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기도하는 구도자의 노래,
현실에 맞서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아내다!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靑鹿派) 시인의 한 사람이며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대해 봤음직한 시들로 기억되어 있는 혜산(兮山) 박두진(1916~1998). 한국 시사(詩史)에서 ‘참시인 중의 참시인’으로 손꼽히는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 5․18 등 우리 근현대사의 격변의 시기를 함께해 오면서 시대의 암울한 고뇌 속에서 조국과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시어로 형상화했다. 그의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 많지만, 그 시들에 담긴 자연의 이미지와 강한 생명력은 일상의 삶과 질서 그리고 현실 초극의 의지를 담아냈으며, 내면의 성찰을 보여 주는 신앙의 고백으로 향하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이 책은 시인 박두진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홍성사가 출간하는 박두진 시 전집(전 12권) 가운데 둘째 권으로, 《거미와 성좌》(1962) 에 실린 49편의 시 및 그 이전 시집들의 연대에 해당하는 미수록된 시 33편이 실려 있다. 이들 시집이 실린《박두진 전집 2―詩Ⅱ》(범조사, 1982)를 토대로, 내용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판형과 표지·내지 디자인에 담았다. 오늘날 시집의 일반적 형태인 가로쓰기와 달리 원문의 맛과 분위기를 살린 세로쓰기로 조판했으며, 원문에 표기된 한자어 가운데 일부는 한글로 표기했고, 일부는 괄호 안에 독음을 표기했다.
거친 근현대사를 누구보다 치열하고 정직하게 살아간 구도자적 시인. ‘있는 그대로의 산’이라는 호[혜산兮山]처럼, 삶과 시가 이루어간 큰 산에 담긴 그의 체취와 음성은 척박한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힘과 위안이 되어 준다.
이 책에 담긴 시들
《거미와 성좌》에는 6․25, 4․19와 5․16에 이르는 약 10년 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시련과 역사적인 변혁기를 배경으로 한 시들이 실려 있다. ‘해’를 비롯한 자연물을 소재로 천상적(天上的)이고 초월적인 시세계를 담은 초기 시에 비해 지상적(地上的)이고 현실에 밀착된 시세계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시인의 말대로 ‘어둡고 악에 차고 모순투성이고 죄에 찬 생생한 오늘의 세계로 내려와서’ 현실과 정면대결하고 부조리를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표출되어 있으며, 어조도 이전에 비해 격정, 분노, 항변으로 바뀌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대표작 <거미와 성좌>는 거미의 생태를 통해 고통스런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집요한 삶의 의지를 그려 낸 것으로, 이러한 시인의 의식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이 시집에는 신앙고백시라 할 수 있는 시들도 있는데, 죄인인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며 속죄와 구원을 갈구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반성과 자기부인, 신에 대한 갈망과 온전한 맡김 등을 통해 삶과 죽음을 비롯한 인간 세계의 모순과 대립, 갈등과 고통을 승화시키려는 바람이 담겨 있다. 각 시집 연대 미수록 시는 《청록집》(1946), 《해》(1949), 《午禱(오도)》(1953), 《거미와 성좌》(1962)의 출간 연대를 전후하여 신문, 동인지, 잡지를 비롯한 매체에 발표되었으나 시집으로 엮어지지 않은 작품들이다. 특히 일제 말기 대표적인 문학지인 《문장》에 실렸던 시들은 데뷔 직후인 20대 중반의 시세계를 보여 주며, 그 외의 시들은―이 시 전집 1권에서 보았듯이―자연을 노래하는 가운데 진솔하고 소박한 내면을 담백한 시어로 담담하게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