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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 회고록

19,800

 

저자 김일환

발행일 2015.4.10

상세정보 무선 / 541page / 240×173mm / 925g

ISBN 9788936510398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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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과 건군의 초석을 다진
김일환 장관의 불꽃같은 삶의 발자취

제1공화국의 실세, 얼굴을 드러내다
한국 현대사에서 1950년대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지도, 환영받지도 못했다. 정치적으로는 이승만 정권의 부패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싹트지 못하고, 6․25전쟁과 남북 분단으로 경제는 피폐하고 모든 것이 침체된 시기로 규정되곤 했다. 그러나 근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과 오늘날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취가 1950년대의 성과를 토대로 한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이념 갈등과 민족 분쟁 그리고 가난이라는 절박한 상황을 딛고 일어서느냐, 아니면 그대로 주저앉느냐를 결정짓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 중심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지근거리에 상공부․내무부․교통부 장관을 역임하며 실세 역할을 한 김일환이 있었다. 그는 광복 후 초대 재정국장을 지내면서 국군 창군의 산파 역할을 했고, 6․25전쟁 때는 국방부 제3국장으로서 한국은행 지금은(地金銀, 금괴의 일종) 후송작전을 수행했다. 김일환 장관의 삶은 한 개인의 인생사를 넘어, 파란만장했던 현대사의 굴곡과 명암을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역사적 의미가 깃든 육필원고와 200여 컷의 사진
이 책은 제1공화국 시절 육군 소장, 국방부 차관을 거쳐 4․19 직전까지 장관을 역임하고, 이후 국제관광공사 총재, 재향군인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나라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김일환 장관의 회고록이다. 이 책은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본 그의 삶이 아니라 김일환 장관의 육필원고를 바탕으로 정리하여 엮은 것으로, 그의 기억과 소회가 오롯이 담겨 있다. 한국고등교육재단 연구위원이자 국제학술부장인 윤대엽 박사가 원문의 내용 및 문체를 가급적 살리고 중복되는 내용을 적절히 솎아 정리했다.
이 같은 텍스트와 더불어 책에는 친필이 적힌 원고지 37매와 각종 사진 150여 컷이 수록되어 있다. 통위부(국방부 전신) 소속 육군 참령, 육군 대령 등 젊은 시절부터 여든네 번째 생일을 맞기까지 생애에 걸쳐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 집무실, 현장 시찰, 브리핑 모습 등을 담은 사진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정일권, 김현철, 송인상, 박정희, 김활란 등 당대 역사의 중요한 길목에 섰던 이들과 함께한 사진, 시대 상황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기사, 6·25전쟁 직후 지금은地金銀 후송작전에 쓰인 수령증 사진 등 여러 귀한 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책에는 이처럼 역사적 의미가 깃든 사진들이 텍스트에 앞서 주가 되어 흐르고 있는데, 기존 책에서 흔히 보는 글과 사진의 평면적이고 병렬식의 결합을 넘어, 사실을 바탕으로 사진과 텍스트의 입체적 조합을 통해, 과거의 기록이 살아 전달됨을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청렴한 공직자상을 통해 대한민국의 내일을 열다
이 책은 김일환 장관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만주군에 징용되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조국으로 돌아오게 된 사연, 국군 창군과 정부 수립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모습, 그리고 4․19를 겪고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까지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부록 1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국제관광공사 총재직을 수행하고 재향군인회 회장, 한국전력 사장을 역임하며 활동할 때의 모습, 그리고 한경직 목사를 도와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사업에 동참하던 모습 등이 실려 있다.
본문 가운데 특별히 주목할 만한 내용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일본 만주군에 징용되면서 겪어야 했던 고뇌, 6·25전쟁 때 지금은地金銀 후송작전에 앞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리라 여겨 가족에게 미리 작별 인사를 건네는 모습, 국방부 차관으로서 역대 국방부 장관들(이기붕, 신태영, 손원일)을 모시며 겪은 소회, 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원조 협상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여 밤에 호텔 전망대 위에서 눈물을 훔쳐야 했던 사연, 41세의 나이에 현직 군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상공부 장관에 취임하여 다짐했던 각오, 내무부 장관에 취임하여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과 겪어야 했던 갈등, 4․19 전후 긴박했던 상황들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기억 등이 드라마처럼 진솔하고도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다.
부록 2에는 김일환 장관이 상공부 장관 및 국제관광공사 총재로 재임하던 시절, 당시 시대 상황, 산업 현황, 정책 방향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김일환 장관의 글과 인터뷰 자료가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픔과 가난을 딛고 숨 가쁘게 달려온 한 개인의 삶과 더불어, 대한민국 현대사가 담금질되어 가던 현장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또한 청렴한 관리와 공직자상을 그려 봄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여는 힘과 지혜를 얻게 된다.

*초판 발행일 2014.8.15. 개정판 발행일 2015.4.10.

책속에서

고국에 돌아온 후 나는 외국에서 터득한 군사 지식을 나의 조국을 위하여 바치는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굳은 결심으로 군에 입대하여 당시 우리 군의 요람이었던 국방경비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조국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각오였다. _‘회고록을 시작하며’에서

당시 나라 잃은 한인들이 배움 혹은 생계를 위해 만주의 군관학교에 입대한 것은 나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이들은 군관학교에서 음으로 양으로 군대의 문화와 제도를 익혀 훗날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창군을 하고 군을 관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국의 군대가 없어 남의 나라가 세운 군대에 속해 있어야 했지만, 나뿐 아니라 당시 한인계 학생들은 오히려 어느 나라 민족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근무했다. _‘만주에서의 경험’에서

석탄공사 육군파견단장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여러 차례 이 대통령과 독대하였고, 이 대통령의 이러한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막 불혹을 지나 일국의 장관이 된 것은 큰 책임이 아닐 수 없었다.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신앙에 따라 소신껏 일하라고 당부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였다. 
_‘상공부 장관 시절’에서

어려울 때마다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은 바로 이 대통령이었다. 이 대통령은 제출한 사직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책하는 대신 유임을 선택했던 것이다. 사표를 반려하면서 그 사표에다가 ‘경기물사행공’(卿其勿辭行公, ‘경은 그 공무집행을 사양치 마시오’)이라 썼다. 
교통부 장관 시절, 어느 때보다 이 대통령을 수행할 기회가 많았다. 다른 장관 시절보다 이 대통령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많이 남긴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이 대통령은 아이디어 제공자였고, 연출자였으며, 감독자였고, 지지자였다. _‘교통부 장관 시절’에서

나는 이 재판은 보통재판이 아니라 정치재판인 데다가 한 나라의 원수는 외국에 망명하고 주모자는 극형을 당한 이 마당에, 일국의 장관이라는 자가 국민 앞에 비겁해서는 안 되고 당연하게 처분을 바라야 된다고 생각했다. 성경 말씀에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산다’(요한복음 12장 24-25절)는 구절을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재판 과정 내내 어느 누구보다도 올바르게 임했다. 대통령이 망명했는데 졸개인 나는 죽어도 마땅하다고 결심하였다. 또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은 누가 주모자든 누가 과잉 충성했든 여당인 자유당이 어떻게 했든, 대통령을 모시는 국무위원들 모두의 책임이며 국민 앞에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남보다 장관을 오래 지냈고 바로 직전 내무부 장관이었던 나는 남달리 상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취조 때나 재판 중에 사실을 말하였고 나의 부하직원들에게 책임을 미루지도 않았다. 참고인이나 증인을 채택하지도 않았다. 재판 중 어느 재판관은 다른 피고들에게 김 피고를 보라는 말까지 한 적이 있었다. 나의 변호사인 김치열 씨는 변호사가 필요 없지 않느냐고 한 적도 있었다. 1심이 끝나고 다른 분들은 모두 상소를 했으나 나는 하지 않았다. 여하간 내가 재판을 받았던 피고들 중에 제일 먼저 출옥했다. _‘4․19’에서

차례

출간에 부쳐_김의창 6
회고록을 시작하며_나의 인생, 나의 신앙 8

1장 철원에서 하얼빈까지 ― 027
출생 / 유랑생활 / 제2의 고향, 하얼빈

2장 만주군에서의 경험 ― 049
한인통역원 / 만주군 군관학교 / 생사화복의 은총 / 조국으로

3장 국군 창군의 길 ― 081
국방경비대 발족 / 국방경비대 초대 재정국장 / 국군 창군과 국방부 제3국장

4장 6·25전쟁 ― 105
지금은地金銀 후송작전 / 경주박물관 국보 반출 / 대구 양곡조작본부糧穀操作本部 / 부산에서의 인연 / 서울 수복의 기쁨과 슬픔 / 북진과 1·4후퇴 / 두 번의 억울한 일

5장 국방부 차관 시절 ― 161
소장 진급과 차관 임명 / 이기붕 국방부 장관 / 신태영 국방부 장관 / 손원일 국방부 장관

6장 육군본부 관리부장 시절 ― 191
육군본부 관리부장 / 워싱턴에서의 원조 협상 / 군 보급 절약운동과 석탄 개발

7장 상공부 장관 시절 ― 223
제9대 상공부 장관 취임 / 시정 방침과 무역 진흥 / 광업 개발 / 석탄산업 개발 / 전기산업 발전 / 시멘트산업 개발 / 인천판유리공장 / 비료산업 개발 / 제련산업 육성 / 수산업 육성 / 국산품 장려정책

8장 내무부 장관 시절 ― 321
차기 내무부 장관 / 7개월 동안의 내무부 장관생활 / 소신과 현실의 갈등

9장 교통부 장관 시절 ― 359
세 번째 장관직 / 현장제일주의 / ‘경기물사행공卿其勿辭行公’

10장 4·19와 수감 ― 405
1960년 4월 / 재판과 수감 / 모친상과 귀가

11장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 425
하와이에서 온 메시지 /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모시고

회고록을 마치며_나의 인생을 마치는 글 438
정리를 마치며_윤대엽 446
약력 451
기리는 글_이상훈 460 / 이재철 463
해제_김세중 467
부록 1_사진으로 회고하는 60년대 이후 475
부록 2_김일환 기고글 목록 510 / 한국 광업 개발의 현황과 전망 512 / 4290년도 상공정책의 전망 521 / 국영기업체의 민영화와 생산성 향상에 주력 524 / 김일환 국제관광공사 총재 인터뷰 528
색인 535

추천글

장관을 세 차례씩이나 지낸 분이 작은 집에서 청빈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존경심을 더욱 깊이 새기게 되었다. 뼛속까지 군인이었던 고 김일환 장관은 국가에 크나큰 업적을 세웠고, 평소 청빈함과 강직함, 철두철미한 자기 관리와 엄격한 생활신조를 실천하며, 독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_이상훈 전 국방부 장관, 현 애국단체총협의회 상임의장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어른의 표상이었던 김일환 장로는 더없이 귀한 청송靑松이었고, 그의 회고록은 노인이 아니라 어른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기 원하는 모든 이를 위한 삶의 지침서이다. _이재철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

《김일환 회고록》은 전후 경제 부흥기 역사의 한 축을 이끌었던 김일환의 진솔한 역사 증언록이다. ‘지시 5퍼센트, 확인 95퍼센트’라는 현장주의 지도원칙에 따른 리더십은 1960년대 이후 ‘산업화 대질주기’를 이끈 리더십과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것임을 쉽게 깨달을 것이다. _김세중 전 연세대 교수, 현 계간 <시대정신> 발행인

저자

김일환
1914년 강원도 철원에서 양력 8월 15일(후일 광복절이 됨)에 태어났다. 독립운동 및 교육 분야에 매진한 아버지와 신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조국애와 신앙을 몸에 익혔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떠난 아버지를 따라 1919년 만주로 이주한 이후 1946년 조국에 돌아오기까지 27년간 만주와 러시아에서 거주하였다. 1932년 만주군에 징용되어 경리교육을 받고 1945년 8월까지 복무했다. 
광복 후 1946년 3월 귀국한 그는 5월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통위부統衛部 재정처장을 거쳐 초대 재정국장으로 일하면서 국군 창군의 산파 역할을 했고, 6·25전쟁 때는 국방부 제3국장으로서 한국은행 지금은地金銀 후송작전을 완수하였다. 국방부 차관을 거쳐 육군본부 관리부장 시절 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한미회담 및 원조협상을 수행했으며, 대한석탄공사 군파견단장을 겸직하며 탄광업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55년 9월, 41세의 나이에 현직 군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9대 상공부 장관에 취임하여 석탄, 전기, 시멘트, 유리, 비료, 수산, 무역 등의 분야에서 성장의 기틀을 다졌다. 제17대 내무부 장관, 제8대 교통부 장관 시절에는 정치적 소신을 지키며 선거와 결탁된 경찰기관을 개혁하고, 김포공항 종합청사 신축 등을 통해 관광·교통업 활성화에 기여했다. 
그러던 중 4·19혁명을 맞아 수감되었고 2년 3개월여 만에 출소했다. 이후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을 비롯하여 국제관광공사 총재, 한국전력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를 위한 봉사와 섬김으로 헌신했다. 행정부에 브리핑제도를 처음 도입했으며, ‘현장제일주의’를 원칙으로 한 리더십으로 대한민국 행정의 토대를 닦은 그는 2001년 10월 1일 국군의 날(음력 8월 15일) 소천하였다.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일등보국훈장, 은탑산업훈장, 동탑산업훈장 등을 수훈했다.

 

정리 윤대엽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정치경제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게이오대학과 타이완 국립정치대학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연구하였고,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연구위원 및 국제학술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2014년 가을학기부터 베이징대학 국제관계학원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