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기도하는 구도자의 노래,
자연과 현실, 영원과 보편의 세계!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靑鹿派) 시인의 한 사람이며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대해 봤음직한 시들로 기억되어 있는 혜산(兮山) 박두진(1916~1998). 한국 시사(詩史)에서 ‘참시인 중의 참시인’으로 손꼽히는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 5․18 등 우리 근현대사의 격변의 시기를 함께해 오면서 시대의 암울한 고뇌 속에서 조국과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시어로 형상화했다. 그의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 많지만, 그 시들에 담긴 자연의 이미지와 강한 생명력은 일상의 삶과 질서 그리고 현실 초극의 의지를 담아냈으며, 내면의 성찰을 보여 주는 신앙의 고백으로 향하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이 책은 시인 박두진 탄생 101주년을 맞아 홍성사가 출간하는 박두진 시 전집(전 12권) 가운데 첫 권으로, 《해》(1949), 《午禱(오도)》(1953), 《인간밀림》(1963)에 실린 9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시집이 실린《박두진 전집1―詩Ⅰ》(범조사, 1982)을 토대로, 내용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판형과 표지·내지 디자인에 담았다. 오늘날 시집의 일반적 형태인 가로쓰기와 달리 원문의 맛과 분위기를 살린 세로쓰기로 조판했으며, 원문에 표기된 한자어 가운데 일부는 한글로 표기했고, 일부는 괄호 안에 독음을 표기했다.
거친 근현대사를 누구보다 치열하고 정직하게 살아간 구도자적 시인. ‘있는 그대로의 산’이라는 호[혜산兮山]처럼, 삶과 시가 이루어간 큰 산에 담긴 그의 체취와 음성은 척박한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힘과 위안이 되어 준다.
이 책에 담긴 시들
《해》에는 해방 직후의 작품과 초기의 대표작 등 3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80년대 가수 조하문이 부른 노래로도 유명한 시 <해>는 이 시집의 핵심적인 시적 실체를 이루는데, 해를 비롯하여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의 중요한 소재이자 배경을 이루는 자연물은 일제 치하의 암담한 현실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들 자연이 지닌 생명력과 자연 법칙에 대한 믿음은 현실을 넘어서며 다가올 역사의 아침에 대한 희망찬 기다림으로 이어지며, 그러한 기다림과 간절한 바람이 은유적으로 담겨 있다.
《午禱(오도)》는 대부분 대구 피난 시절에 쓴 작품들로 되어 있으며, 격변하는 역사적 추이를 투시하고 시련을 감내하려는 의지적 자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빛과 어둠, 현실과 이상, 죽음과 부활, 억압과 해방 등,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 하나로 통합되는 평화의 세계에 대한 추구와,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어 소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고, 내면의 성찰을 보여주는 신앙 고백도 엿볼 수 있다.
《인간밀림》은 대부분 1961-63년에 쓴 시들로, 4․19, 5․16의 체험을 토대로 당대 사람의 보편적인 정서와 가치관이 집약되어 있다. 학자들은 이 시기 박두진의 시세계가 이전과 다르게 전개되는 것에 주목하는데, 영원하고 보편적인 가치체계에 대한 갈망을 자연물을 매개체로 하거나 상징물로 하여 노래한 점이 두드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