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길시 의란진 실현촌 ‘사랑의 집’
사랑의 집에 방문하기 위해 연길을 찾은 이들은 두 번 놀란다. 공항에서 사랑의 집이 있는 실현촌(實現村)까지 오는 동안 지나온 연변 풍경과 딴판인 사랑의 집 모습에 처음 놀라고, 건물 대부분을 김학원 원장이 손수 지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란다. 어떤 봉사자는 고아원인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며 주변에 어려운 곳을 소개해 주면 그곳에 가서 봉사하겠다고 할 만큼, 사랑의 집은 번듯하게 조성되어 있다. 사실 대지 2만 제곱미터(약 6,600평)에 들어선 멋들어진 건물만 보고 놀라긴 이르다. 지금의 사랑의 집이 있기까지 지난 20년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마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지 모른다.
1993년 사랑의 집 설립 당시는 물론 지금도 중국에서 개인이 고아원을 설립해 운영할 수 없다. 허가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부지 마련에서 건물 건축과 운영 등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해도 도무지 허가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1992년에 연길에 온 외국인에게 연길시 민정국(民政局)에서 허가를 내주고, 부지까지 구입해 제공했다. 그곳에 큰 건물이 여덟 동이나 세워졌고, 아이들과 상주 봉사자를 포함해 백 명 가까운 대식구가 생활하고 있다. 후원단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사랑의 집이 운영되는 걸까? 사랑의 집에는 지금도 만나가 내리는 것일까?
2. 울배기 아빠 김학원
세 살 무렵 세상을 떠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어려운 형편 때문에 남의 농사를 대신 지어 주느라 늘 바쁜 아버지, 돈은 없고 돌봐야 할 아이들은 많은 집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나가는 새어머니들, 행방불명된 큰형……. 어린 시절, 칠남매 중 여섯째인 김학원에게 가족은 많았지만, 그는 늘 가족들이 그리웠다. 그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두 명의 형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리움에 늘 울며 다니는 그였지만, 그는 신세타령을 하는 대신 힘 있게 사는 사람이 되길 꿈꿨다.
물려받은 것이라곤 건강한 신체 하나뿐이었지만, 환경에 굴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탄탄한 사업체도 하나 꾸리게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예수님을 만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해 중국에 가서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겠다 서원한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서른다섯 살, 중국어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채 천진(톈진) 가는 배에 올랐다. 연길에 자리 잡고 고아원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에게 어느 날 남자아이 하나가 찾아온다. 길봉이라 이름 지어 주고 자식처럼 돌보기 시작한 그날이 바로 사랑의 집 설립일이다.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은 김 원장은 가정을 잃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이고 입힐까 염려하기보다 어떻게 아이들의 울타리가 될 것인가 고민하며 그들의 아버지를 자처해 스무 해째 연길에 살고 있다.
1992년 3월 연길에 첫발을 디딘 김학원 원장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부모 없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아이를 낳는 대신 중국 아이들을 품에 안아 키우기 시작해 20년이 지난 지금 100명이 넘는 자녀를 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태어나 성장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영락없이 중국에서 살아야 할 사랑의 집 아이들의 아버지지요. -오장숙 위원 추천사에서
3. “저이는 왜 남의 아이를 키우나?”
왜 고등학생 김학원에게 무작정 중국에 가 부모 없는 아이를 돌봐야겠다는 마음을 주셨을까? 내 아이 하나만 귀하게 소황제로 키우는 나라에서,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키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사명은 웃음거리로 전락하곤 했다. 김 원장은 묵묵히 사랑의 집이라는 보금자리를 만들고, 정성껏 아이들을 돌보았다. 설계는커녕 벽돌 쌓는 법도 모르는 건축 문외한이었지만, 아이들이 머물 집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삽질을 하고, 자재를 나르고, 벽돌을 쌓는 등 온몸으로 도운 봉사자들의 땀방울이 큰 힘이 되었다. 번듯한 후원단체도 없이 받은 사랑을 전하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사랑의 집은 날마다 족한 만큼 채워 주시는 주님의 섭리로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선교(宣敎)’를 사전에서 찾으면 ‘종교를 선전하여 널리 폄’이라 풀이되어 있다. 오래전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질 때 외국인 선교사들이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의료 혜택을 베풀고(宣),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르치면서(敎)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포교가 금지된 곳이지만 베풀고 가르치는 선교는 얼마든지 가능함을 김 원장의 사역을 통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