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을 지킬 때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된다”
서구의 인식론과 신학 방법론을 반성하고 우리 신학의 길을 트는 역작!
※ 모름의 인식론 : 우리말 ‘모름지기’는 ‘반드시’, ‘꼭’을 의미하는데 유영모는 이를 ‘모름직이’(모름을 지킴)로 풀었다. 생명과 물질의 세계에는 이성이나 물질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즉 밖에서 규명할 수 없는 모름의 차원이 남는다. 이 모름의 차원을 이성이나 개념으로 훼손하지 않아야 생명과 물질의 성격을 밝힐 수 있다. ‘안다, know’의 부정어가 다른 나라 말에서는 ‘안 안다, don’t know’인데 우리말은 ‘모른다’ 즉 ‘못 안다’라고 표현한다. 인식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겸손한 인정이 ‘모름’이란 말에 담겨 있다. 대상을 지배하고 부수어서 파악하려는 이성 중심의 접근법과 달리 내가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물으면서 스스로 알려 주기를 기다리고 내가 깨달아 알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인식론에서는 인식 대상이 수동적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인식 행위에 참여한다.
1. 죽고 죽이고 죽임 당하는 시대, ‘생명’이라는 화두
인간의 탐욕과 무관심으로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시대에 ‘생명’은 절실하고도 깊이 생각해야 할 주제다.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우리 철학 1, 2013)를 통해 20세기의 우리 철학인 씨알사상을 풀어 소개한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장은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우리 철학 2)에서 ‘생명’이 왜 기독교인의 신앙과 연결되는지, 생명을 바르게 대하고 맞이하는 법에 대해 생각한 바를 펼쳐 보인다. 생명 사건이 성경에 어떻게 증언되고 있는지, 한민족의 언어와 사상에 생명 체험이 어떻게 담겨 있는지, 한국 근현대사에 생명 이해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이 책은 밝힌다.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생명신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는 한국 근현대사 속의 민중의 삶과 의미를 드러내고(1장), 외래신학의 무분별한 수입이 아닌 우리의 신학을 주체적으로 할 것을 제안하며(2장), 묘합(妙合)과 서로 살림이라는 우리의 생명 체험을 드러내고(3장), 생명의 관점에서 삼위 하나님을 기술하며(4장), 생명 이해의 방식으로 서로 울림과 서로 느낌을 제시한다(5장). 2부 ‘평화를 이룩하는 신학’은 오늘날의 문명에 절실히 요구되는 평화를 생각한다. 먼저 한국 문화와 민주화 운동의 평화적 전통을 밝히고(1장),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을 김재준, 함석헌, 문익환을 중심으로 소개하며(2장), 군사 문화에 물든 이 땅에서 반전(反戰)의 의미를 묻고(3장), 동아시아의 평화로 가는 길을 우찌무라 간조, 함석헌, 김교신의 사상에서 찾는다(4장). 3부 ‘살림의 신학과 실천’은 어떻게 생명의 삶을 살 것인지 구체적 실천을 다룬다. 서구 문명의 인식론을 근본에서 비판하고 우리의 인식론을 제안하며(1장), 성경 읽기에서 생명 사건을 찾고(2장), 성경의 증언대로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 논하며(3장), 더불어 살아갈 존재로서 장애인을 어떻게 맞아들여야 하는지(4장) 논의가 이어진다.
2. 서구 철학의 인식론을 근본에서 반성하는 신학
서구 철학은 플라톤 이래 근본적으로 인간 이성의 인식 능력을 신뢰해 왔고 그 기반에서 서구 문명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 문명이 초래한 위기는 서구는 물론 서구 이외 지역에서도 생명 경시와 뭇 생명의 파괴, 죽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은 서구의 인식론, 생명에게 다가가는 근본 태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즉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을 깨뜨리고 파괴함으로써 대상을 파악하려는 반(反)생명적 인식론으로는 깊은 삶의 세계,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길은 ‘모름의 인식론’이다. 이는 서구의 인식론과 신학으로는 성경의 생명 사건과 우리의 삶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오늘 내가 있는 자리에서 생명 사건을 일으킬 수 없다는 반성이 깔려 있다. ‘모름의 인식론’은 인식 대상이 아니라 인식 주체가 깨지는 인식론이며, 인식 대상을 신뢰하고 인식 대상과 하나가 되는 인식론이다. 생명의 관계가 아닌 거래와 사업적 관계가 주를 이루어 생명을 생명으로 만나지 못하는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 필요한 인식론이자 신학이다.
3. 한민족의 생명 체험에서 시작하는 신학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은 한민족의 시원(始原)과 뿌리를 밝혀 들어가 우리의 생명 체험과 생명 이해가 어떤 것인지 밝힌다. 한민족은 “수천, 수만 년 전부터 해 뜨는 동쪽, 밝고 따뜻한 나라를 찾아” 한반도까지 이르렀다. 밝고 따뜻한 삶을 추구한 한민족은 동쪽에서 환히 비치는 태양의 광명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예맥(濊貊) 또는 한(韓=桓, 밝음)을 부족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산천과 사람 이름에 많이 쓰이는 ‘白’은 ‘희다’와 ‘밝다’, ‘밝고 따뜻한 햇빛’을 의미하며 ‘배달의 겨레’에서 배달은 ‘밝달=밝은 땅’을 뜻한다. 한민족을 나타내는 말에는 이 땅에서 산 사람들의 근원적 생명 체험과 생명 이해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을 살리는 분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은 우리 속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이자 사랑을 낳는 영이다. ‘셋과 하나’의 묘합을 말하는 삼일(三一) 사상은 기독교가 이 땅에 전파되기 이전에 이미 한국인의 심성 깊이 새겨져 있다. 서구 문명의 위기를 넘어 새로운 문명의 미래를 열어갈 씨앗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이 책은 한민족의 생명 체험을 통해 밝혀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