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느 순간에 생명을 경험합니까? 아니, 생명이 무언가, 하는 질문이 더 우선이겠군요. 이 두 질문을 그냥 함께 묶어서 생각해도 좋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느 때 어떤 것을 통해서 정말 살아 있다는 경험을 할까요? 생명을 우리말로는 삶이라고 하는데요.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거 아니냐, 하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예, 지금 우리는 살아 있긴 합니다. 그러나 곧 죽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죽기 위해서 사는지 모르겠군요. 죽어야 한다는 명확한 사실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부조리라는 까뮈의 말은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지만 이것은 시간이라는 범주에서만 타당한 말입니다. _ 예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8:2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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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질문이지만, 무엇이 생명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까요? 예수 부활에서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한다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한두 번의 말로 끝내도 좋을 정도로 간단하고 실증적인 생명이 아니라 종말까지 열린, 태초의 창조 사건과 동일한, 그래서 우리가 신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생명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비록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에 영적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죽는 순간에 누구나 지옥을 경험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의 몸을 박테리아나 구더기가 먹거나, 불이 태우겠지요.
이런 점에서 지옥은 이 생명 표상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도 명암 기법을 통해서 어떤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지옥은 생명을 밝혀주기 위한 어두운 그림자와 같습니다. 밝은 빛을 놓치고 그림자에만 눈을 고정시킨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_ 실족에 대해서(9: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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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24절에 이어 26절에서 다시 놀랐다고 합니다. 그 놀라는 강도도 훨씬 강합니다. ‘매우’ 놀랐으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고 토를 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에 부자는 가난한 자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구원도 당연히 그들이 먼저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고정 관념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크게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생각을 교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자가 옳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은 채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냐, 뭐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곡해한 것일 수도 있고, 적절하게 타협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선입관을 넘어서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이와 다를 게 없습니다. 온갖 종류의 선입관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큰 틀에서만 한 마디 한다면, 주류 사회에 편입되어야만 행복이 보장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좋은 학벌과 사회적 지위와 재산이 삶의 만족도와 비례한다는 생각이 개인과 사회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선입관이겠지요. 제자들의 인격과 신앙이 잘못 되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단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가 여기에도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경지에서 최선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그 너머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이지 않으니, 어쩝니까? _ 소유와 하나님 나라(10:2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