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의 자서전.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과 한국에서 성장기를 보낸 아이,
미국인이면서도 중국을 더 사랑했던 소년,
성령 세례를 믿는 신학생이자 철공과 선원으로서 노동 운동을 했던 청년, 신학원장 자리를 박차고 태백의 산골짜기를 찾아간 성공회 신부,
성격적인 토지 제도의 회복을 외치는 사회 개혁가의 이야기가 강력한 신앙의 도전을 준다. 사진과 대천덕 신부 약력이 함께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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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의 자서전.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과 한국에서 성장기를 보낸 아이,
미국인이면서도 중국을 더 사랑했던 소년,
성령 세례를 믿는 신학생이자 철공과 선원으로서 노동 운동을 했던 청년, 신학원장 자리를 박차고 태백의 산골짜기를 찾아간 성공회 신부,
성격적인 토지 제도의 회복을 외치는 사회 개혁가의 이야기가 강력한 신앙의 도전을 준다. 사진과 대천덕 신부 약력이 함께 실려 있다.
무게 | 451 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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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 128 × 188 mm |
[대천덕 (Reuben Archer Torrey Ⅲ) (1918 ∼ 2002)]
1918년 중국 산둥 성(山東省) 지난(濟南)에서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과 한국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미국 데이비슨 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육학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건축 노동자와 선원 등으로 일하며 사회생활을 익혔다. 후에 교파를 성공회로 옮겨 남부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했으며, 1946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2년간 목회 사역을 했다.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성 미가엘 신학원(현 성공회대학교)의 재건을 도와 달라는 요청으로 1957년 한국에 왔고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1964년 신학원장직을 사임했다. 다음 해인 1965년 뜻을 같이하는 몇몇 동역자들 및 아내 현재인(Jane Grey Torrey)과 함께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척박한 땅 강원도 황지(현 태백) 하사미에 노동과 기도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 ‘예수원’ 공동체를 세웠고, 2002년 8월 6일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할아버지인 R. A. 토리 1세로부터 시작한 성령론과 헨리 조지의 원리에 토대를 둔 경제 이론 및 공동체에 관한 가르침은 그의 치열한 삶과 함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양혜원
1970년 생으로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수료했다. 한국 라브리(L’Abri)선교회 협동간사로 6년간 섬겼으며, 1994년부터 통역과 번역 일을 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이디스 쉐퍼의 라브리 이야기》, 《대천덕 자서전 – 개척자의 길》, 《예수원 이야기 – 광야에 마련된 식탁》,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모자》, 《쉐퍼의 편지》(이상 홍성사) 등을 번역하였다.
1. 개척자의 길을 따라 / 2. 상처 / 3. 회개 / 4. 평앙(平壤)의 치유 / 5. 연경에서 중국을 배우다 / 6. 탐색 / 7. 진정한 칼뱅주의자 / 8. 교훈 / 9. 두 세계 사이에서 / 10. 바다로 가다 / 11. 남부 대학의 조용한 부흥 / 12. 갈등 / 13. 결혼 / 14. 목회는 내 길이 아니다 / 15. 한국으로 부르시다 / 16. 예수원 / 17. 공동체로 모인 사람들 / 18. 안식년에 생긴 일 / 19. 지금 그대로 가라 / 20. 성령은 일하신다(1)
에필로그-한국 교회에 드리는 말
나는 먼 장래의 계획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내가 해야 할 것들을 말씀해 주실 시간이 넉넉하기 때문이다. 그가 선장이시다. 나는 타수일 뿐이다. ……그가 지시를 내리시기 전까지, 지금 그대로 가리라. -본문 중에서
“위대한 영적 모험으로의 초대”
나는 이 책을 선물 받고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나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1)인생은 따분하고 지루해지기 쉬운데, 이분이 걸어온 인생 여정이 만만치 않겠지? 2)관심 없는 영역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다방면에 걸친 이분의 열린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 3)수많은 한국 젊은이들의 마음의 고향인 예수원을 이끌고 있는 이분의 핵심적인 정신은 무엇일까? 마지막 책장을 덮은 지금, 나의 질문은 해결되고도 남았습니다.
첫째, 이 책은 위대한 신앙의 모험에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도 평소에 인생의 순간 순간이 신앙의 모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가장 “큰 흥분과 모험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가 어린시절에 중국에서 외롭고 상처 많은 시절을 보냈을 때나 소년 시절에 한국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재발견했을 때뿐만 아니라, 청년 시절에 신학교를 다니면서 노동자들의 밑바닥 생활과 사회주의를 시험할 때에도 주님은 그의 믿음을 단련시키셨습니다. 그 믿음은 어린아이 같이 깨끗하고 순수하면서도 마치 노도광풍을 헤쳐 나가는 선장같이 강하고 개척자적인 믿음입니다. 지금처럼 믿음이 없는 시대에는 신앙의 비약이 아니라 모험이 필요합니다.
둘째, 이 책은 열린 생각의 근원이 성경임을 알게 합니다. 그는 프린스턴과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엘리트였지만, 어느 누구도 시도하기 힘들었던 철공수와 선원 생활까지 폭넓은 인생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런 학문적인 훈련과 처절한 현장 체험을 통하여 성경 말씀에 철저하게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나라 토지문제와 경제, 그리고 낙태 반대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세우고자 노력한 것입니다. 기독교학술동역회(전 기독교대학설립동호회)나 한동대학교의 학자들에게 미치는 그의 영향력도 알고 보면 성경의 능력입니다. 그의 성경관은 에필로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님이 주신 것이고 오류가 없다.” 그의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것은 그의 다양한 학문과 체험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셋째, 이 책은 성도들 간의 교제, 즉 코이노니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잘 가르쳐 줍니다. 요즘은 돈으로 전도하려는 시대입니다. 하물며 말로 전도하는 것조차도 피곤하게 느끼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에 바다 위에서나 여름 캠프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예수원에서 그의 부인과 세 자녀와 함께 몸으로 수고하여 성도들 간의 공동체적 교제를 나누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교제 가운데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아름다운가를 체험하며, 동시에 그 수고가 얼마나 힘드는 것인가도 잘 알았습니다. 그의 국제적인 인간관계의 네트워크는 코이노니아의 실천 결과입니다. 나도 몇 년 전에 예수원의 한 산장을 빌려 서울대 치대생들의 수련회를 인도한 적이 있는데, 그들이 말로만 가르치지 않고 진리를 공동체적으로 실천하는 분들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밖에도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청년과 같은 뛰어난 기억력과 열정이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평생에 강조한 성령세례나 토지개혁에 대해서는 신학적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논쟁점을 남기지 않으며 잘 설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외국인의 글이라는 느낌을 거의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하고 친숙한 우리시대의 말로 멋지게 옮겨 준 양혜원 씨의 탁월한 번역입니다.
-글/성인경(한국라브리 총무·목사, 쿰회보 99.02)
“남을 위한 기도가 참신앙”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 외나무골 산골짜기. 3시간마다 버스가 다니는 포장도로에서 산길을 따라 15분쯤 오르면 초교파적 수도공동체 ‘예수원’ 입간판이 나온다. 공동체를 체험하거나 피정을 하기위해 매년 1만여명 이 찾는 곳이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쫓다가 스위스 산장 같은 건물들을 마주친다.
1965년 이 공동체를 설립한 대천덕(81)신부는 함박 웃음이 인상적이 었다. “한국 기독교인중에는 자신만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정한 의미의 신앙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생활 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16명이었는데 이제 70여명으 로 늘어났다고 웃었다.
미국인 성공회 신부인 대천덕(본명 토리)신부는 1918년 중국 산동성 에서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동양과 인연을 맺었다. 15세때 일 제치하의 평양에서 공부했고, 그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노 동운동을 하다가 “개척자 정신을 존중해주었던” 성공회로 개종했다. 1957년 성공회대학교 전신인 성 미가엘 신학원 원장에 부임했지만 신앙공동 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곳으로 들어왔다.
“처음 15년은 전깃불도 없었고 생필품을 사려면 황지까지 산길을 걸 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던 일은 함께 지내던 형제 자매 들이 떠난다고 할때였습니다. 안녕히 가시라는 말을 하기가 얼마나 힘 들었던지……”.
화가인 부인 현재인씨가 말하는 ‘예수원 34년’이다.
하루 3시간의 기도, 7시간의 노동, 3시간의 침묵을 지키는 예수원의 특색은 대도. 매일 점심식사전 30분과 월요일 저녁 2시간은 남을 위해서만 기도한다. 전세계 난민들, 수감자, 수재민, 정치지도자들의 안녕과 위안도 빈다.
2년에 걸친 수련기간을 거쳐 정회원이 된다. 범죄자도 받아들인다. 공동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정회원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손님부 가정부 시설부 출판부 교육부 농장부 등으로 역할을 분담한다. 남자들도 식사나 세탁을 똑같이 맡는다. 대부분 대학출신으로 전직 교사나 대우그룹 기획실에서 근무했던 회원도 있다.
“1년 예산 2억원가운데 45%정도를 나무 십자가, 꽃카드 등 자체 생 산하고, 근처 150만평의 목장에서 나는 양털로 이불을 만들어 조달한다” 고 공동체 의회 의장 김춘남(37)씨는 말했다.
“IMF시대에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내탓 정신’과 함께 개인과 사회, 신자와 비신자가 경제적으로 서로 나누며 교통하는 ‘코이노니아’ 정신이 필요해요.”
지난 95년 공동체 운영권을 장로위원회에 넘겨준 노 신부는 “죽어 서도 바로 여기 묻힐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부부가 최근 한국생활을 정리한 ‘대천덕 자서전’과 ‘예수원 이야기’(홍성사)를 나란히 내놓았다.
-조선일보, juno@chosun.com, 1999.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