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우리에게 철학은 있었는가?
1. 20세기가 숨겨 둔 우리의 철학, 씨알사상 입문서
‘철학 교수는 있었으나 우리의 물음을 물은 철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던’ 시대, 정신의 빈곤으로 더욱 불행했던 시기가 우리의 20세기였다. 물질적 궁핍뿐 아니라 사대주의, 신분질서, 숙명론에 눌려 잠들어 있던 이 땅은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등 아픈 역사를 거쳐 오면서 물질적 토대뿐 아니라 정신에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타자의 생각과 철학이 강제로 이식되고, 우리 것은 말하고 가르치지 못하던 시기에 씨알사상은 대중적인 사상은 아니었지만 싹이 움트듯 생명을 피워 왔다.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열린 2008년 세계철학대회에서 다른 분과는 10여 명 정도의 사람이 모인 반면 유영모·함석헌 특별분과는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후 씨알사상은 국내외적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책은 유영모·함석헌 연구의 권위자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 소장이 제정구기념사업회 배달학당에서 2011년 4월부터 11월까지 10회에 걸쳐 강의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1부에서는 독립운동가 안창호와 오산학교를 세운 이승훈, 우리말로 철학을 한 유영모와 함석헌, 그리고 판자촌에 들어가 민중(씨알)과 함께 산 제정구와 정일우의 삶과 씨알사상의 관계를, 2부에서는 씨알사상과 평화, 통일, 섬김 등을 다룬다.
2. 안창호에서 제정구까지, 씨알사상의 완성
1부에서 저자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동서 문명의 만남과 민주화 과정, 민중이 주체적으로 깨어나는 과정으로 진단한다. 실학, 개화파, 동학,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사건에서 민(民)이 새로운 나라에 대한 미래상을 가지고 주체로 깨어 일어난 것이다. 독립협회 관서지부 창립을 주도하고, 만민공동회에서 명연설을 남긴 안창호는 민중과 하나 되고, 민족의 마음으로 끝까지 살아간, 씨알사상의 원조로 새롭게 주목된다.
신민회 평안북도 책임자였던 남강 이승훈은 1907년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았고, 오산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펼쳤다. 오산학교에서 유영모와 함석헌이 만난다. 유영모는 동서 사상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둘을 서로 주체로 종합한 인물이다. 15세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동양 철학과 생명 철학을 탐구했던 그는 50세에 이르러 다시 기독교 신앙을 깊이 체험한 후 우리말, 우리글의 한국 철학을 정립했다.
함석헌은 20세기에 태어나고 죽은 위대한 정신이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 민중 씨알을 발견한 그는 우리 민족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과학주의, 기독교 정신을 받아들여 사대주의, 신분질서, 숙명론의 잠에서 깨어나는 흐름 속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썼으며, 민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늘 생명의 씨앗임을 밝혔다.
씨알사상의 실천적 귀결은 제정구와 정일우의 삶으로 설명된다. 청계천 빈민촌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공동체를 이루어 산 이들에게서 저자는 예수의 정신을 본다. 가난 정신과 생명 나눔의 정신이다. 가난한 주민과 공동체를 이루는 데까지 가야 씨알사상이 완성된다.
2부에서는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생명 활동으로서의 평화, 참된 주체가 되어 통일된 주체로 나아가는 통일, 생명과 역사의 표면적 흐름을 거슬러 근본으로 돌아가는 서로 섬김의 움직임 등을 역설한다.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이 우리의 관계를 장악한 듯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서로 섬기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서로 주체가 되어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살아가자는 실천적이면서도 영성적인 철학인 씨알사상은 손님이 주인 노릇을 했던 우리의 20세기를 넘어서서 타자를 종 삼지 않으면서도 나의 주체성과 너의 주체성을 서로 살리자는 철학이다.
생명, 평화, 살림이라는 열쇳말이 화두로 떠오르는 시대에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는 우리말과 우리 정신 속에 깃들어 있는 얼을 불러일으키는 마중물 역할을 할 것이다.
유영모
1890-1981. 호는 다석(多夕). 우리말과 글을 가지고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로 동서 정신과 철학을 융섭해 냈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유불도를 회통하는 한국적・세계적 사상가로 주목받고 있다.
함석헌
1909-1989. 독립운동가, 언론인, 기독교 운동가. 우치무라 간조에게 성서를 배우고, 신앙으로 식민지 시대를 돌파하기 위해 김교신 등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일제 시대, 군부독재 시대의 투쟁과 강연으로 이름을 얻었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기독교 정신과 민족정신의 참된 만남을 드러낸 명저로 평가받는다.
제정구
1944-1999. 제14대 국회의원, 빈민운동가. 1973년 청계천 야학교사로 판자촌과 인연을 맺은 후 1977년 정일우 신부, 양평동 판자촌 철거민들과 함께 시흥시에 복음자리 마을을 세웠다. 천주교 도시빈민회를 결성하여 1980년대 내내 강제철거에 맞서 도시빈민운동을 이끌었다. 1986년 막사이사이상을 정일우 신부와 공동수상했다.
정일우
1935년생. 미국명 존 빈센트 데일리John V. Daly. 미국 일리노이 주 파일로 마을에서 태어났다. 1966년 사제서품을 받고 서강대학교에서 철학과 영성신학을 가르쳤으나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는 생각에 1973년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가 그곳에서 제정구를 만났다. 이후 양평동 판자촌 생활을 시작으로 제정구와 도시빈민운동을 함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