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말세에 사람들이 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자기중심적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돈을 더 사랑하는가? 바르게 사는 데는 관심이 없고, 더 잘살고 더 잘 먹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거룩해야 될 아버지 집인데, 왜 거기 그 거룩한 하나님의 집을 대제사장들과 결탁한 장사꾼들이 시장터로,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었는가?
그들이 못 먹고살아서 그랬겠습니까? 아닙니다. 더 잘 먹고 더 잘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왜 교회다움을 상실했습니까? 왜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를 쓰든 더 잘 먹고 더 잘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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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성자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성자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서 더 잘 먹고 더 잘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셨다면 틀림없이 로마 황제로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죄의 노예 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갈릴리에서 고생의 밥과 물을 감수하셨습니다. 끝내는 죄에 빠진 인간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생의 밥과 물을 마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생의 밥과 물까지 감수하신 그 예수님을 죽음의 한가운데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어 이 세상에서 더 잘 먹고 잘살겠다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의 영원한 길, 거룩한 길, 구별된 길을 좇기 위해서 고생의 밥과 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것을 결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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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정치권력이든 종교권력이든 항상 우리로 하여금 야합할 것을 강요합니다. 만약 미가야가 그때 야합했다면, 그는 더 잘 먹고 더 잘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통로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야합한 사람은 400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통성은 야합한 400명이 아니라 고생의 밥과 물을 먹을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했던 미가야 한 사람을 통해 이어져 나갔습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해 그 시대가 새로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