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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 데니스와 이모

9,900 11,000

발행일  2002.3.29
상세정보  양장 / 166page
ISBN  9788936506230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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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지체 장애인 데니스가
재불 화가 이모와 함께 그린 그림 이야기.

미국에서 나고 자란 교포 2세 데니스는 현재 25세의 청년으로, 생후 1년 4개월에 앓게 된 뇌막염의 후유증으로 인해 인지능력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멈추어 버렸습니다. 오직 반복을 통한 학습만이 가능한 그가 21세가 되던 해, 재불 작가로 활동하던 이모의 파리 초청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경험케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기’였습니다. ‘그리기’를 통해 비로소 데니스는 이모와,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스케치 한 것이 제법 숙련되어 가던 중 이모는 그의 그림에 프레임을 맞추어 지인(知人)들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리하여 값없이 버려질 스케치가 새로운 가치를 입어 인정받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에 이모의 지인인 홍성사 식구들이 그들의 작업을 세상에 전시함으로써 데니스와 그의 가족을 대표하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그리고 이모를 대표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에게 도전적인 삶의 모양을 전하고자 전시회를 기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울러 그림을 통한 그들―이모와 데니스―의 지난한 ‘소통’의 과정을 꾸밈없이 메모해 온 이모의 이야기를 그림과 더불어 책 <with-데니스와 이모=””>로 엮어 내게 되었습니다.
데니스와 이모가 함께한 작업은, 경험을 기억하는 일과 경험을 마커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캔버스에 아크릴로 옮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데니스가 기억하거나 유추해 내지 못하는 형상들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모사를 했습니다. 이런 작업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당연히 유치하거나 건조한 결과물로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니, ‘그들’의 그림에는 순수하고 창조적인 생명의 숨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데니스와 그의 그림에는, ‘사유함’의 유희도, ‘살아감’의 고통도 방해할 수 없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정신 지체 장애인 데니스와 크리스천 예술가 이모의 만남은,
사람의 만남이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로 승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두 분이 함께 만든 작품들은 사랑과 생명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재철 목사/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with-데니스와>

저자

심현지
재불 작가. 유리 조형미술 전공. 대한 성공회 대성전과 소성전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수의 작품이 있음. 데니스의 인자한 이모이자 엄한 그림 선생.

저자 인터뷰

[이사람 이야기]

정신 지체 재미교포 화가 데니스 한 

데니스 한(Dennis han)은 스물다섯살, 싱그러운 청년입니다. 콧잔등에 붉은 여드름이 오종종 돋아있어 앳돼보이는 이 청년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언제나 빨간 야구모자에 빨간 운동화를 즐겨 신지요. 실제로 데니는 스물다섯살이 아닌, 다섯살의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돼 뇌막염이란 병을 앓았는데, 그후로 몸은 쑥쑥 컸지만 생각은 아주 더디게 자라는 중입니다. 그렇다고 데니에게 세상이 무섭거나 불편한 존재는 아닙니다. 네살 때 종아리를 물어뜯어 놓은 강아지를 빼고 청년 데니가 두려워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허공을 향해 혼자 중얼거리길 좋아하고,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장난치는 걸 좋아합니다. 잘하는 것도 많습니다. 앞치마 두르고 설거지하기, 핑크색 고무장갑 끼고 물청소하기…, 그리고 바느질도 잘합니다.

최근에 데니에겐 좋아하면서도 잘하는 것 한가지가 더 생겼습니다. 바로 그림 그리기입니다. 데니의 엄마보다 아홉살 많은 큰이모는 프랑스 파리에서 유리조각으로 그림을 만드는 아티스트인데, 미국에서 태어나 한번도 캘리포니아를 떠난 적이 없는 데니를 4년 전 파리로 데려와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장애인 직업학교에서 배운 ‘똑같은 단추 골라내기’처럼 단순한 작업보다는 이게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마커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림 그리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침에 눈을 떠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이모는 저녁이면 반드시 그날 하루에 일어난 일들 가운데 즐거웠던 기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합니다. 

한데 이모의 잔소리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데니, 사슴들이 모두 한쪽만 바라보고 있잖아”, “네 눈엔 회전목마를 타던 아이들이 죄다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있든?”, “이모 기억엔 비가 온 날은 하늘이 어둡고 캄캄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는 데니를 도와줍니다. 마커를 쥔 손의 힘을 빼고 이모가 힘을 주는 대로 그냥 따라갑니다.

물론 그리기 싫은 날도 있습니다. 그런 날 데니는 청개구리가 되어 이모의 신경을 건드립니다. 스케치를 시키면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놓고, 붓을 깨끗이 빨아오라고 하면 붓을 바닥에 대고 짓이깁니다. 등짝을 한대 얻어맞으면 “이모 싫어!” 하고 눈을 부릅뜨지요. 그러면 이모는 못이기는 척 팔레트를 접고 일어나 데니와 산보를 나섭니다. 저녁 찬거리를 위해 함께 시장도 보고 야외카페에서 아이스크림도 사줍니다.

그렇게 날마다 그림일기를 쓰다보니 데니의 솜씨가 제법 늘었습니다. 처음엔 집이든 사람이든 모두 납작하게만 그리더니, 이제는 옆이나 뒷모습을 그릴 줄도 알고, 크고 작게 구분할 줄도 압니다. 이모의 잔소리도 조금씩 칭찬으로 바뀌었습니다. ‘디너 파티’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고는 손뼉을 치며 웃었습니다. 전날 샘 우드라는 사진작가의 누드작품을 보고 온 때문인지 디너파티에 온 아이들을 모두 발가벗은 모습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고추’도 아주 예쁘게 그렸는데, 아직 성(性)을 구별할 줄 모르는 ‘다섯살 어린이’라 여자친구들에게도 모두 고추를 달아주었습니다.

‘쎄느강물 위로 떨어진 에펠탑’은 이모가 가장 좋아하는 데니의 그림입니다. 출렁이는 푸른 강물에 비친 붉은 빛덩이 에펠탑! 똑바로 서있지 않고 고꾸라질듯 옆으로 넘어가는 중인 그 에펠탑을 이모는 눈물을 글썽이며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의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파리에 왔다가 데니의 그림을 본 한국의 한 출판사 대표가 데니와 이모에게 전시를 제안한 것입니다. 이모는 “이런 그림을 어떻게…” 하면서 사양했지만 그쪽의 간청도 끈질겼던 모양입니다.

마침내 지난 1일 서울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전시가 열렸습니다. 고맙게도, 양복에 온통 아이스크림을 묻혀서 애를 먹고 있는 청년작가 데니의 그림을 보기 위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데니의 어머니도 바다를 건너 날아왔습니다.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해온 그는 이웃집 여인들이 유독 부러워하는 크고 빛나는 두 눈에 늘 슬픔을 담고 살았습니다. 데니 때문입니다. 한국에 들어와서야 아들의 그림과 마주친 그는 화난 사람처럼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눈물을 감추느라 그랬던 것이지요. 이모가 말했습니다.

“나는 데니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었을 뿐이지만, 데니는 내게 때묻지 않은 영혼의 존재를 보여줬다. 내 욕심, 내 영광에만 사로잡혀 앞만 보고 달려온 나에게 데니는 사랑과 인내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었지. 이렇게 늘그막에 말이야.”

그렇다고 이모의 잔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관람객들 앞에서 손톱을 물어뜯다가 팔뚝을 꼬집히기도 하고, 밥먹을 때 씹는 것을 잊고 그냥 삼켰다가 “꼭꼭 씹어라, 데니!” 하는 이모의 으름장을 듣습니다. 그래도 데니는 행복합니다. 자기가 그린 그림 앞에서 사람들이 마냥 웃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인까지 받고 돌아가는 사람들 뒤통수에 대고 데니가 힘차게 인사를 합니다. “안녀어~가셔요!” 청년 데니의 한 손에 이제 막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습니다. 

-글/김윤덕기자(경향신문, 2002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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