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여운을 남기는, 본회퍼의 지성과 열정, 영성이 담긴 묵상집
이 책은 본회퍼의 묵상, 설교, 연구서, 편지, 기도와 시, 비망록 등에서 영성이 넘치는 글들을 발췌한 묵상집이다. 교회력을 따르며 주제에 따라 월별로 묶어 하루하루 1년간 묵상하도록 엮었다.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라는 본회퍼의 실천적 통찰과 가르침은 현실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고 종교성만 추구하는 나약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올곧게 붙드는 강인함을 길러 준다.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 생각이 실천으로, 삶으로 이어지게 한다.
이상적 인간이 아니라 현실의 인간을 사랑하라
현실, 책임, 죄책, 대리라는 말은 본회퍼가 특히 많이 쓴 말들이다. 즉 이 용어들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데 본회퍼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신 것은 추상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행하기 위함임을 그는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이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현실의 인간을 사랑하여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죄책)을 지길 원하셨고,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과 고난을 친히 감당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한 대리적 책임 속에서 현실의 인간을 위한 사랑 때문에 죄책을 짊어지셨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어 간다는 말은 영웅이나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참 인간, 현실의 인간이 됨을 의미한다. 이는 꿈이나 환상, 소원에 취해 사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으면서 하루의 일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환상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흐리게 하고 세상을 자신의 소원과 편견의 눈으로 보며 세상을 우상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애로 흐려지고 왜곡된 우리의 시각을 바꿔 주어 이웃과 세상의 진정한 현실이 어떠한지를 분명히 보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에게 진정한 책임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실로 부름 받았으며, 현실을 도피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책임 있게 살아 내야 하는 것이다.
“이날들을 그대들과 더불어 살고 싶습니다.”
이 구절은 1944년 말에 감옥에서 쓴 시 ‘선한 힘들에 감싸여’의 한 구절인데, 이 책(독어판 원서)의 제목이 되었다. 한국어판에서는 부제로 넣었다. 본회퍼는 1943년 1월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하고 3개월 후에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기 때문에 그의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본회퍼가 감옥에서 쓴 이 시를 읽으면 본회퍼의 간절한 소망이 더욱 가슴에 다가오며,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쓴잔이라도 받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그리스도를 닮은 신앙이 전율하게 한다.
본회퍼는 사형장으로 가면서 동료 수감자들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가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또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세상에서는 사랑을 이길 수 있기에 세상에서만 강하지만, 사랑은 영원히 강합니다.”
선한 힘들에 감싸여
선한 힘들에 감싸여 신실하고 고요하게
놀라운 위로와 보호 아래서
이 날들을 그대들과 더불어 살고 싶습니다.
그대들과 더불어 다가오는 새해를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지난해가 여전히 우리 마음을 괴롭히려 들지만
악한 날의 무거운 짐이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지만
오, 주님. 우리의 겁먹은 영혼에 구원을 베푸소서.
그 구원을 주시려 우리를 만드셨사오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거운 잔을 건네신다면
가득 채워진 슬픔의 쓴잔을 건네신다면
주님의 선하신 사랑의 손에서
떨지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 세상의 찬란한 태양 빛 아래에서
다시 한 번 기쁨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중략)
선한 힘들에 둘러싸여 경이롭게 보호받으며
우리에게 다가올 것을 확신하며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밤에도 아침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매일 새로운 날에도 함께하심을 확신합니다.
_본회퍼가 1944년 성탄절 전에 지하 감옥에서 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