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를 통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만나 대화를 시작하다!
새로운 역사를 향한 나눔과 평화의 이야기들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 《한국 교회 처음 여성들》로 순수했던 초기 교회의 ‘처음 사랑’을 말했던 이덕주 교수가 이번에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을 펴냈다. 한국 교회사를 가르치는 저자가, 더구나 사회주의자도 아닌 그가 어떠한 연유로 이런 제목의 책을 펴내게 되었을까?저자는 세 번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면서 통일과 통일 이후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절감하고, 교계와 신학계에서 무언가 해야겠다는 의무감으로 ‘통일 이후 한반도 신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하기 위해 먼저 성서를 사회주의적인 관점에서 읽어 보려는 시도를 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출애굽기의 만나 이야기, 레위기의 안식년․희년 사상, 예수님의 천국 비유 등에 균등 분배를 실현하려는 사회주의적 이상이 담겨 있음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통일 이후 새로운 시대 우리의 성서 읽기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게 한다.
오늘날 안팎으로 비판에 처해 있는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경쟁과 지배’의 자본주의 논리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의 기독교 사회주의의 원리임을, 이전과는 ‘다른’ 관점의 성서 해석과 우리 옛 선조들의 문화를 통해 역설한다.
1. 왜 기독교 사회주의를 말해야 하는가? – 하나 될 한반도를 위해 낯설지만 꺼내야 하는 이야기
70년 가까이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된 이 나라에 교회는 책임이 없을까? 화평케 해야 할 교회가 분단의 현실 앞에, 그리고 분열된 한반도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저자의 물음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한반도가 이렇게 분단 상황이 된 것에는 교회의 책임도 있다. 화해와 평화를 추구해야 할 한국 교회 지도자들 중 많은 수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좌우 이데올로기 갈등 상황에서 편향적인 ‘보수 우익’ 입장을 취하면서 분단을 고착화하는 데 일조한 것이다. 이 뼈아픈 반성을 통해 앞으로 교회는 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저자는 그 해답을 찾는 중 기독교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사실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차치하고 그 용어부터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다. 그것은 한국 교회사에서 그동안 기독교 사회주의가 어떤 위치였는지를 짐작게 한다. 1920-30년대에 등장한 사회주의에 대해 기독교계는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삼거나, 적그리스도 세력으로 인식하고 비판하거나,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 협력을 모색하거나, 이 세 가지 방법으로 대응했다. 이 중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 협력을 모색했던 부류는 소수이기에 한국 교회사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의 역사는 단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또 미국식 자본주의 신학 교육과 사회주의를 적대시하는 분단 상황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 사회주의는 개인의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보수 신학에 맞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학으로서 역사적 맥을 이어왔다.
세 차례 평양을 다녀온 저자는 분단된 한반도에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 제3의 이념으로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쪽 모두 ‘연결되면서도 구분되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연구하게 되었고, 바로 그 기독교 사회주의에서 남과 북이 진정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2. 성서, 사회주의 관점에서 읽다 – 새로운 역사를 향한 우리의 성서 읽기
기독교 사회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저자는 우선 성서를 기독교 사회주의 관점에서 읽어 본다. 먼저 출애굽기 16장 17-18절의 만나 이야기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 하루치의 만나를 내려 주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올 때 많이 거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둔 사람도 있었을 텐데,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거둔 사람과 적게 거둔 사람의 소득 격차가 분명히 존재할 텐데 어떻게 부족함이 없이 모두 균등하게 배분되었을까? 이것은 ‘한 사람이 하루에 한 오멜’이라는 만나 규칙 때문이었다. 즉 더 많이 거둔 사람도 내일 또 하루치의 만나를 내려 주심을 믿고 얻은 물질을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는’ 과정에서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 사람이 한 오멜”이라는 균등과 평등이 만나 공동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또 레위기 25장 8-12절 희년 규례도 사회주의적인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안식년(제7년)을 일곱 번 지내고 난 다음 해, 즉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한다. 희년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자기 땅을 팔고 남의 집에 가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이 자기 땅을 되찾고 가족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희년 제도는 땅값의 산정 기준이 되어 희년과 가까워질수록 땅값은 싸진다. 땅을 파는 사람도 능력만 있으면 언제든 무를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더라도 희년만 되면 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땅을 산 사람도 어차피 희년이 되면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기에 정도 이상의 땅을 얻고자 욕심 부리지 않는다. 결국 희년의 의미는 “가난한 자에겐 희망을, 부요한 자에겐 나눔을”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잘 보여 주는 비유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다. 이른 아침부터 온 사람이든 해 질 무렵 온 사람이든 포도원 주인은 똑같은 일당을 주었다. ‘일한 만큼 받는다’는 성과급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저자는 이것을 만나 공동체의 신약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만나 공동체에서 율법으로 이루어진 균등 분배가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한 사람이 한 오멜”과 같이 “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사회주의 관점으로 성서를 읽어 보려 한다. 이런 시도는 그동안 우리가 자본주의적으로만 성서를 대했던 것을 반성하고, 남과 북이 함께 성서를 읽을 통일의 날에 우리의 성서 읽기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게 한다.
3. 부자와 가난한 자가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비전
이렇듯 성서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비전이 제시된 구절들이 있다. 한 사람이 한 오멜을 갖는 만나 이야기,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는 희년 이야기, 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천국 이야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안식년이라든지 희년 규례가 그대로 구현된 적은 없다.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그런 이스라엘 공동체를 책망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를 삶 속에서 빈민 구제와 빈곤 문제 해결을 외면했던 종교인들의 위선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멸망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예언자들은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메시아를 기다렸다. 사회를 공평하고 정의롭게 다스릴 통치자를 염원한 것이다. 이사야는 그 비전을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장면으로 묘사했다(사 11:6-9). 이것은 과연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일 뿐인가? 권력층과 부유층, 소외계층과 빈곤층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을 실현할 법과 종교가 있었음에도 실패한 이스라엘을 보고도 가능하다 말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기독교 사회주의는 이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상극이지만, 이 둘이 공존과 협력을 이루어 나눔과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꿈, 그 꿈은 사회주의 실험이 많은 실패를 거듭했음에도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포기할 수 없는 바로 그 꿈인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포기할 수 없는 꿈과 일맥상통하다.
4. 사람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가능한 공동체 – 내 것을 나누고 먼저 희생하는 기독교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기독교가 언제부턴가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듣고 있다. 저자는 그 원인이 세속적 자본주의 원리를 교회가 그대로 따라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개인의 자유와 물량적 성장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원리를 교회에 적용한 결과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그에 걸맞은 성숙이 뒤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개인적 종교 자유’만 말하고 ‘사회적 책임’은 도외시하는 이기적 집단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변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한국에 처음 들어온 복음, 초대교회 신앙인들의 삶의 모습이 그 답이 될 수 있겠다. 순수한 복음에 철저했던 초대교회 신앙으로 돌아가는 기독교, 그런 신학과 신앙을 저자는 기독교 사회주의라 부른다.기독교 사회주의는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 공동체에서 그 근거와 가능성을 찾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신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니(눅 18:27)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함께 모여 기도를 드렸고, 마침내 약속했던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일어난 것이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2-35).
즉 물질의 공동 소유와 공동 사용, 공동 분배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결과 공동체 안에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이 모두 균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함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꿈꾼 메시아 공동체, 율법에 예시된 희년 공동체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수없이 시도하다 실패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이곳에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같은 일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내 것을 즐거이 나누며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성령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기에 기독교 사회주의는 겸손히 성령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껏 법으로 제도로 균등 분배를 실현하려는 공산주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인간의 힘으로 이상 사회를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낮아짐으로 희생의 본을 보이신 예수의 섬김의 정신으로, 그리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불가능한 명령을 가능으로 바꾸는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성령을 구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겸손히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