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혼으로 일제강점기를 살아낸 민족의 스승,
우리는 왜 김교신을 기억해야 하나?
1. ‘참 조선인’ 김교신
조선을 사랑하고, 한민족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사랑했던 김교신(金敎臣, 1901∼1945). 그는 ‘성서를 조선 위에’,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우려 한 신앙인으로, 조선산(産) 기독교, 조선적 기독교 운동을 주창했다. ‘무교회주의자’로 불리는 그는 형해화(形骸化)되어 가던 기성 교회를 비판, 개혁함으로 그 틀과 제도를 벗어나려 했다.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로서 말씀과 기도 생활에 철저했던 그의 영성과 사랑의 실천은 헌신적인 교육자로서의 삶을 통해 많은 제자들에게 깊은 감화와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 스승으로서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2. 김교신 육필 일기―처음이자 마지막 해역본
김교신의 육필 일기가 마침내 해역(解譯)되어 소개된다.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2015년 봄, 김교신 선생 서거 70주년에 즈음하여 영인본 <김교신 일보>를 펴낸 바 있다. 이 책은 영인본 출간 이전부터 약 1년 9개월에 걸친 해역 작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펜으로 한 자 한 자 써내려 간 일상의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김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만날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 후기 시대상의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다. 함석헌, 류영모 등 그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끼친 이들, 죽마고우 한림을 비롯한 벗들, 손기정, 윤석중, 류달영 등 양정 시절 제자들과 함께한 시간들과 나눔의 자취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해역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원문에 충실하여 저본으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데 유념했다. 원문을 가능한 한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오늘날의 독자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어려운 한자어를 풀어 쓰고 옛말은 현대어로 고쳤으며, 필요한 경우 각주를 달았다. 특히, 담백하면서도 진취적인 그의 글맛을 살리려 고심하며 많은 논의를 거쳤다. 육필원고인 원문의 특성상 판독되지 않은 글자나 의미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어구들은 부득이 그대로 두었다.
선생이 일기장을 ‘일보(日步)’라고 한 것은 우치무라의 “일일일생주의를 자신만의 종말론적 기독교관으로 해독하여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하려고 애썼던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선생이 ‘일보’에서 보이는 ‘하루’를 중요시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략) 자신의 삶을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헤아리고 되돌아보자는 것, 여기서 일보라는 말은 우리의 영적인 삶과 연관되고 있음을 터득할 수 있다. _이만열, 간행사에서
일기 여기저기에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며 못된 인간임을 고백하고 있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순종하는 욥의 마지막 모습을 연상케 할 뿐이었다. … 이 ‘일보’를 통해 김교신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그의 신앙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래서 김교신이 꿈꾸었던 ‘조선(한국)을 성서 위에’ 세우는 데 보탬이 되기를 소망한다. _김철웅, 발문에서
김교신과 일기
김교신은 10세 때부터 일기를 써왔지만 중일전쟁 발발(1937)로 일제의 전시(戰時)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필화(筆禍) 사건을 우려하여 소각해야 했다. 이 책은 그가 간직해 왔던 30여 권의 일기 가운데 소각되지 않고 남은 두 권으로, 제28, 29권에 해당한다.(<성서조선>에는 그의 일기가 상당 부분 남아있기는 하나, 한글 맞춤법에 따른 교정을 거쳤으며 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다듬었고, 공지성 글의 요소도 있어 이 육필 일기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후 이 일기는 1982년에 <성서조선> 별권으로 영인되었고, 몇 차례 해역을 시도한 적이 있지만 원문 해독상의 어려움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남은 두 권의 육필 일기가 80여 년 만에 현대어로 다시 태어나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일기는 1932년 1월부터 1934년 8월까지로, 이 시기에 김교신은 양정고보 교사로 재직했으며, <성서조선> 발간에 주력했다.
일기에 비친 김교신의 모습
이 일기 읽어 가면 ‘하루를 일생같이’ 치열하게 살려 했던 김교신의 일상의 모습들은 물론, 그의 신심어린 마음까지 행간을 통해 생생하게 다가온다.
①헌신적인 교육자. 수업은 물론 성적 처리, 가정방문, 농구부 지도 및 시합, 정학생 지도, 학부모 면담, 학생 진로 지도, 견학, 교외지도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었다.
②충성스러운 가장. 가사 돕기 수준을 넘어선 강도 높은 노동량을 기꺼이 감당해 냈다.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노동의 재미와 보람을 느꼈고, 때로 가족의 질병 치료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그 질병이 자신의 신앙 없는 생활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 뉘우치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③<성서조선> 발행인.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고자 했던 그가 혼신의 힘을 쏟아 주력했던 <성서조선> 발행은 숱한 역경을 헤쳐가야 했다. 총독부의 검열과 호출 및 삭제, 제작 및 배송 과정에서의 크고 작은 어려움, 판매 부진에 의한 재정적인 압박 등과 싸우며 편집, 제작, 영업 등의 일을 혼자 감당해 냈다.
④무교회주의자. 익히 알려진 바대로 그는 무교회주의자이지만 결코 교회와 싸운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비신앙적인 문제들과 싸웠다. 그는 진정 교회를 아끼고 사랑했으며 교회를 위해 애썼다.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을 통해 그가 천성적으로 측은지심이 많고 특히 신적(神的) 감화에는 격한 감동을 눈물로 표현했던 순박한 인간상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