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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 붓골(筆洞)의 초가에서는 파리 떼가 마당 한구석에 수북하게 모여 있었다. 밭을 매는 남편에게 갖다 주려고 자배기에 기승밥을 담아 머리에 이고 부엌을 나서던 아낙이 가까이 다가갔다. 파리 떼가 날아가니 사람의 발꿈치처럼 생긴 살덩어리가 드러났다. 아낙은 기함을 하고 자배기를 떨어뜨렸다. 붓골 바로 옆 생민골(生民洞)의 한 농가 돼지우리 안에서도 비슷한 살덩어리가 발견되었다. 붓골에서 활 한 바탕 거리의 오래된 은행나무 옆에는 폐포파립의 선비가 두 발꿈치와 오른 손목이 잘린 채 죽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포도청은 난리법석을 떨어야 했다. 그날 오후 좌포도청의 포도부장 남경식(南慶式)이 이양걸을 찾아왔다.
“피살자는 먹절골(墨寺洞) 사는 운관의 관원일세.”
“먹절골? 중들이 먹을 만들어 판다는 그 절이 있는 마을 말인가? 그곳은 좌포도청 소관이지 않나? 그리고 운관이면 교서관이란 말인가?”
“그러니 내가 기찰했지. 교서관 창준인데 체아직이고 이름은 최한길이네.”
포도부장과 종사관의 품계는 같은 종육품이었지만 종사관이 포도부장보다 직급은 높았다. 그러나 좌포청의 포도부장 남경식은 우포청의 종사관 이양걸과 오랜 지기였다.
“빈대이던가? 아니면 모기이던가?”
“남촌이니까 모기가 맞겠지만 이상하게도 그자의 옷깃이 길던걸.”
남 포교가 대답하자, 이양걸이 “그래?”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 노론과 소론의 분쟁이 격렬했다. 숙종은 장씨를 희빈으로 맞아 경종을 낳았고 인현왕후의 무수리였던 숙원 최씨를 맞아 연잉군을 낳았는데,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았고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았다. 경종의 나이 열한 살 때 생모인 장희빈이 사사되자 심한 충격을 받아 그때부터 병약해졌고, 심지어 경종이 고자라는 소문까지 궁중에 퍼졌다. 소론의 세력을 등에 업은 경종이 즉위하자 소론은 노론을 척결하고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왕위를 이을 세자를 정하는 건저 논의에서 노론과 소론은 극명하게 갈라섰다. 노론은 경종이 병이 있으니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장한 반면, 소론은 경종이 아직 젊으니 왕의 아들을 기다렸다가 세자를 삼아야 한다며 노론을 반박했는데, 당시 소론의 맹주는 유봉휘였다. 노론과 소론은 길에서 만나도 서로 모르는 척했으며, 노론은 소론을 모기라 불렀고 소론은 노론을 빈대라 불렀다. 옷깃도 서로 달랐는데, 노론은 옷깃을 길게 하였고 소론은 짧게 하였다. 경종 즉위 시에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은 노론이었고 우의정 조태구는 소론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무게는 점차 소론으로 쏠리고 있던 터였다.
― 84-85면
*
“그런데 궁금한 게 있소. 그 서역에 나타났다던 야소가……, 그의 가르침이 어떻게 중국의 경전과 한자에 있을 수 있다는 게요?”
재서가 이 상황에서 그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힘에 부치는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야소는 희백래(希伯來, 히브리) 민족으로 여덕아국(如德亞國, 유대국)에서 약 1,700년 전에 태어났소……. 그런데 야소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그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여덕아의 예언자와 현인들에 의해 예견되었다고 했소……. 그 민족은 원래 아각포(雅各布, 야곱)란 조상이 낳은 열두 형제가 기원인데……, 아주 오래전에 열 형제의 후손들은 이색렬국(以色列國, 이스라엘)으로, 나머지 두 형제의 후손들은 여덕아국으로 나뉘게 되었소. 그런데 이색렬국은 야소가 태어나기 721년 전에 아서리아(亚西利亚, 앗시리아)라는 왕국에 의해 망하고 그 열 형제의 후손들은 동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소……. 희백래 민족의 일부는 야소 탄생 약 700년 전부터 중국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그 시기는 중국의 경전이 작성되기 전이오. 이들은 미새아(弥赛亚, 메시아)라 불리는 구원자의 도래를 알고 있었고, 마서(摩西, 모세)라는 그들의 조상이 만든 다섯 가지 경전(모세오경)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오. 중국의 경전과 고전, 공자의 주석서, 역사, 철학, 종교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이들 희백래인들의 규범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소.”
― 110면
*
선무문 동편에 있는 남천주당은 사관에서 열 마장이 채 안 되는 거리였지만, 활기로 가득 찬 연경을 완상하기에는 충분했다. 한양에 비해 폭이 넓은 길을 사이에 두고 단청한 여염집들이 즐비하고 네거리 시전들도 금칠한 집이 무수했다. 길가에 늘어선 점포와 술집에는 무늬를 새긴 창문과 수를 놓은 문이 눈에 띄었다. 또한 점포가 늘어선 거리로 여러 종류의 수레가 있었다. 어떤 수레는 빨리 달리고 있었는데 재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태평차라고 하우. 바퀴 높이는 팔꿈치에 닿을 정도로 높고, 바퀴살은 서른 개지요. 대추나무로 바퀴테를 만들고, 철판을 바퀴에 두른 다음 쇠못을 박아 고정하우. 바퀴 위에 둥근 가마를 올려 세 명 정도는 탈 수 있지요. 저기 짐을 실은 수레는 대차라고 하우. 태평차보다 바퀴 높이는 조금 낮고, 짐이 팔백 근일 때는 말 두필을 매고, 팔백 근이 넘으면 말 수를 더 늘리는 거라우. 대차는 굴대가 회전하는데 두 바퀴가 똑같이 둥글어서 고르게 회전하기 때문에 빨리 달릴 수 있다우……. 저기 왼쪽에 사과, 떡, 엿을 파는 장사치들이 보이지요? 모두 독륜거라는 외바퀴 수레를 이용하우. 독륜거는 뒤에서 한 사람이 끌채를 겨드랑이에 끼고서 밀고 가지요. 끌채 아래에 짧은 막대가 양쪽으로 드리워 있어서 갈 때는 끌채와 함께 들리고 멈출 때는 바퀴와 함께 멈추는데, 버팀목 역할을 하기 때문에 수레가 쓰러지지 않는다우……. 여기서 사과와 절편을 조금 사서 가지요.”
“지금까지 삼천리 길을 오면서 날마다 많은 수레를 보았네. 조선에도 수레가 없지는 않으나 바퀴 자국이 한 궤도를 그리지 못하는데 비해, 여기는 앞 수레와 뒷 수레가 같은 바퀴 자국을 따라가더구만……. 중국의 풍족한 재화가 골고루 유통되는 것은 수레를 사용하는 까닭이라는 생각이네. 조선에서 영남의 어린아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의 백성들은 장 대신 산사자(산사나무의 열매)를 담가 먹지 않는가. 내포의 생선과 소금, 관서의 명주, 영호남의 닥종이, 해서의 솜과 철 같은 것은 모두 백성들의 생활에 필요한 일상용품인 까닭에 서로 유통시키지 않으면 안 될 걸세. 이곳에 흔한 물건이 저곳에서는 귀하기만 하고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은 실어 나를 방도가 없기 때문 아니겠는가?”
―144-146면
프롤로그
1장
2장
3장
4장
5장
에필로그
작가의 말
이종화
62년 대구 출생. 학부에서 불문학을 공부했고 프랑스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를 마친 후, 현재 대학에서 국제통상을 가르치고 있다. 수년 전 유교 경전을 읽다가 그 내용이 성경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데 주목했다. 혹시 고대 중국과 유대인들과의 교류가 있었는지 자료를 찾다가 프랑스인 신부 프레마르[중국명 馬若瑟(마약슬), Joseph Henri De Prémare, 1666-1736]의 《Vestiges des Principaux Dogmes Chrétiens Tirés des Anciens Libres Chinois》(중국의 고전에서 뽑은 기독교 주요 교의의 흔적들)이란 책을 읽게 되었다. 프레마르 신부가 1725년에 라틴어로 완성한 수사본을 약 150년 후인 1878년에 두 명의 프랑스인 신부가 불역한 것이 이 책이며 그 주요 내용은 한자와 경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라는 기독교의 진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사역하며 30년 넘게 경전을 연구한 끝에 책을 완성했으나, 신부는 필생의 역작인 자신의 저서가 출간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오로지 중국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평생을 헌신한 신부의 삶과 열정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만 5년에 걸쳐 신부의 책을 번역했다. 신부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그 시기는 조선의 사신들이 서양 문물을 습득하기 위해서 북경 천주당을 왕성히 드나들던 때였다. 만약 그 책이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에 전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상상하며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를 구상했다. 우치무라 간조의 신실함, 도스토옙스키의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 니체가 도달한 지성 최고의 경지, 카잔차키스가 갈망한 영혼의 자유를 사랑한다. 내 정신세계의 스승들에게서 배운 이와 같은 요소가 소설에서 조금이나마 표현되었기를 바란다. 신부의 책 내용대로 한자와 경전에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이 예견되어 있고, 따라서 유교문화권 전역에 신인(神人)이신 그분을 통한 구속이 오래전부터 예비되어 있었다면, 이 경이와 신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사야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