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바리새인은 위선자의 대명사다. 한국 교회에서 바리새인은 환영받지 못한다. 애초에 ‘악하고 구제 불능’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을 욕하고 그들과 거리를 둔 대가로 그리스도인은 그들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고, 깊은 교훈을 얻지 못했다. 《불편한 진실, 내 안의 바리새인》은 바른 교리와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의에 빠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교묘히 거역하는 그리스도인의 자화상이다. 모범적인 기독교인으로 자라 스물세 살에 아프리카 선교사로 간 저자는 마태복음에 나온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바리새인의 실체가 명확히 규명되어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저자를 포함해) 우리 자신이 바리새인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은 흔히 딴 세상에 사는 사람들로 취급된다. 나만은 바리새인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바리새인을 통해 우리의 참 모습을 보여 준다. 바리새인을 제대로 바라보면 우리의 모순을 깨닫는 은총을 누린다. 화려한 기독교적 배경이 있어도 좋은 열매를 못 맺고(4장), 의롭게 살려다 자기 의에 빠지며(5장), 바른 교리를 고수하지만 사랑은 없고(6장), 공적 모습과 사적인 모습이 다른 모습(7장), 성경보다 전통이 사역에 영향을 더 미치며(8장), 복음을 지킨다면서 자유를 싫어하는 우리(9장), 세상과 구별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은 못 닮는 우리(10장), 영적으로 건강하다면서 어느 날 갑자기 넘어지는 우리(11장) 등에서 회복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본다.
2. 종교가 아니라 관계다
바리새인은 선한 사람들이다. 성경을 연구하고 이를 삶에 적용하려 했던 그들의 훈련된 삶, 청지기 정신, 선교 마인드는 지금도 귀감이 될 만하다. 세속 문화의 위협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들의 동기는 순수했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고, 직장 동료며, 정직한 시민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불편하게 했다. 바른 교리를 믿으면서도 하나님께 무관심하고 사람들에게 무자비했기 때문이다. 거듭난 삶이 아니라 종교인으로 살았기에 예수님과 부딪쳤던 것이다. 자기 의에 빠져 있으면서 타인을 무시하는 것이 바리새인의 특징이었다.
저자는 바리새주의에서 벗어날 방법을 빌립보서 3장에서 찾는다. 이 장은 빌립보 교회 신자들을 유대교 개종주의, 즉 율법적 가르침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쓴 것이다. 바울은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거짓 할례를 삼가야” 한다고 썼다.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해답은 종교가 아니라 관계에 있다. 저자의 말대로 “진짜 기독교처럼 포장된 종교적인 대안은 언제나 존재한다”. 복음에 다른 것을 섞거나 종교를 피상적으로 만든 거짓 종교를 경계하고, 종교적 행위를 의지하지 않으며, 경주하는 선수처럼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를 추구할 때 희망이 있다.
※ 바리새인은 언제 나타났나
바리새파는 신구약 중간기에 처음 출현했다. 말라기와 예수 탄생 사이의 4백여 년간은 외세의 통치를 받는 시기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주전 336~323년간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해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면서 그리스 문화, 문학, 제도, 오락, 사상, 지명, 동전, 언어가 유입되고 유대인의 정체성은 위협당한다. 알렉산더의 사망 후 프톨레마이오스(주전 301~198) 왕조의 통치하에서 잠시 종교적 자유를 누리지만 주전 203년경 안티오쿠스 3세의 침입으로 자유는 끝나고 이후 1세기 이상 셀레우코스 왕조가 다스리면서 이스라엘의 자치권이 축소되고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이 본격적으로 유입된다. 바리새파가 그들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정립한 때가 이 시기였다.
이후 에피파네스 즉 안티오쿠스 4세(주전 175~164)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대제사장직을 하사하면서,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인 유대인과 정통 유대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그의 정책은 정통 유대교 신앙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마카비 혁명으로 이스라엘은 잠시 독립을 쟁취하는데 마카비 가문의 알렉산더 얀네우스 왕(주전 103~76)은 바리새파를 멀리하고 멸시한 인물이었다. 그의 사후,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더(주전 76~67)가 남편의 유언을 받들어 바리새파와 손을 잡는 정책을 펼치면서 바리새파는 사회, 종교, 사법적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황금기를 맞게 된다.
저자
톰 허베스톨
톰 허베스톨 목사는 현재 미국 콜로라도 주 롱몬트에 있는 갈보리 교회에서 21년째 사역하고 있다. 엄격하면서도 사랑이 많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규칙에 잘 따르는 착한 아이로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율법주의에 빠졌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율법주의 또는 자격증으로 인식되는 경향이나 성경 이외의 새로운 규칙이 생기는 것에 상당히 민감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갈 5:1상)라는 말씀에 따라, 기독교인은 성경과 성령으로 균형을 맞추어 ‘자유로운 외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휘튼 칼리지(Wheaton College)와 트리니티복음신학대학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을 졸업했으며,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 있는 미션 스쿨에서 3년간 교사로 봉사했다. 아내 캐리와의 사이에 다섯 자녀를 두었고 두 명의 손주가 있다. 2010년 8월, 바리새인을 다룬 두 번째 책인 《영적 프로필》(Spiritual Profiling: How Jesus Interacted with 8 Different Types of People and Why It Matters for You)을 출간했다.
역자
이경미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 기획자, 편집자, 웹 콘텐츠 기획자로 일했다. 에든버러 페이스미션 신학교에서 선교 신학을 공부했고, 런던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휴학하고 육아에 전념했다. 현재는 럼턴 대학교에서 아동문학 석사 과정 중이다. 번역서로 《분별력》(엔크리스토), 《주니어 백과사전》(공역, 한국헤밍웨이)이 있다.
차례
1 모범적인 기독교인 2 의로운 사람들 3 내 친구, 바리새인 4 충격 요법이 필요할 때 5 성경 지식이 문제다 6 경건 전문가들 7 전례가 없는 일이야 8 울타리 지키기 9 세상과 너무 구별된 사람들 10 우리는 천국 사수대 11 영적 건강의 길 12 종교로 구원받을 수 없다
부록 1: 바리새파의 기원 부록 2: 바리새파 연구 자료 부록 3: 화근이 된 영적 열매
주 옮긴이의 말
책속에서
기독교인은 종종 자신의 뜻과 가치, 심지어는 문화까지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광신도 집단으로 그려지곤 한다. 또 걸핏하면 트집 잡기 좋아하고, 편견이 심하며, 밴댕이 소갈머리에다가, 무식하고, 바른 소리만 또박또박 해대며 한동네에서 살기에는 왠지 껄끄러운 이웃으로 묘사된다. 기독교인은 또 인종차별주의자와 뭉치고, 무식한 보수 우익과도 한편 먹고, 분리주의자와 동맹을 맺고,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 힘을 실어 주며, 낙태 시술소 폭파범과 함께 행동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경멸당하고, 편견 어린 시선을 받고 무시당한다. (중략) 대중문화가 인지하는 이런 캐리커처는 현실을 왜곡한 것이며, 우리는 여기에 분노한다. 그러나 이러한 캐리커처의 역사를 우리도 이어 간다는 사실은 쉽게 잊는다. ― 27~28쪽 의로운 사람들
바리새인의 뿌리를 역사적으로 본다면, 오늘날 근본주의 복음 전도 운동의 전조였던 종교개혁과 두드러지게 닮았다. 성직자와 유대 문화가 세속에 급속히 물들면서, 경건한 평신도(‘경건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입은 사람으로서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재천명하고 나섰다. 그들은 “성경으로 되돌아 갈 것”을 외쳤다. 이러한 성경적 순수성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를 위해 새로운 모임 장소를 세웠는데, 그 중심은 ‘성경 공부의 집’, 즉 회당이다.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꼼꼼하게 성경을 공부했고 이를 삶에 두루 적용하려고 했다. 이들이야말로 성경에 근거한 교육을 철저히 실천한 권위자들(기독교 교육을 강조한 선구자)이다. 바리새인은 제사장과 서기관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이 율법을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큰 책임을 진 사람들이다. 바리새인이야말로 ‘만인제사장주의’를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오늘날 종교적 보수주의자라면 누구든 바리새인의 이런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지 모른다. ― 33쪽 의로운 사람들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영적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로서 예수님이 쓰신 방법을 가장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은 아마도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25‐7)일 것이다. 이 유명한 비유를 우리는 가끔 잘못 이해하거나 적용한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성경 해설자들과 주석자들이 이 불후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배경은 무시한다. (중략) 오늘날이라면 예수님은 선한 동성애자나 뉴에이지 음악 애호가 비유를 들려줬을 법하다 ― 79~81쪽, 충격 요법이 필요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