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역사의 산증인 정진경 목사의 목회여정 60년
한국 목회자들에 관한 씁쓸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크리스천들조차도 이렇게 말한다.
“정말 목회자다운 목회자가 없다!”
이렇듯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몰매를 맞는 지금 ‘목회자들이 멘토로 삼을 만한 사람’은 정말 없는 걸까? 평생을 욕심 없는 목회자로, 자신을 욕하는 사람도 감싸 안는 사랑으로 살아온 신촌성결교회 정진경 원로목사라면 우리 시대의 참된 목회자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목적이 분명하면 길은 열린다》는 1921년에 태어나 현재 88세를 살아가고 있는 정진경 목사의 일생을 조목조목 되짚은 그의 자서전이다. 이 책에는 일제강점기와 공산 치하,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한국 근대사 속에서 굳건히 지켜온 정진경 목사의 신앙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친구 따라 교회 갔다가 부모님 반대하는 예수쟁이가 된 사연부터 사춘기 시절 중생의 체험, 폐결핵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이야기, 부인 곽정옥 여사에 대한 애틋한 사랑, 과거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 그리고 후배 목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등, 지금까지 신문기사와 책에서 쉬이 접하지 못했던 정진경 목사의 진솔한 사연과 신앙 여정이 가득 펼쳐진다.
책에서 볼 수 있는 정진경 목사의 ‘평생 목적’은 많은 목회자들이 바라는 교회 부흥․위대한 목회자․성도들의 존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일평생 주님께 사로잡힌 삶’이었다. 그러한 목적이 있었기에, 그는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가 이 책의 축사에도 썼듯 한국 교회를 위한 신학자로, 목회자로, 교회연합의 지도자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는 모든 사람의 영적 스승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최초 목양지는 1948년 공주성결교회였다. 그리고 마지막 목회지는 1991년 은퇴한 신촌성결교회이다. 약 40년을 목회자로서 현장에 있었고 은퇴 후에도 늘 영혼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된 목회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연합사업, 구호사역 등 평생을 걸쳐 일해 왔던 수많은 일들을 현재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는 자리에서는 그 많은 직함 중 오직 ‘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라는 명함 하나만으로 자신을 내보이는 참된 겸손의 목회자이다. 정진경 목사는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아내 곽성옥과 20대에 만나 만나 지금까지 서로를 훌륭한 남편과 아내로 존경하며 살고 있다. 정 목사의 아내를 비롯해 그를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정진경 목사를 온유와 따스함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강단에서 선포했던 내용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 목회자라고 말한다.
목회자 정진경의 삶의 족적을 출간하게 된 것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목자의 모습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지금의 젊은 목회자들에게 정진경 목사의 삶이 모두의 삶의 지평을 넓혀 주는 등불이 되어 큰 은혜로 다가설 수 있기를 기원한다.
온유의 사람, 정진경
정진경 목사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온유의 사람’이다. 정진경 목사는 《목적이 분명하면 길은 열린다》에서 말씀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참된 온유의 삶을 실천했던 자신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진술했으며, 수년간 알고 지낸 그의 지인이자 전기 작가인 이유진 선생이 목회자 정진경의 삶을 가감 없이 그려냈다.
그는 늘 목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양들에게 상처 주지 않고 참된 사랑과 온유로 다가서고자 애썼다. 그러한 모습은 신촌성결교회의 당회장으로서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났다(28장 참조). 당회의 주요 결정 때마다 그는 무조건 다수를 옹호하지 않았다. 다수의 의견이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의견이 다른 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혹 그 사람의 영혼이 시험 들지 않게 깊이 배려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이 주신 영혼을 귀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나님이시라면 어느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일을 이뤄 가실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방침은 신촌성결교회 건축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물론 교회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의 의견을 합당하게 수용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이러한 민주주의적 목회 방식은 평신도들과 교회의 중직자들이 무조건 담임목사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기도하며 합당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각 주일학교 역시 당회가 모든 결정을 결정하는 하달식이 아닌, 스스로 계획을 세워 나가는 주체적인 민주주의로 점차 변해갔다(19장 참조).
이렇듯 모든 영혼을 주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귀하게 돌보는 온유의 모습은 오래전 신의주 동부성결교회에서 주일학교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섬겼던 18세 청년 정진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더 오래전 그를 따스하게 맞아주었던 안주의 서산리장로교회 주일학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참된 온유의 목회자로 성장시킨 것은 어린 시절, 성정이 불같았던 부모님의 다툼 속에서 부모님의 뜨거운 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났던 소년 정진경을 태초 전부터 사랑하시고 택해 주셨던 참된 주님의 은혜로 인함이었다.
사랑 가득한 목회자, 모든 이의 영적 스승이 되기까지
정진경 목사는 전쟁의 아비규환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고자 모인 사람들을 위해 목회의 끈을 놓지 않았다. 목회 임지를 이동할 때마다 가족의 짐은 달랑 보따리 하나였고, 거주지는 단칸방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정 목사 내외는 단 한 번도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서러워하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은 오직 단 한 번, 청년 시절에 닥쳤던 폐결핵의 병마 앞에서였다. 그러나 그때도 원망과 허무는 잠시요, 다시금 하나님 앞에 죽음까지도 내려놓고 산속에 틀어박혀 기도와 말씀에 정진했고, 그때야 비로소 목회자의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원할 수 있었다.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그는 늘 배움에 대해 목말라했다. 4,50년대 당시 한국의 신학교에서 깊이 있는 신학적 가르침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성결교단 총회는 정 목사를 유학 대상자로 선발하였다. 그러나 교단에서는 아무런 지원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아내의 전폭적인 지지로 단돈 15달러를 들고 미국의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
정진경 목사의 유학생활은 고단했다. 입학하기 전 학비를 벌기 위해 오렌지 농장의 노동자로 일했고, 대학의 배려로 장학금은 받을 수 있었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말에도 일해야 했다. 또 가족들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부쳐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지라, 고국에서 부인이 겪어야 하는 생활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부인은 그저 묵묵히 그가 모든 공부를 마칠 때까지 삼남매를 책임졌다(15장 참조). 이러한 인고의 세월이 있었기에 정진경 목사가 많은 이들의 영혼을 책임지는 사랑의 목회자로, 그리고 또 다른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의 영적 스승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귀국 후, 서울신학대학교에서의 15년간의 세월은 그의 평생 소명이었던 목회와는 다른 길이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목회자로 살기 위해 신학교에 왔어도 확신을 갖지 못해 방황하던 학생들에게 바른 이정표를 제시했던 멘토로서의 삶이었다. 당시 그는 외국에서 공부한 석학들의 가르침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교단 내의 강력한 명령에 순종해 서울신학대학교의 교수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비록 목회에 대한 갈망과, 세월이 어느 정도 흘러 우수한 지식을 지닌 사람들이 대학 강단에 자리 잡음으로 인해 다시금 목회자로서의 길을 갈 수 있었지만, 후학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지지는 지금도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