대회장, 화천군 친환경농업인연합회 초대 회장, 상지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또 감리회제2연수부에서 ‘임락경의 건강교실’을 10년째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시골집 이야기》(홍성사), 《돌파리 잔소리》, 《촌놈 임락경의 그 시절, 그 노래, 그 사연》(이상 삼인), 《먹기 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들녘), 《흥부처럼 먹어라 그래야 병 안 난다》(농민신문사) 등이 있다.

차례

머리글 •6

1 무엇을 먹느냐, 누구를 만나느냐 •11
2 기독교인을 많이 양성한 선교사 •22
3 예수 믿는 선교사들 •34
4 예수 잘 믿는 선교사들 •43
5 크나큰 스승 유영모 1 • 52
6 크나큰 스승 유영모 2 • 67
7 크나큰 스승 유영모 3 • 81
8 크나큰 스승 유영모 4 • 99
9 이세종 1—예수 잘 믿는 이 •119
10 이세종 2—안빈낙도安貧樂道 •133
11 이세종 3—이세종에게 배운 제자들 •150
12 삼일목공소와 나의 살던 고향 •165
13 정환 예수, 영진 예수 •174
14 두 권의 출판기념회 •193
15 나의 옛 스승 이현필 •207
16 서재선과 김광석 •222
17 동광원東光園 •232
18 김금남과 유하례 선교사 •249
19 서울 어머니와 이현필 •263
20 오방 최흥종 1 • 279
21 오방 최흥종 2 • 297
22 나를 타락시킨 백춘성 장로 •312
23 김현봉 목사 1 • 325
24 김현봉 목사 2 • 336
25 박석순 목사 •345
26 강원용姜元龍 목사 •359
27 디아코니아 자매회 여성숙 선생 •370
28 이거두리 •381
29 구정물 할아버지 •438

추천글 •448

책속에서

자기를 위해 살면 즐겁다. 자기 가족을 위해 살면 더욱 즐겁다. 먹는 것 즐겁고, 자는 것 즐겁고, 노는 것 즐겁다. 이성 관계 더욱 즐겁다. 즐거움은 오래가면 병이 난다. 맛있는 것 많이 먹으면 병난다. 오래 자도 병난다. 노는 것도 지나치면 병난다. 이성 관계 오래 가면 한평생 고치기 힘든 병 얻는다. 자기나 자기 가족 외에 다른 이들을 위해 살면 기쁨이 있다 한다. 기쁨은 오래 가도 병이 나지를 않는다. 있던 병도 고쳐진다. 나는 기쁘게 살다 가신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분들을 보고 자랐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련다.
십자가를 의지하고 살면 축복된 삶이다. 행복한 삶이다. 기도만 해도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법관, 정치인, 대통령도 되었다. 명예와 부도 따른다. 즐거운 삶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 굶주리고, 헐벗고, 집도 없이 가난하다. 핍박도 받고 옥살이도 하고 죽기도 한다. 이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평생 섬기다 간다. 기쁘게 사는 이들이다.
십자가에 의지하고 살아가신 이들은 명예가 있어 널리 알려져 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들은 이름 없이 사셨기에 널리 알려지지 않아 좀 늦었지만 꼭 알리고 싶은 분들이다. 물론 먼저 알리신 분들이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내가 만나고 겪은 일들은 빠졌다. 또 같은 모습을 보고도 느낌이 다르다. 내가 직접 만나 본 분들이 있으나 시대적으로 만나 뵙지 못하고 전해 들어서 알게 된 분들도 있다. 내가 열 살 때 찾아다녔던 최흥종 목사, 다석 유영모 선생, 이현필 선생 같은 분들을 직접 뵌 사람들 중에 나와 내 친구들이 제일 어렸고 또 마지막일 것이다.

_6~7쪽, ‘머리글’

*

지식 있다는 성인 지성인들 이야기 좀 해보자. 후진국 문화는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나라 지성인들은 주로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에서 학문을 닦고 와서 그들의 음식 습관을 익히고 또 도입해 왔다. 우리나라 음식의 3분의 1은 서양 음식을 따라갔다. 그들은 육류를 많이 먹은 만큼 과일을 많이 먹어 왔다. 그들은 채소는 많이 먹지 않는다. 미국은 비가 잘 안 와서 채소가 안 되고, 비가 안 오니 과일이 잘되고 맛이 좋다. 또 농약을 많이 안 써도 잘된다. 유럽은 비가 많이 와서 채소가 안 되고 과일 역시 맛이 없다. 비가 많고 습기가 많으니 풀이 잘된다. 풀이 많으니 젖소, 젖양이 많고 또 고기가 많다. 유럽 음식은 거의가 우유로 만든 것이고 요리법 역시 그러하다. 우유, 치즈, 버터가 전부이고 닭도 가축에 낀다. 닭 ‘유酉’자 또는 젖 ‘유乳’자 우유 ‘럽’이다. 소젖 먹고 양젖 먹고 계란 먹고 사는 민족들이다. 그들의 식성을 받아들이니 그 음식 먹고 생겨난 병도 있을 것이고 거기서 난 병의 치료법은 그곳의 의술마저 받아들여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음식뿐 아니라 생활 습관까지 받아들여진다.

_14~15쪽, ‘무엇을 먹느냐, 누구를 만나느냐’

*

먹는 이야기보다 싸는 이야기도 해보자. 후진국 사람들은 똥을 아무 데나 싼다. 그래도 크게 냄새 나지 않고 잘 산다. 젖먹이 아이가 싼 똥은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밥을 먹으면서부터는 똥에서 냄새가 난다. 채소 반찬에 먹으면 냄새가 고약하지 않고, 고기 먹고 싼 똥이 냄새가 고약하다. 방귀 냄새도 그렇다. 무슨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다 뀐 방귀냐에 따라서 냄새가 고약하기도 하고 그런 대로 맡을 만하다. 여기서 문제를 내보련다. 부처님과 공자님이 방귀를 뀐다면 어느 분의 방귀 냄새가 더 고약할 것인가. 소는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나 싼다. 말도 마찬가지다. 염소, 토끼 등 모든 초식동물은 똥을 가리지 않는다. 그 동물들은 똥 냄새가 고약하지 않으니 아무 곳에나 가리지 않고 싼다. 요즘 육우 목장에 냄새가 많이 나는 것은 배합 사료를 많이 먹여서 그렇다. 돼지나 개는 똥을 한곳에 눈다. 가릴 줄 안다. 고양이는 똥을 누고서 꼭 덮는다. 그들은 주로 육식을 하기에 냄새가 고약하니 가리기도 하고 덮기도 한다.
사람 역시 채식을 많이 하고 과일만 먹고 사는 열대 지방 사람들은 변소에 신경 쓰지 않는다. 유럽이나 서양인들은 고기를 많이 먹기에 똥 냄새가 고약하다. 똥을 싸고 나서 물로 씻어 내야 한다. 채소나 과일 먹고 똥 싼 사람들은 밑씻개 없이도 대충대충 살아왔다. 유럽이나 서양인들은 똥 누고 나서 휴지로 그것도 두루마리로 닦아도 시원치 않아서 결국은 물로 씻어 내야 직성이 풀린다. 들판에나 숲 속에나 초원에서 아무 데서나 오줌똥 누어 식물이 잘 자라도록 용변 처리하는 사람들이 미개인인지 아니면 오줌똥을 방 옆에서 싸고 물로 씻어 내고 그 물에 소독약 타고 표백제 사용한 화장지 사용해서 그것도 모자라 비데 찾으며 물로 씻어 내는 이들이 미개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싸느냐 하는 생활 방식에 따라 그 사람 건강이 결정되고 그 시대, 그 사회, 그 문화가 결정된다.

_15~16쪽, ‘무엇을 먹느냐, 누구를 만나느냐’

*

어릴 적부터 한국에 예수 같은 분이 어디 계실까 하는 생각에 찾아 나선 곳이 동광원이었고 그 당시 훌륭하신 분이 이현필 선생이었다. 그러나 그분보다는 이세종 선생이 어른이셨으나 그분은 나와 시대가 맞지 않았다. 내가 세상에 나기 전에 예수처럼 살다가 돌아가셨다. ‘거울’이라는 공책을 읽고 또 읽어 언젠가는 세상에 소개하려 했으나 나보다 한 세대 앞서 사신 엄두섭 목사님이 30여 년 전에 이미 소개하셨다. 그분은 호남에서 이세종 선생님과 같은 시대에 사셨으나 만나 보지는 못하셨다. 뒤늦게 자료를 정리하여 소개하신 것이다. 그전에는 이세종 선생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최근에 교계의 관심이 모이고 있고 이분의 신앙과 생애에 관한 연구 논문을 쓰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내가 바라본 이세종 선생을 소개하려 한다. ……
이공은 신사참배도 피할 겸 화학산 등성이 각씨바위 바로 밑에 움막 집을 짓고 사셨다. 그곳에서 구도 생활을 하시다가 마나님과 네 제자들이 지켜보는 데서 임종을 맞았다. 임종 사나흘 전에 제자들을 시켜 나뭇가지를 베어 오게 하시고 자기 발로 재어 엮었다. 그 위에 눕고 “나 죽거든 옷 갈아입히지 말고 꼭 이대로 묻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천벌 받습니다” 하였다.
임종 전 울음을 참던 부인이 울음을 터뜨리니 죽어 가던 분이 벌떡 일어나서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 따라가는데 울어야 되겠소. 내가 가고 싶어 가는 것이오. 명命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오” 하고서 숨을 거두었다.
이세종이 별세한 때는 8·15 3년 전인 1942년 음력 2월이었다. 마흔 살에 신앙생활 시작해서 예순셋에 별세하셨다. 제자들이 10전씩 거두어 50전으로 근처 매장지를 사고 새 옷을 준비했으나 유언대로 누더기를 입으셨다. 근처에서 괭이를 빌려다가 조촐한 장례를 치렀다. 임종 후 유산이라고는 가마니 한 장도 없고 십자가 고상도 없고 사진 한 장도 없었다.

_121쪽, ‘이세종 1―예수 잘 믿는 이’ / 148~149쪽, ‘이세종 2―안빈낙도安貧樂道’

*

어느덧 이 땅의 교회 강단이 우리들 전통을 잊고 서구적 인물과 사건만을 예화로 선포하고 있으나 이 책은 한국적 심성 속에 뿌리내린 신앙이 얼마나 견고하고 철저하며 삶 지향적인 것인지를 무언으로 항변하고 있다. …… 짧은 기독교 역사 속에 이렇듯 자신의 삶을 불사른 기독교 스승들이 있었다는 현실이 너무도 감격스럽다. 그간 이름도 빛도 없이 존재감을 잃은 채 존재했었으나 이 책을 통해 그들의 혼을 다시 불러내어 오늘을 사는 우리 속에 작동케 하는 것이 이들을 기리는 방식이 될 것이다.
예수를 닮고자 했고 그와 같은 삶을 살아냈던 신앙의 스승들이 이처럼 많이 있건만 도대체 오늘의 교회, 기독교는 왜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지도 긴 호흡으로 되물을 일이다. …… 이들 초기 기독교 스승들은 예수에 전념하면서도 결코 좁은 울타리를 치지 않았다. 이는 교리가 아니라 삶으로 신앙을 드러냈기에 가능했다. 이를 일컬어 현대 신학은 수행적 진리라 하는 바, 우리는 앞선 시대에 서양의 미래를 살아냈던 것이다.

_448~462쪽, 이정배 교수의 ‘추천글’

서평

우리가 찾아 기억해야 할 신앙의 스승들

《임락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 서두에 쓰여 있듯이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나는가’일 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몸을 위한 것이고 후자는 정신적 삶의 영향사를 일컫는 것이라 하겠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달라지고 그 쓰임새가 크게 변화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 왔으나 촌놈 목사의 경우 이런 모습이 너무도 확연하다. 우선 그의 작은 체구 속에 이렇듯 많은 분들의 삶과 사상, 신앙적 유산이 녹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것을 기억해 내어 남들 자는 이른 새벽, 고된 몸을 이끌고 오늘과 같은 큰 책을 만들어 주었으니 이 또한 경이롭다. 그의 일상이 노동의 연속이며 이곳저곳 발길 옮겨야 할 때가 적지 않았을 터인데 긴 시간 공들여 자신을 들여다보고 신앙의 어른들을 찾아냈으니 그의 수고가 고맙고 그 공로를 크게 치하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가치는 예수를 만나 달라진 한국인의 신앙 양식을 여실히 살핀 데 있다. 어느덧 이 땅의 교회 강단이 우리들 전통을 잊고 서구적 인물과 사건만을 예화로 선포하고 있으나 이 책은 한국적 심성 속에 뿌리내린 신앙이 얼마나 견고하고 철저하며 삶 지향적인 것인지를 무언으로 항변하고 있다.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 원리가 중세의 면죄부보다 더 타락했다는 말이 회자되는 현실에서 믿음과 삶을 하나로 엮어 낸 이들 신앙 스승들이 한국 교회에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이들의 삶을 한국 교회에 알려 이 땅의 교회를 달리 만들고 싶은 것이 각고의 노력을 다한 저자의 마음이리라. 물론 소개된 인물 중 유영모, 이현필과 같이 이미 유명해진 분들도 없지 않다. 글을 남기고 좋은 제자들을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럿 인물들은 이들을 심비心碑에 새긴 임락경의 증언이 없었더라면 땅에 묻힌 보화로 머물렀을 존재들이다. 하늘이 이렇듯 많은 스승들을 만나 다층적인 삶을 살게 했던 까닭에 ‘우리 신학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니 촌놈 목사 역시 예사로운 존재는 아닐 듯싶다.

(중략)

이제 《임락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가 주는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짧게 정리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의 출판으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이며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탓이다. 우선 앞서 언급했듯 본 책은 그간 한국사 및 한국 교회사 교과서에 충실히 소개되지 않은 살아 있는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지대하다. 이름도 빛도 없이 산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역사를 회복시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둘째로 한 사람의 인격이 형성됨에 있어 이렇듯 많은 신앙의 스승들이 필요했음을 우리는 경이롭게 지켜보아야 한다. 다양한 사상이 어우러져 새로운 세계가 창발되는 모습이 임락경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드러난 것을 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진보와 보수를 아울러 새 인격을 드러내는 신비한 역사 앞에 머리를 조아릴 일이다. 셋째로 한국 기독교가 초창기 역사에 민족과 함께했고 항시 민중 곁에 가까이 있었음을 재차 환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오늘처럼 교회 생활에 충실한 것과 크게 달랐음을 기억할 일이다. 넷째로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예수 곧 예수 믿기는 성서와 동시성을 사는 일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空’으로 바꾸었다면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내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긴 것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참으로 예수의 제자들이었다. 그들로 인해 오늘의 교회가 존재하건만 오히려 우리는 지금 제자 됨을 잊고 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지 못하는 교회는 예수를 한갓 신화나 이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란 지적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로 이들 초기 기독교 스승들은 예수에 전념하면서도 결코 좁은 울타리를 치지 않았다. 이는 교리가 아니라 삶으로 신앙을 드러냈기에 가능했다. 이를 일컬어 현대 신학은 수행적 진리라 하는 바, 우리는 앞선 시대에 서양의 미래를 살아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들 속에서 한국적 기독교, 토착화된 기독교의 전형을 생각할 수 있다. 서양의 기독교와 다른 한국 기독교의 포용성, 실천성 그리고 공동체성에 대한 각별한 이해와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예컨대 동광원의 존재는 우리에게 신학적 연구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설립 역사, 그곳의 정신세계, 공동체적 삶, 종교 간 포용성 등은 한국 고유의 기독교성을 알리는 지표가 될 것이다.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지난한 삶을 기쁘게 살아오신 임락경 목사님의 칠순을 축하드리며 그분으로 인해 한국적 영성가들, 위대한 신학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심비에 각인된 스승들의 흔적을 척박한 한국 교회에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해 주길 바란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다시 프로테스탄트’의 기치가 이들 신앙 선배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길 바라며 글을 맺는다.

이정배(감신대 통합학문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