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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선교사 열전

11,700

발행일 2005.10.21.
상세정보 / 272page
ISBN 978-89-365-0699-4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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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중고등부·청장년부의 선교유적 탐방서로 추천!
– 개정 출간기념 ‘양화진 영상과 저자 인터뷰, 사진 자료를 담은 DVD’ 무료 증정(한정판)

격동의 역사·버려진 역사·복원된 역사 속에서 옛 선인(先人)들을 만나다

격동의 역사 속으로 : 언더우드, 아펜젤러, 베델, 헐버트, 벙커, 베어드, 무어, 홀…… 미지의 땅 조선, “그곳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정을 받치고 목숨을 다했던 선교사들.
격동의 구한말을 한민족과 함께했던 선교사들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풍토병과 과로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젊음을 바쳐 복음의 열정을 뿌렸던 그들. 그리고 죽어서까지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한 줌의 흙으로라도 남기 바랐던 그들을 품고 있는 양화진 외인묘지. 그네들의 치열한 선교 현장을 체감할 수 있는 한국 기독교 역사의 발자취가 여기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버려진 역사를 찾아서 : 한국 기독교 역사의 산 증인인 오리 전택부 선생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조금 특이하다. 원래부터 글을 쓰려고 구상했거나 자료를 모아 준비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 책은, 1978년 서울시에서 발표한 ‘제2한강교 진입로 및 전철 제2호선 공사 계획’에 양화진 외인묘지가 거침돌이 된다하여, 묘지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발표가 나면서 시작된 싸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의 선한 중심을 들어 쓰셨다. 2년여에 걸쳐 신문에 연재된 ‘양화진 외인열전’은, 흐릿한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잘못을 바로잡는 밑거름이 되었다. 놀랍게도 서울시가 도시 계획을 전면 수정하면서, 양화진은 그 역사의 자리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폐허처럼 버려져 있던 양화진 묘역에 대한 기독교계의 관심이 모아지면서 실질적인 양화진 관리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복원된 역사 앞에서 : 2001년부터 마포구에서 실시한 ‘양화진 성지 공원화 사업’이 2005년 봄에 마무리되면서, 이제 양화진은 가톨릭의 ‘절두산순교성지’와 개신교의 ‘서울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으로 한국 기독교계의 중요한 선교유적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복원되고 다듬어진 역사의 현장 앞에서, 이제 우리는 이 유적지가 전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양화진 묘역을 돌 때마다, 치열했던 그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순례자의 심정으로 믿음의 선배들이 남기고 간 열정의 ‘그’ 도에 대해 올바르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원래 신문에 연재되었던 ‘양화진 외인열전’을 1986년 《이 땅에 묻히리라》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 양화진 묘역과 절두산을 잇는 성지 공원이 새롭게 조성되는 시기에 《양화진 선교사 열전》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펴내게 되었다. 1978-80년 양화진의 존폐 위기 상황에서 양화진을 지키고자 애쓴 분들의 노고를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양화진과 한국 기독교 역사에 새롭게 관심 갖는 새 시대 독자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담아낸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새롭게 다듬어서 개정 출간하게 된 것이다.

★초판 《이 땅에 묻히리라》 발행일: 1986년 9월 10일
★개정판 《양화진 선교사 열전》 발행일: 2005년 10월 21일
★초판 《이 땅에 묻히리라》 표지

저자

전택부
호는 오리吾里. 1915년 함경남도 문천 출생. 1940년 도쿄 일본신학교 예과를 졸업하고 1941년 같은 신학교 본과를 중퇴했다. <월간 새벗>과 <사상계>의 주간을 지냈으며, 소천 아동문학상 운영위원장, 서울 YMCA 총무 및 명예총무, 한글전용국민실천회 회장, 한글인터넷추진 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58년 이후 <기독교사만필>, <토박이신앙산맥>, <양화진외인열전> 등을 신문에 연재하면서 사건 현장을 중심으로 한 교회사 연구에 정진하였고, 한국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을 토박이 신앙인의 신앙역사로 보려는 ‘토박이 사관’을 새롭게 시도하였다. 한글 운동을 한 공로로 1978년 문교부 장관 표창, 1980년 외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부부의 십계명》《가정의 뜻, 금혼잔치 베풂의 뜻》(이상 홍성사), 《월남 이상재의 생애와 사상》(연세대학교 출판부), 《두산 김우현 목사 그 신앙과 사상》(기독교문사), 《토박이 신앙산맥 1,2,3》(대한기독교서회), 《한국 기독교 청년회 운동사》《씨알머리 없는 세상》《자화상을 그리듯이 1,2,3》(이상 범우사) 등이 있다.

차례

프롤로그 – 양화진 역사

1.병자들의 친구 헤론

2.한국 선교의 아버지 언더우드

3.근대 교육의 개척자 아펜젤러

4.한국의 친구 헐버트

5.항일 언론 투사 베델

6.백장 해방운동의 지도자 무어

7.민족운동의 동역자 벙커

8.고아의 아버지 소다 가이찌

9.성서번역의 주역 레이놀즈

10.평양 선교의 개척자 홀

11.성공회 토착화의 주역 터너

12.숭실대학의 창설자 베어드

13.YMCA 부흥 운동가 브로크만 형제

14.민중의 봉사자 구세군 가족

책속에서

이 책을 쓸 1979년 당시 양화진 외인묘지는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폐허지였고, 흉터처럼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곳이었으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쓸쓸한 땅이었다. 더욱이 서울시 당국은 지하철 공사를 하는 데 지장이 된다고 해서 이 묘지를 다른 데로 옮기려 했다.
그러했던 땅이 오늘에 와서는 천주교의 절두산 성지와 양화진 묘역 사이를 오갈 수 있게 이으면서 그 일대가 공원화되고 모두 성지 순례지로 변했다. 양화진 외인묘지가 이처럼 변할 줄이야 꿈엔들 예측이나 했겠는가! 참으로 하느님의 섭리는 놀랍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 동시에 홍성사가 이 책의 개정판을 낸다고 하기에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진작부터 개정판이 나왔으면 했던 것이 사실이다. 초판이 나온 지 어느덧 20여 성상이 흘렀다. 본디 이 책은 주간신문에 내었던 연재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므로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데도 있고, 더욱이 정부 당국이 이 묘지를 파헤쳐 다른 데로 옮긴다는 바람에 화가 나서 갑자기 쓴 것인 만큼 미흡한 점도 많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초판이 나온 뒤 민족의 은인 두 분이 이 묘지에 더 묻히게 되었다. 한 분은 언더우드 1세 목사님이고, 또 한 분은 언더우드 3세 장로님이다. 제1세는 미국 고향에 묻혔다가 1999년 5월 20일에 양화진으로 이장되었고, 제3세는 2004년 1월 15일에 작고하여 여기에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초판이 나올 때에는 세 분 어른들이 추천사를 써 주셨다. 한경직 목사님과 김재준 목사님과 언더우드 3세 장로님이 쓰셨는데, 그분들이 다 작고하셨으므로 새로 추천사를 써 달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개정판을 내며’ 중에서

서평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한 번 찾아가 보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양화진이라 불리는 서울의 서남쪽, 마포구 합정동 네거리에서 가까운 작은 동산입니다. 그곳에는 5백여 명이 넘는 외국인 형제자매들의 무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우리 은인들의 무덤이 많습니다. 무엇이 아쉬워서 여기까지 왔으며, 어떻게 살았기에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흙으로라도 남아 있기를 원했을까요?
이 책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여 준 믿음의 선인들을 새롭게 흠모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 열거 수록된 헤론, 언더우드, 아펜젤러, 베델, 헐버트, 벙커 등의 정신을 계승한 한국의 젊은이들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로 뻗어나가 그곳의 전택부 장로님과 같은 역사의 증인들에 의하여 영광스럽게 기록되는 그날이 오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1986년).

– 추양(秋陽) 한경직(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전 이사장)

오리 전택부 선생께서 평생을 한국 교회와 민족에게 자원 제물로 바친 선배 선교사들의 유적과 그 공헌들을 발굴하여 한 열전을 출간하려고 집필 중에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들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라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한국 교회가 창시자를 권외(圈外) 인물로 등한시한다면, 그것은 뿌리도 씨앗도 기대할 수 없는 허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공은 진심으로 오리 선생의 신저 출간에 감격과 감사의 정을 보냅니다.
장공은 86세니까 젊은 사람들 축에 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는 사도 바울의 심경도 장공에게 노상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이 축사를 보냅니다(1986년).

– 장공(長空) 김재준(한신대학교 전 명예학장)

추천글

*갓피플
[정동건] 살아 숨쉬는 한국 초대교회사 이야기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책이라는
신파적인 문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책이 갖는 가치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어린이들을 위한 겨울성경학교를 진행하기 위해
이 책을 좀 참고했었다.
(참고로 주제가 부흥 2007이었다)
그런데, 눈이 계속 가더니 눈가를 적시기 시작했다.

젊은 의사 헤론의 열정…
말이 필요 없는 언더우드 가문의 헌신…
아펜젤러 목사의 거룩한 순교…
이 책에 실린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엄청난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우리나라가 벌써 선교사를 파송하는 수로는
세계 5위 안에 들어가는 선교대국이 되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기까지는 이 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지만
우리는 정작 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았다.

굳이 이들의 희생을 떠올리고 양화진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이 책은 우리 심령을 적시는 뜨거움을 안겨줄 것이다.

오늘도 눈비를 맞아가며 양화진에 서 있는 돌비석들…
과연 그 돌비석들이 그냥 서 있는 것들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 돌비석들은 대한민국을 껴안고 있다.
그들은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했던 사람들이기에…
이 책은 이들의 존재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충분한 귀한 책이다.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꼭…

저자 인터뷰

[저자 인터뷰]

○최근 근황을 말씀해 주세요.

– 90이 넘은 나이다 보니, 그저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기력이 쇠잔하고 눈도 잘 안 보여서 화경이 아니면 글도 읽기 힘들어요. 그렇지만 다행히도 정신은 참 맑아요. 오락가락하진 않아요. 그래서 힘이 빠지지만 않으면 글은 씁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최근에도 논문을 하나 썼답니다. 아마도 내 마지막 논문이 될 것 같은데요. ‘한글의 성서적 의미’라고, 신앙인의 입장에서 본 한글의 중요성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양화진 선교사 열전》을 쓰게 된 경위를 말씀해 주세요.

–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이었어요. 어느 날 여러 신문에 계속 기사가 났었어요. 지하철 공사 때문에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묘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내용이었지요. 그 기사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화도 나서,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신문사를 찾아갔어요. 기독공보사에 가서 이런 일이 있으니, 글을 쓰게 해 달라 부탁했지요. 감사하게도 신문사에서 흔쾌히 수락해서 글을 연재하게 됐어요. 그때 저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달려드는 심정이었어요. 총칼 없이 군대 나가는 군인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신문에 글을 연재한 이후 양화진에 특별히 달라진 점이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 내가 신문에 연재 글을 쓴 것만으로 정부 방침까지 바꿨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내가 쓴 ‘양화진 외인열전’이라는 그 연재물이 공사 계획을 조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 당시는 아직 언더우드 3세가 살아 있었을 땐데, 같이 이 문제를 위해 애를 써 보자고 제가 말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 친할아버지를 비롯해, 가족들과 직접 관련된 일이다 보니, 앞에 나서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 혼자 신문에는 글을 쓰는 것으로, 또 말과 행동으로는 여기저기 다니며 정부에 항의도 하고, 화도 내면서 공사 계획이 철회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공사 계획이 바뀌게 되었지요. 다 파헤쳐 없애자는 계획을 철회했어요. 양화진 묘역의 한 200평이 깎이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손상된 묘지 하나 없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어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지요.

○글을 쓰는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 연재를 막 시작하면서, 일단 양화진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오랜만에 가니 좀 헤매게 되었지요. 마침 그 근방에 파출소가 있기에, 양화진이 어디냐고 물어 봤어요. 파출소에서도 모르겠다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나중에 찾고 보니, 양화진은 그 파출소에서 약 100미터 옆에 있었어요.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도 모를 정도로, 모두들 양화진에 대해 무심했던 때였지요.
더 재밌는 것은, 제가 그 동네 노인들에게 양화진 나루터가 어디냐 하고 물었더니, 다들 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더라구요. 그런데 좀 있다가 파출소에서 날 잡으러 왔어요. 알고 보니, 그 동네 노인 양반들이 “여기 수상한 사람 있으니 잡아가라”고 신고를 했더라구요. 내가 황해도 사투리를 좀 쓰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북에서 온 간첩이 근방 지리를 묻는다고 신고를 했던 거지요. 하하. 아무튼 그 당시 양화진은 쓰레기장으로 황폐화되었던 곳이고 도깨비가 나온다는 말도 돌아서 모두들 기피했던 곳이었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열전》에 쓰신 인물 중 특히 애착이 가는 선교사가 있는지요.

–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선교사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있지요. 그 두 분이 참 많은 일을 하셨는데, 그리고 그 가족들은 양화진에 묻혔는데, 어째 그 두 분은 양화진에 묻히질 못했어요. 다행히 언더우드 1세는 뒤에 이장이 되었지만, 내가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양화진에 없었어요. 아펜젤러도 목포로 가던 배 안에서 순직해서, 무덤 자체가 없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한국 선교 역사에 있어서 참 중요했던 그 두 사람에 대해 글을 쓰면서 정작 양화진에 그분들이 없다는 점이 참 아쉽고 마음에 남았었지요.

○최근 들어 양화진에 관심을 갖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요, 그 사람들에게 해 주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우리나라 기독교 선교를 위해 찾아온 선교사들의 거룩한 죽음을 알려야겠다는 목적에서였어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역사의식이 약한 편이고 신앙의 역사에 대해서도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아 안타까웠지요. 그런데 최근 양화진이 성지화되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웠지요. 사람들이 양화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을 거예요. 이 모든 일이 되어진 것에 대해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기회로 더불어 한국 교회 성도들이 우리의 기독교 역사에 대해 좀 더 많이 알아가길 바랍니다.

○한국 기독교계의 큰 어른으로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 저는 제가 감히 어른이라고 할 용기와 자신이 없어요. 어른이 못 되지요. 바라기는 이 사회가 어른이 있는 사회, 어른을 알고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 하다는 것이 참 걱정입니다. 어른을 무시하고 어른을 몰라보고, 또 어른이 어른 구실을 제대로 못 하고, 그저 인기주의, 폭력위주의 세상이 되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조상을 모르고 역사를 모르고 어른을 모르는 민족은 오래 못 간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분들의 신앙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에 이 나라가 그래도 이 만큼이라도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확신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그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 그 신앙으로 살 때, 올바른 나라가 되고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