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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버포스

21,600

윤영휘
2025.1.10.
양장 | 444면 | 124*190mm
978-89-365-0395-6 (0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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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벌거벗은 세계사〉 윤영휘 교수 신작!

19세기 영국 노예무역 폐지 운동이
21세기 한국 정치·사회에 던지는 질문

정치가의 사명은 무엇인가

1787년 5월 22일 12명의 신사들이 런던에 모여 역사상 처음 노예무역 폐지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노예들의 권리를 위해 법정에서 싸웠던 그렌빌 샤프, 클락슨 같은 국교도 복음주의자가 주요 멤버였던 이 위원회가 설립된 후, 영국에서는 반노예제 감정이 빠르게 대중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이 가장 먼저 논의한 일은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의회로 가져가 과업을 이뤄 낼 인물을 찾는 것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인물은 28세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였다.
노예무역의 시작은 위원회 설립보다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62년 존 호킨스(1532-1595)라는 해적이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스페인 선박을 약탈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항해를 떠났고, 몇 달 간의 항해 끝에 도달한 곳은 아프리카 서해안의 시에라리온이었다. 호킨스가 선택한 교역품은 300여 명의 흑인 노예였고, 이들을 태운 호킨스는 1563년 생도맹그(지금의 아이티)에 도달하여 백인 농장주들에게 노예를 판매한 돈으로 설탕, 진주, 모피 등을 구매하며 이 거래로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호킨스의 항해 이후 영국인들이 노예무역에 가담했고, 약 1세기 동안 노예는 상아, 금, 향신료, 인디고 등과 더불어 아프리카 해안의 여러 교역 품목 중 하나로 거래되다가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가 새롭게 재배되면서 가장 큰 비중의 교역품이 되었다. 당시 흑인노예들이 겪은 참상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을 태운 노예선은 바다 위를 떠다니는 무덤과도 같았다. 되도록 많은 노예를 실어 이익을 높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중간 항로에서 숨지는 노예들을 감안하여 과적을 하여 실었다. 좁은 선실은 질병이 쉽게 확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온종일 노예들을 묶어 놓았고, 화장실은 존재하지 않아 누운 채로 생리 현상을 해결해야 했으며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였다. 노예들을 통제하기 위해 온갖 속박 도구들을 활용한 폭력이 가해졌다.

지옥 같은 노예선의 상황을 견디지 못해 일부 노예들은 음식을 거부하고 죽기를 택했지만, 선원들은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가 의회에서 폭로한 증거들에 따르면 선원들은 음식을 거부한 노예의 입을 강제로 벌리려 했고, 안 되면 이를 부러뜨리고 음식을 부었으며, ‘스페큘럼 오리스’(억지로 음식을 입에 넣는 기구)를 이용해서 강제로 입을 벌리고 음식을 쑤셔 넣었다. 노예선은 그야말로 떠다니는 무덤이었고 어느 정도의 비율로 사람이 죽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거리였다. (…) 어떤 계산을 따르더라도 최소 200만 명 이상의 생명이 대서양 한가운데서 사라졌다. _1장. 서막: 노예무역의 그림자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한 사람의 입법기관’이
수십 년간 대중과 국회의 지지를 얻기까지 싸운 끈질긴 인내의 기록

윌버포스는 어린 시절 삼촌 부부에게 맡겨지며 그들의 신앙을 따라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 등 감리교의 영향을 받았다. 대학에 진학하며 잠시 신앙의 궤도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하원의원으로 지내며 스승이던 아이작 밀너와의 여행 중에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그의 윤리적 신념은 노예무역 폐지 운동이라는 정치적 사명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수십 년에 걸쳐 ‘한 사람의 입법기관’으로서 소명을 다하기까지 ‘클래팜’이라는 공동체를 통한 연대가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일평생 좌절을 거듭하고 오해와 비방들을 견뎌야 했지만, 국가의 명예를 지키고 인간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그의 소명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1807년 (처음 노예무역 폐지위원회가 설립되고 20년 후) 법안이 통과되어 노예무역은 영제국 전역에서 폐지되었다. 다시 26년 후 1833년에는 윌버포스가 죽은 뒤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 운동이 21세기 한국 정치‧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이 책의 서브 제목(Statesman, 정치가의 길)이 그 방향을 내포하고 있다. 윌버포스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몇몇 악습 개혁 폐지를 넘어 영국 사회 시스템의 질적 성숙을 목표로 개혁을 시도했다. 그가 주도한 반노예제 운동은 사회 전반에 걸친 영국인의 가치관의 변화를 형성하여 경제적 이익을 상당 부분 포기하면서도 노예 해방을 위한 국가적 결단을 이끌어 내었다. 이에 저자 윤영휘 교수는 윌버포스를 가리켜 ‘조용한 혁명’을 수행한 정치인이라 표현한다. 윤영휘 교수는 오래전 클래팜파의 관습 개혁을 다루는 연구를 서울대학교에서 시작한 이래 윌버포스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 특히 최근 윌버포스가 젊은 시절 보냈던 케임브리지 대학에 객원 펠로우로 초빙을 받아 1년의 연구년을 보내며 윌버포스를 추적한 흔적들을 이 책에 담았다.

책속에서

당시 영국인 대다수는 종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1년 후, 이 배를 소유한 그렉슨 회사가 죽은 노예들에 대한 보험금을 청구하면서 종호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보험회사는 선주들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에 그렉슨 회사가 보험금 강제 집행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783년 3월에 있었던 1심은 선주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학살된 노예 1인당 30파운드로 환산하여 보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보험회사는 재심을 요청했고 5월 21일과 22일에 재심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이 왕좌재판소에서 시작되었다.
보험회사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종호에서 일어난 참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선 보험회사의 설득으로 증인으로 나선 종호의 1등 항해사 제임스 켈살은 병든 노예들을 바다로 던졌다는 기존의 주장을 부정하며 좀더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였다. 11월 29일 아침 380명 정도의 노예가 살아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건강했고 전염병에 감염된 사실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보험회사 변호인들은 종호에서 학살이 3차례에 나눠 일어났는데 마지막 36명을 죽인 학살은 1781년 12월 1일 이 지역에 강한 비가 와서 식수를 충분히 확보한 이후에 일어났다는 것을 밝혀 내었다. 선원들은 보험금을 타내려 의도적인 집단학살을 저질렀던 것이다. _41-42쪽(1. 서막: 노예무역의 그림자)

종교관이 변한 것을 말한 후 그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도 바뀌었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디에서 기독교인만의 특징이 드러날까요? 그것은 성경에 나오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일까요?”라고 물은 윌버포스는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가 말해 주듯 바로 사회적 약자들이며 자신의 삶에 이들을 위한 몫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이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해명할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면서 이들을 돕는 것이 자신의 새로운 정치적 목적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_106-107쪽(3. 마음을 돌리다)

이런 대중적 지지를 배경으로 윌버포스는 1792년 4월 2일 하원에서 다시 한번 노예무역 폐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버크는 이를 “하원에서 행해진 최고의 연설”이었다고 평가했다. 윌버포스는 이 연설에서 자신의 목표를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어 제시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는 노예무역 폐지 지지와 노예해방 주장을 구별했다. 그는 현 상황에서 흑인 노예는 자유를 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노예해방은 먼 미래에 논의될 주제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노예무역 폐지는 현 상황에서 국가에 이익이 되므로 추진해야 했다. 다른 식민지에서 생도맹그 반란 같은 사건이 일어날까 봐 노예무역 폐지를 반대하는 이들이 일부 있지만, 이는 원인을 잘못 짚은 것이었다. 사실 반란의 위험성은 노예 수입으로 흑인 인구가 늘어서 증가한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기 쉽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상태를 개선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생도맹그 반란은 오히려 노예무역 폐지의 필요성을 보이는 증거였다.
그는 다른 목적이 아닌 “이 불쌍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권리 회복”이 자신이 마음에 품은 뜻이며 “이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_286-287쪽(10. 프랑스 혁명의 격랑 속으로)

윌버포스가 죽은 지 열흘 후인 1833년 8월 7일 노예제 폐지법은 하원을 최종 통과했고 8월 20일에는 상원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8월 28일 국왕의 승인을 받아 영제국에서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 효과는 1년 뒤인 1834년 8월 1일부터 나타날 것이었다. 이는 서구 열강이 노예제를 스스로 영구 폐지한 최초의 사례로, 이 법으로 19개 영국 식민지에서 77만 7천여 명의 노예가 해방되었다.
즉각적이고 완전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통과시킨 1807년과 달리 1833년 노예제 폐지법의 결과는 여러 한계가 있었다. 노예들은 이전의 농장에서 임금을 받으며 일을 배우는 견습 기간을 7년간 보내야 했고, 서인도제도 농장주들은 상당한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당대에도 이 법안을 ‘절반의 성공’, ‘미완의 과제’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윌버포스를 포함한 반노예제 협회 지도부는 이런 대가를 치르더라도 노예들에게 해방의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 현 상태로 방치하는 것보다 낫다고 보았다. 이 법안의 통과 후 노예들이 실제로 자유를 얻고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도전과 여정이 필요했지만, 그것은 법으로 결정된 노예해방을 실제의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_425쪽(15. 사슬을 끊다: 노예제도의 폐지)

차례

프롤로그

1. 서막: 노예무역의 그림자 1562-1759
2. 헐에서 웨스트민스터까지 1759-1784
3. 마음을 돌리다 1784-1786
4. 정치를 하는 이유 1787-1789
5. 험난한 시작 1789-1792
6. 영국 기독교의 현실과 이상 1787-1797
7. 국왕의 포고문 1787-19세기 초
8. 클래팜 공동체: 변화를 위한 연대 1797-1808
9. 클래팜의 유산 1797-19세기 초
10. 프랑스 혁명의 격랑 속으로 1792-1794
11. 인내의 시간 1794-1799
12. 승리를 향해 1800-1807
13. 윌버포스 신드롬 1807-1812
14. 대서양을 자유롭게 하다 1812-19세기 중반
15. 사슬을 끊다: 노예제도의 폐지 1818-1833


주요 참고문헌

저자

윤영휘
연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워릭 대학교 사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사학과 전임강사,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클레어 홀 종신회원이며,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8세기 대서양 복음주의 네트워크에 관련된 연구로 미국교회사학회(American Society of Church History)에서 수여하는 시드니 미드 상(Sidney E. Mead Prize, 2012)을, 존 웨슬리의 반노예제 관련 기록에 관한 연구로 제7회 역사학회 우수논문상(2018)을 수상하였다.
영국의 기독교 정치, 노예무역, 도덕자본, 군사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주제로 〈Church History〉, 〈역사학보〉, 〈서양사론〉, 〈영국연구〉 등 국내외 학술 저널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혁명의 시대와 그리스도교》(홍성사), 《역사학의 역사》(아카넷, 공저), 《시나리오 한반도》(쌤앤파커스, 공저), 《벌거벗은 세계사》(경제편, 인물편, 전쟁편, 권력자편)(교보문고, 공저) 등을 썼고, 《세계사I》, 《세계사II》(까치), 《국가와 기억》(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