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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아이와 다툰 뒤에는 무작정 달리러 나가는 버릇이 들었다. (중략) 어떤 날, 달리는 도중 차가운 비를 온몸에 맞고 집에 오니 아들이 자기를 미워하지 말라고 애원하다시피 한다. 엄마를 울리기까지 괴롭혀 놓고, 막상 엄마가 집을 나가니 버림받을까 봐 겁이 났던 걸까. 힘센 팔로 엄마 목을 끌어안으며 “날 미워하지 마세요” 하며 부르짖는다. 힘이 너무 세서 목이 졸려 온다. 숨이 턱 막힌다. 팔이 철봉같이 완강해서 풀 수가 없다.
“이거 놔…. 숨을 못 쉬겠어.”
낑낑거리며 풀려고 해도 요지부동이다. 화가 아직 안 풀렸지만, ‘화 안 났다’ ‘용서한다’ 말하지 않으면 울고 있는 아들에게 목 졸려 죽을 지경에 처한다. 멀리서 보면 코미디 같은 풍경이다.
_84쪽 ‘사춘기’에서
■ 엄마, 엄마. 아이들이 보통 돌 전에 배워 불러 주는 정다운 말. 세상의 수많은 엄마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말. 그러나 자폐 아들은 ‘엄마’란 명사를 문장의 주어로는 사용하지만 호칭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내 아이 입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말. 다정한 그 말, 엄마.
_92쪽 ‘결핍에 대하여’에서
■ 저녁 밥상에서 이런 대화가 오간다.
“섭아, 오늘 하루 종일 뭘하고 지냈니?”
“글씨도 썼기 때문에.”
“글씨를 썼어?”
“어른이 될 때까지. 나중에 생각하는.”
“???”
“꿈꾸었던.”
“….”
“결혼식 초청장이기 때문에.”
“아, 그랬구나.”
외계어도 아니고 외국어도 아니다. 엄연히 우리나라 말이다. 다만, 내 아들만의 문법일 뿐이다. 만 19해 동안 이런 말을 들으니 이젠 통밥으로 조금이나마 통역이 가능하게 되었다. 저 녀석이 한 말의 뜻은 대충 이렇다. “결혼식 초청장을 쓰면서 지냈어요. 어른이 되면 꿈꾸던 결혼식을 할 거거든요.”
이 정도면 아주 용한 통역이라 본다…. 그런데 아들아, 10년 뒤 결혼식 청첩장을 벌써 써놓다니, 너무 성질 급한 거 아니니?
_110쪽 ‘거울 앞에서’에서
■ 내가 우는데 네가 울지 않는다. 나는 웃는데 너는 웃지 않는다. 이것처럼 사람을 외롭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더구나 천륜으로 맺어진 사이라는 엄마와 아들이 감정을 공유하지 못함은 극도로 고독한 일이다.
_154쪽 ‘공감 없음은 너의 아픔’에서
■ 어느 날, 아들 녀석은 수업 시간에 맞추어 들어가지 않아 선생님들을 당황하게 했다. 전자시계처럼 정확한 아이가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니 놀랄 수밖에. 이리저리 아이를 찾아 나선 선생님들은 교실에서 멀지 않은 개천가 체육시설에서 바퀴를 빙빙 돌리며 운동하고 있는 녀석을 발견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얘기를 들은 엄마들은 다들 나를 부러워했다.
“세상에, 수업을 땡땡이치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네요. 부러워라.”
자기만의 패턴이 확고한 자폐 성향의 아이가 어느 날 전혀 엉뚱한 짓을 하다니, 엄마로서 이렇게 기쁜 일이 또 있으랴.
_180쪽 ‘기쁨과 슬픔은 징검돌’에서
■ 울다 지쳐 눈은 붓고 머리는 산발한 사람 곁에 살그머니 앉아 말을 걸어 본다. 수줍고 어눌한 한 사람이 손을 내민다. 가만히 눈을 들여다본다. 손을 꼭 잡으며 어깨를 끌어안으며 속삭인다. 당신도 아프군요. 혼자 울지 말고 같이 울어요.
_242쪽 에필로그에서
프롤로그 6
애벌레의 삶
동네 바보 형 13 그날 18 위기 탈출 넘버 원 26 조기교실 이야기 37 돛대도 아니 달고 44 이름을 불러 주세요 48 피켓을 들어라 52 7번 방의 선물 58 우리 집은 날마다 시트콤 63 별난 식성 I 67 별난 식성 II 73 말, 말, 말 77 사춘기 82 결핍에 대하여 89 장가들고 싶은 아들 96
애벌레에서 고치로
사랑, 그 놈 105 거울 앞으로 110 누이들에게 꽃을 116 부끄러운 고백 하나 122 옷 복 126 젖을 주는 엄마, 꿀을 주는 엄마 130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36 나의 대중교통 이용기 141 체념을 넘어서 146 공감 없음은 너의 아픔 151 그럼에도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려네 157 눈물 164
고치에서 나비로
나도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171 기쁨과 슬픔은 징검돌 177 카드로 만든 집 184 상상력은 힘이 세다 189 다른 별에 사는 사람 195 계시의 순간 I 199 계시의 순간 II 204 ‘장애인’이란 말 —감춤과 드러냄 209 핸디캡 215 마음의 밥, 육신의 밥 223 8년 전 어느 날의 일기 231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236
에필로그 240
최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