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 이슈와 신앙 간의 대화를 도모하는 〈아고라 시리즈〉. 이 시리즈의 네 번째 도서 《불신지옥을 넘어서》는 ‘불신지옥’이라는 건드리기 힘든 교리를 지적·양심적으로 성찰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논쟁적 책이다. 저자는 한국의 기독교 교단 중에서 보수적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고신 교단 소속의 목회자이다. 언급하기 어려운 ‘불신지옥’ 교리에 저자는 왜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비판받는 이유의 핵심에 교조화된 ‘불신지옥’ 교리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를 부정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에도 세월호(2014년), 씨랜드(1999년), 김대두 사건(1975년), 일제강점기 징용자들, 동학농민운동의 희생자 등 저자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 특히 희생된 아이들이 과연 지옥에 가는지 정직한 물음을 던진다. 교조화된 ‘불신지옥’이 과연 성경적인지 도전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2. ‘불신지옥’은 성경적인가?
《불신지옥을 넘어서》는 총 4장에 걸쳐 교조화된 ‘불신지옥’ 교리가 만들어 낸 현실과 성경적 타당성, 불신자의 구원의 가능성, 실천적 적용을 탐구한다. 1장에서는 ‘불신지옥’ 교리를 교조적으로 적용할 때 생기는 부조리(살인자는 천국에, 피살자는 지옥에)를 탐구한다. 2장에서는 ‘지옥’의 개념을 성경적으로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영혼들이 고통받는 장소가 아닌 세상 끝 날에 몸과 영혼이 함께 심판받는 장소로 지옥을 제시하고, ‘음부’와 ‘게헨나’를 ‘지옥’으로 뭉뚱그려 이해한 문제도 지적한다. 3장은 가장 논쟁이 될 만한 부분으로 불신자들의 구원 가능성을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찾는다. 그 가능성의 실마리는 놀랍게도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를 돌아봄’이다. 4장은 3장까지의 논의에 따라 교회가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탐구한다. 저자는 불신자들과 함께하는 소그룹 활동이라는 파격적 방법을 제안한다.
3. 불신자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은 있는가?
《불신지옥을 넘어서》의 관심은 목회적․선교적 현실까지 닿아 있다. ‘불신지옥’ 교리를 교조적으로 고수할 때 불신자 가족을 먼저 보낸 신자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목회적 문제의식이다. 동시에 영혼구원이라는 전제 앞에서 사회적 실천 역시 힘을 잃고 만다는 선교적 차원의 문제의식도 깔려 있다. 단순한 지적 호기(豪氣)가 아니라 목회 현실, 선교 현실을 고민하는 저자의 고뇌는 이 책의 주장에 반대하는 독자라 할지라도 그 문제의식까지 거부하기는 어렵게 만든다. 저자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섬기고 영접함이 그리스도를 섬김과 영접함으로 최후의 심판 때 인정되어 영생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며 불신자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주장이지만 저자는 성경적 근거를 제시함은 물론, 이러한 주장이 가져올 현실적 결과까지 고민하며 성숙하게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
서성광
1974년 부산 출생. 모태신앙으로 주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 그날은 공부 한 번 한 적 없는 보수적인 풍토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때 목사가 될 것을 서원했고 그에 따라 고신대 신학과에 입학, 2007년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부교역자로 10년 넘게 사역하면서 별 불협화음 없이 전통 교회에서 목회를 해왔다. 그러나 10대 이후부터 내면에서는 조국 교회의 현실과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슬픔과 치열한 고민이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복음주의의 핵심 가치를 지키면서도 전통을 그대로 답습할 수 없는 제안을 조국 교회에 던지고 싶었다. 2016년부터 분당구 이매동에 ‘영광의 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하고 있다.
이메일 hollyssk@naver.com
영광의 교회 cafe.naver.com/churchglory
차례
프롤로그
1장 불신지옥이 낳은 현실에서 2장 성경은 과연 불신지옥인가? 3장 마태복음 25장 —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다 4장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에필로그 주 부록
책속에서
못다 핀 어린 청춘들의 죽음 앞에서 겹쳐지는 사건이 또 있다. 바로 1999년의 씨랜드 참사이다. 19명의 유치원생들이 화염 속에서 “엄마! 아빠! 선생님! 살려 주세요”라고 울부짖으며 불길이 번지는 방의 창문가에 모여 얼싸안고 죽었다는 소식을 신문기사로 접했을 때, 나는 할 말을 잃었고 목이 메어 눈물만 흘렸다. 그러나 눈물 속에서도 나에게 떠오르던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이 아이들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였다.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19명의 아이들이 모두 교회에 다니거나 세례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중 몇 명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아이들은 지금 지옥에 있는가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복음주의는 과연 아이들의 죽음 이후 운명에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_1장 불신지옥이 낳은 현실에서, 18-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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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옥을 부인하지 않는다. 성경에 등장하는 지옥 자체를 부인하며 “지옥은 없다” 말하는 것은 인간의 바람일 수는 있어도 성경이 말하는 바는 아닌 것 같다. 나는 만인구원론자도 아니다. 결국은 모든 사람이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성경 말씀을 볼 때 동의되지 않는다. 나도 복음을 전할 때 죄는 하나님과 영원한 단절, 즉 지옥을 가져오니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생을 얻으라고 말한다. 다만 내가 반대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다 지옥에 갔고 지옥에 간다”고 확정하는 불신지옥의 교조화이다. 예수님은 지옥을 이런 뜻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그것은 바울이나 요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_2장 성경은 과연 불신지옥인가?’, 7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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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은 물론 실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최후의 심판 때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섬긴 것을 자신을 사랑하고 섬긴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의 비유가 말하는 바이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 25장과 다른 본문은 충돌하지 않는다. 이 가능성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라는 진리와 배치되지 않는다. ‘이신득의’는 이 세상에서 얻는 총체적 구원의 과거성과 현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마태복음 25장은 이 세상 너머의 미래적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은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진리와도 충돌하지 않는다. 내가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믿음 없는 모든 사람들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명제를 논리적으로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심판 비유가 불신자의 구원에 대해 제시하는 이 가능성은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은 믿지 않아도 천국 갈 수 있다’는 복음주의자들의 통념보다 훨씬 하나님의 은혜 중심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가능성이며 적어도 누가복음 10장과 마태복음 25장에 성경적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성경적인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