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에 태어난 새신자반은 14살 되던 2008년에 개정판으로 거듭났습니다. 개정판 서문에서 밝혔듯이, 1994년 사정상 단 2주 만에 탈고해야 했던 새신자반의 내용을 새롭게 가다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27살을 맞은 올해, 개정2판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작년에 온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두된 온라인예배 및 온라인교회와 관련하여, ‘교회’ ‘예배’ ‘교회생활’의 내용을 보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올해 27살인 이 책의 수명이 언제까지 갈는지는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생명이 있는 동안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의 심령 속에, 죽음을 깨트리고 다시 사신 주님의 생명이 날마다 넘쳐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_ ‘개정2판을 내며’에서
P. 45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으시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이기고 기뻐하는 하나님이라면 참된 하나님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에 연약한 인간에게 늘 져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항상 인간에게 응답해 주시는 까닭이다. 그대 같으면,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도 몇 번이나 계속해서 그의 청을 들어주겠는가? 친구가 같은 청을 세 번만 반복한다면, 그대는 필시 그를 더 이상 쳐다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청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가? 하나님을 향해 입만 열면 요청이요, 요구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시도 때도 없이 거듭되는 우리의 요청을 묵살하시지 않는다.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신다. 왠지 아는가? 우리의 모든 뻔뻔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져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_ ‘1. 하나님은 누구신가’에서
P. 175
주님께서 같은 장소에서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돈을 주시지 않았다. 그들에게 높은 지위를 약속하신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주님을 좇아 나섰다. 그들이 대단한 결단력의 사람들이어서인가? 아니다. 주님의 말씀이 ‘부르시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사울은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여 투옥하던 박해자였다. 그 정도라면 그의 자아가 얼마나 강했겠는가? 그런 사울이, 그를 부르시는 단 한 번의 주님의 음성에 주님을 좇아 나섰다. 말씀의 ‘부르시는 능력’ 때문이다. _ ‘5. 성경이란’에서
P. 221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제도도 아니다. 교회는 ‘사람들’이다. 2020년 삽시간에 온 세계를 삼켜버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온라인예배가 보편화되자, ‘예배는 반드시 교회에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교회’를 ‘예배당 건물’로 오인해온 한 탓이다.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사람들’, 즉 ‘우리 자신’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온라인교회들이 세워지고 있는 것 역시, 교회가 예배당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이기에 가능하다. 사람들의 모임은 온라인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사람들’이기에 교회가 타락했다면 그것은 건물이나 제도가 썩었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인 우리 자신이 부패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교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다운 교회이기 위하여, 교회된 우리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가꾸어 가야 하는가? _ ‘7. 교회란’에서
P. 296
온라인예배와 온라인교회에 부정적인 분들은 온라인을 통해서는 성도들의 만남, 즉 성도들의 거룩한 교통이 불가능하다고 비판한다. 그분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 10:25)이다. 하지만 온라인은 성도들의 교통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용이하게 해준다. 예배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교통은 시간 및 거리상 여러 제약이 따른다. 그러나 온라인상에서는 그 어떤 제약도 없다. 언제 어디서든 필요할 때마다 온라인을 통해 서로 교통할 수 있다. 동일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은 온라인뿐 아니라, 직접 대면하여 성도의 교통을 나눌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_ ‘9.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