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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의 십자가 Ⅰ

6,750 7,500

발행일 1994.4.20
상세정보 296page

품절

걸프 전쟁을 배경으로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암투, 사라진 점토판에 적힌 수메르 문자의 비밀, 등장 인물들의 실종에 실종을 거듭하는 무서운 사건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가나안 후예들의 정체는……?

[줄거리]
리진물산 이라크 지점에 있는 한기영은 걸프전이 장기화되자 이라크의 정보조직인 무카바라트의 알리로부터 원기선 박사, 루이제 기자, 북한 공작원 김인철을 데리고 요르단으로 탈출하도록 요청받는다. 한기영은 수메르 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을 우연히 샀다가 분실하는데, 원기선과 루이제로부터 그 점토판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서 사건에 휘말린다. 원기선, 원중권, 루이제, 민규식 박사 등과의 복잡한 혈연 관계를 알게 된 한기영은 점토판을 찾기 위해서 이들과 협력하고, 아버지인 원중권으로부터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정(情)을 느끼게 된다. 점토판의 기록이 가르키는 보물이 창세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세계를 장악하려는 비밀 조직들과의 싸움 속에서 한기영은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비록 보물은 폭파되지만, 한기영은 돌아가신 아버지 원중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

저자

김성일
1940년 생으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현대문학>지에 소설로 등단, 1983년 한국일보에 《땅끝에서 오다》를 연재한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끊임없이 개척해 나가고 있다. 1985년에 제2회 기독교문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세대 겸임교수이며 이태원감리교회(장로)를 섬기고 있다.

[주요 저작]

○소설
대하 역사소설 동방 | 전5권 | A5신 | 각권 310면 내외
땅끝에서 오다 | 믿음의 글들 22 | A5신 | 360면
땅끝으로 가다 | 믿음의 글들 30 | A5신 | 360면
제국과 천국 | 전2권 | 믿음의 글들 44·45 | A5신 | 각권 236면
뒷골목의 전도사 | 믿음의 글들 64 | A5신 | 236면
홍수 이후 | 전4권 | 믿음의 글들 76-79 | A5신 | 각권 288-312면
땅끝의 시계탑 | 전2권 | 믿음의 글들 88·89 | A5신 | 각권 328면
다가오는 소리 | 믿음의 글들 96 | A5신 | 348면
땅끝의 십자가 | 전2권 | 믿음의 글들 121·122 | A5신 | 각권 296면
공중의 학은 알고 있다 | 전2권 | 믿음의 글들 133·134 | A5신 | 각권 412·332면
빛으로 땅끝까지 | 전2권 | 믿음의 글들 145·146 | A5신 | 각권 308·324면
아브라함 | 전2권 | 믿음의 글들 163·164 | A5신 | 각권 312·328면

○간증집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 믿음의 글들 70 | A5신 | 248면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 믿음의 글들 125 | A5신 | 280면

차례

네 모든 빈자리에 / 평화의 이름으로 / 검은 꽃잎이 흔들릴 때 / 맨발로 돌아가다 / 위험한 항로 / 혼돈의 바다에서 / 안녕하세요 슬픔이여 / 죽은 자들의 골짜기 / 돌아오는 니므롯 / 붉은 새를 찾아서 / 신전에서 달이 떠오를 때 / 카리오카의 휴일 속으로 / 밤에 날으는 나비들 / 땅끝의 십자가

쓰고 나서

책속에서

“그러니까……한국의 통일은 곧 인류 역사의 마감을 예고하시는 하나님의 신호탄이 될는지도 모른다……그런 말씀이로군요.” “뿐만이 아니야. 두 개의 막대기가 하나로 된다면 그것은 뭔가? 그건 곧 십자가를 말하는 거야. 한국에 통일의 십자가가 서는 날……세계가 하나로 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지.” -본문 중에서

서평

[독자의 글]
“이스마엘은 버림받은 자인가?”

이스마엘은 과연 버림받은 자인가?
버림을 받았다면 누구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말인가?
하나님에게서? 아니면 사람들에게서?
그래서 성경말씀을 다시금 뒤져보았다.
먼저 이스마엘의 신분은 무엇인가?

당시 이방인이라고 천대를 당하던 애굽여인 하갈의 아들, 그리고 종의 신분(창 16:3). 그러나 이렇게 천한 자리에 있던 이스마엘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 위에 함께 계셨다. 사람의 학대를 피하여 광야로 도망나간 하갈 앞에 나타난 이는 여호와의 사자요 친히 그에게 이르시기를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한다고 가르쳐 주시며(창 16:10), 또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으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창 16:11) 그래서 하갈은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누가 이들을 버렸는가?

먼저 사라의 행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하기를 먼저 원한 것은 사라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하갈이 자식을 가지게 되자(물론 하갈이 자신의 잉태함을 알고 자신의 여주인을 멸시한 것도 잘못이지만, 창16:4) 아브라함을 욕하고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 잘잘못을 판단하기를 원한다고 말한 사라(창16:5). 그리고는 하갈을 학대하여 광야로 쫓아낸 사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웃기만 하던 사라.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한다고 하여 내어쫓으라고 아브라함에게 말하던 사라(창 21:9-10).

그뿐인가? 아브라함의 행동은 어떠하였던가?
자신의 종과 동침하여 자식을 가지라고 사라가 말할 때도 하나님께 한마디 물음도 없이 하갈과 동침하고 만 아브라함. 하갈의 임신으로 인하여 사라가 질투하자 하나님께 기도하기는커녕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고 하며 사라에게 책임을 미루고 또 하갈을 감싸지 못했던 아브라함.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하나님께로부터 택함 받았다는 사라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부인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철저하게 믿지 못하고 자기 부인 사라의 말을 들었던 아브라함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점이 또 한 가지 있다.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버림을 당한 이스마엘과 하갈의 그 후의 행동인 것이다. 비록 사람들은 너희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희와 함께 하겠노라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이들.

사막에서 죽게 된 하갈과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다시금 살아나는 은혜를 여러번 체험했건만, 왜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이스마엘이 불택자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이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기에는 여덟 차례 이상에 걸쳐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나타나서 위로와, 권면과, 사랑과,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건대, 쉽사리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오히려 창세기 21:20-21 말씀에 있는 것처럼, 이스마엘 쪽에 무언가의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는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장성함에 따라 세상길, 곧 그 어미의 말을 따라 애굽땅 여인을 취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스마엘은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아니하고 함께 계셨건만, 그 또한 하나님을 저버리고 나아가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던가?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하셨다. 그렇지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굳게 믿으시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셨던가? 자, 우리는 이제부터 어떤 길을 택해서 나아갈 것인가…….

-글/정현수(쿰회원, 쿰회보 94.06)

추가정보

[저자의 글]
“또 한번 ‘땅끝’에 서서”
-<땅끝의 십자가>를 상기하며

한국일보에 《땅끝에서 오다》를 연재한 것도 어느새 10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때 보이지 않는 라이벌 이세원 부장을 찾아서 세계의 구석구석을 헤매던 임준호 대리는 어느새 고참 부장이 되었고 동경지사의 현지사원으로 《땅끝으로 가다》에서 활약한 요꼬야마 겐지로는 인도네시아의 선교사가 되었다.

인사부의 신입사원이었던 윤종혁은 기획조정실의 과장으로 뉴욕에 출장 나갔다가 한 살인사건에 연루되면서 소련과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는데 그는 마침내 인류 역사의 종말을 가리키는 열두 시의 겹쳐진 바늘을 바라보며 ‘땅끝의 시계탑’앞에 서 있었다.

이미 ‘타임아웃’의 사인이 내걸려졌던 그 사건을 끝으로 나는 이제 그만 ‘땅끝’에 관한 소설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직도 모든 것을 끝내실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또 하나의 땅끝인 브라질을 여행하면서 번개같이 떠올랐던 생각…….

하나님께서 아직 모든 것을 끝내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너무나 닮아 있는 한국 백성이야말로 바로 하나님께 마지막 시대의 사명을 받은 선택된 백성으로 생각하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며 일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브라질에 가서 본 것은 바로 버림받은 백성들의 모습이었다.

브라질은 그대로 인종의 쓰레기통이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에도 불구하고 남아메리카는 선진국의 온갖 인종들이 들어가서 멋대로 배설해 놓은 혼혈의 나라였다.

그렇다. 창세기의 대로부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또 한쪽에는 버려진 백성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택함을 받았을 때 버려진 룻의 후손들이 있었고 이삭이 택함을 입었을 때 버려진 하갈의 아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지구 위에는 소위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민족들과 버림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민족들이 나뉘어져 살아왔다. 이제 혼돈의 시대가 되어서 지구촌은 서로 뒤섞이고 있지만 아직도 택함 받은 사람들의 자만(自慢)과 버림받은 사람들의 자학(自虐)은 계속되고 있다.
바로 이곳에 하나님의 하실 일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아무도 버린 적이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뿐이다. 그러나 떠나간 그들 모두를 버린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의미하다.
따지고 보면 한국 백성들을 비롯해서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자들도 모두 사실은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들이었다.

이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비로소 에스겔 37장 17절에 나오는 두 개의 막대기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그것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고 남한과 북한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더구나 아니었다. 택함 받은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의 ‘하나됨’이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땅끝의 십자가’는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버림받았던 우리의 형제들이 모두 돌아와서 하나가 되는 날에 그 아픔의 십자가는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글/김성일(쿰회보 9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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