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과 기도를 통합시킨그리스도인 선비, 다석 유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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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기도를 통합시킨그리스도인 선비, 다석 유영모
박재순
박재순은 1950년 충청남도 논산군 광석면, 강경평야 언저리 작은 마을 말머리에서 태어났고 대전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새벽예배도 열심히 다녔으며, 고등학교 때는 머들령이라는 문학동인회에 가입하여 시를 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에 매력을 느끼며 공부했다. 문리대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았고 독재정권의 억압과 최루탄 가스가 싫었다. 대학 졸업 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대문 구치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1981년 전두환 정권 때 한울공동체 사건으로 다시 2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두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 책 읽고 공부하며 생각할 시간을 넉넉히 가질 수 있었다.
1974년 가을 한신대학교에 입학하여 자유롭고 실천적인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다. 안병무 교수에게서 성서신학과 민중신학을 배우고, 박봉랑 교수로부터 카를 바르트 신학을 배웠다. 학사·석사학위 논문은 카를 바르트 신학, 박사학위 논문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으로 썼다. 서구 주류 전통 신학자 카를 바르트에게서 복음적인 신학의 깊이를 배우고, 서구 전통 신학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본회퍼에게서 신학적인 자유와 영감을 얻었다. 1980년부터 안병무 박사가 세운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번역실장으로 일하면서 국제성서주석 번역을 하였다. 독일 성서주석서 폰라트의《창세기》, 요아힘 그닐카의《마르코복음》I, II, 독일 여성신학자 도로테 죌레의《사랑과 노동》등 10여 권을 번역했다. 당시 한신대학교에서 해직 상태였던 안병무 박사는 매주 1~2회 연구소 직원들에게 성서와 신학에 관한 강의를 들려주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신학자였던 안병무 박사를 가까이 모시고 자유롭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고 특권이었으며, 연구소 번역실에서 아홉 살 어린 아내를 만나 결혼한 것은 그에게 축복이었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민중신학, 생명신학, 씨알사상 연구에 몰두했다. 대학 4학년 때부터 함석헌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 시작하여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을 연구하게 된 것은 보람이고 사명이었다. 함석헌은 그가 만난 가장 뛰어난 인물이고 위대한 정신이었다. 씨알사상연구회 초대회장(2002~2007)을 지낸 박재순은 2007년 재단법인 씨알을 설립하고 씨알사상연구소장으로서 함석헌과 그의 스승 유영모의 씨알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씨알사상》,《다석 유영모》,《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유영모·함석헌의 철학과 사상》(공저),《모색: 씨알철학과 공공철학의 대화》(공저),《씨알·생명·평화》(공저),《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민중신학과 씨알사상》,《한국생명신학의 모색》등이 있다.
머리글
1판 머리글
들어가는 글 ― 한국 근현대사의 특성과 유영모의 철학
1장 다석 사상의 변화와 시기 구분
2장 삶과 죽음의 가운데 길
3장 하루살이: 하루를 영원처럼
4장 밥 철학과 깨끗한 삶
5장 ‘가온 찍기’와 무등(無等)세상
6장 생각: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름
7장 숨과 영성: 숨은 생명과 얼의 줄
8장 우리말과 글의 철학: 천지인 합일과 인간 주체의 철학
9장 예수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그리스도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찬미함
10장 기독교·유교·불교·도교의 회통: 빈탕한데 맞혀 놀이(與空配享)
11장 하나로 돌아감(歸一): 하나로 꿰뚫는 한국적 종합사상
나가는 글 ― 다석 사상의 성격과 의미
참고문헌
다석은 생각을 이성적 자아의 기능으로 본 데카르트와는 달리 생각을 자아를 불사르는 일로 보았다. 생각하는 일이 곧 자아를 불살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다. 다석에게 생각은 몸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생각과 몸이 통전되어 있다. 생각에 대한 다석의 이러한 이해는 생각에 대한 데카르트의 이해와는 다르다. 데카르트는 “사유(思惟)하고 연장(延長)이 없는 실체”로서의 정신과 “사유하지 않고 연장을 가진 실체”로서의 물체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이에 반해 다석은 마음의 생각과 몸의 생리작용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말하였다. 마음과 몸은 하나의 큰 틀 속에서 긴밀히 결합되어 있고 연속되어 있다. 다석은 몸 속 깊은 데서 몸 전체의 생리작용으로부터 생각이 우러난다고 하였다.
_117면, 2장 ‘삶과 죽음의 가운데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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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은 금식을 자주 하고 하루 한 끼 먹는 일중식(日中食)을 하였다. 일중식도 금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아주 안 먹으면 죽으니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되 필요한 만큼만 먹는 것이다. 다석은 오랫동안 두 끼 먹고 살다가 1941년 2월 17일부터 하루에 저녁 한 끼니씩만 먹었다. 석 달이 지나서 여느 때의 안색으로 돌아왔다. 다석은 엄격히 하루 한 끼만 먹고, 간식, 군것질을 일체 하지 않았다. 최원극에 따르면 다석의 일일 일식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15시간 이상을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는 엄격한 것이었다. 다석이 금식과 일중식에 힘쓴 것은 밥을 줄임으로써 육으로만 살지 않고 정신으로 살고, 저만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 공(公)과 전체(全體)를 위해 살자는 것이었다. 하루 한 끼 식사를 함으로써 다석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편안해져서 하늘의 뜻대로 신령하게 살고자 했다.
_145-146면, 4장 ‘밥 철학과 깨끗한 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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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은 우리말과 글을 닦아 내고 살려 내려고 힘썼다. 이 점에서 다석은 이전의 한국 사상가들과 비교된다. 조선왕조의 실학자들도 한문으로 생각하고 표현했다. 19세기의 민중종교 사상가들조차 한문과 한자로 생각을 표현하고 전했다. 동학의 동경대전은 한문으로 되었고 용담유사는 한글로 표기되었으나 한자어를 한글로 옮겼을 뿐이다. 주문이나 부적의 글도 다 한자로 되어 있다. 강증산도 한자어를 주로 사용했고 증산교의 경전인 《대순전경》도 초판은 국한문 혼용체로서 한자어를 주로 사용했다. 대종교의 경전들조차 한문으로 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우리말과 글에 대한 철학적 자각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민중의 삶 속에서 우리말과 글에 대한 자각이 생겼다. 이 점에서 유영모는 민주의식을 가지면서 우리말과 글을 철학적 언어로 다듬어내고 우리말과 글로써 철학을 펼쳤던 첫 번째 사람이었다. 말년에 다석은 자신이 평생 말을 탐구했으며, 말마디 속에서 하나님의 이르신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였다(1972년 1월 22일 일지).
_251-252면, 8장 ‘우리말과 글의 철학: 천지인 합일과 인간 주체의 철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