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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무게

11,700

발행일 2008.9.22
상세정보 양장 221p
ISBN 9788936502621

품절

C. S. 루이스의 순전한 영성이 담긴 설교집
60년 이상 전 세계 베스트셀러인《순전한 기독교》,《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나니아 연대기》등의 작가 C. S. 루이스가 매우 탁월한 설교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영광의 무게》는 문학가로서의 탁월한 글쓰기가 그의 순전한 영성과 결합된 설교집이다. 설교의 백미로 꼽는 ‘영광의 무게’를 비롯해 그리스도인이 실제적인 삶에서 접하게 되는 주제에 관해 마음속 깊이 파고드는 설교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루이스를 어려워 멀리했다면 이 책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통찰력과 실천적 지혜는 일생 동안 삶의 지표로 삼을 만하다.

지적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정직한 설교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이들에게 때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일들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면, 정직한 질문을 마음속에 숨기고 믿으려고 애쓰거나 아니면 튕겨 나간다. C. S. 루이스의 용감하고 위대한 점은 지적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떠나기도 했지만 결국은 성경에서 해답을 발견하고 수많은 회의론자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회의자의 사도’가 되었다. 《영광의 무게》는 ‘무조건 믿으라’로 해결되지 않는 방황하는 지성인들이 지적으로 납득하게 해 주는 설교다.

더 깊이 숙고하고 더 멀리 내다보는 설교의 모델
루이스는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설교자로서 세련된 옥스퍼드 교수와 학생에게나, 군인과 평범한 사람 모두에게 어려움 없이 설교했다. 창의적 상상력, 놀라운 어휘 사용 기술, 인간에 대한 공감 능력으로 그는 신앙에 대해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탁월한 설교자임을 입증했다.《영광의 무게》에 있는 설교들은 신학적인 통찰력, 탁월한 표현력과 생생한 비유 사용, 각별한 목회적 배려로 더 깊이 숙고하고 더 멀리 내다보는 설교의 모델이다.


각 장 소개

책의 표제이기도 하고 루이스의 가장 훌륭하고 감동적인 설교인 ‘영광의 무게’는 교부들의 글과 같은 반열에 놓아도 될 만큼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41년 6월 8일에 세인트메리 교회에서 설교했을 당시 현대 들어 가장 많은 청중이 몰려서 자리가 없어 창문에 앉은 학생들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성경 본문은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였다.

‘전시의 학문’은 1938년 10월 22일 주일 저녁 옥스퍼드의 세인트메리 교회에서 한 설교로, 원래 제목은 ‘다른 신은 없다: 전시의 문화’였으며 루이스가 사용한 성경 본문과 제목은 신명기 26장 5절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였다. 그는 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하고 풀어 나간다. 이 설교에서 그가 제시한 질문은 “마무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임무를 시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이다.

‘나는 왜 반전론자가 아닌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도에 옥스퍼드 반전론자 협회에서 루이스가 한 강연이다. 그는 사실, 직관, 추론, 권위에 근거하여 반전론자들 앞에서 자신이 반전론을 반대하는 근거를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변환’은 옥스퍼드의 맨스필드 칼리지 예배당에서 1944년 5월 28일 성령강림절에 설교한 원고이다. 루이스의 신학적 사상이 ‘변환’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변환’은 영성에 관한 설교로서, 프로이트나 자연주의자들의 물질주의적 사고에 반대하는 논증을 편다. 소위 영적인 것이 실제로는 자연적인 것에서 추론한 산물이고, 자연적인 것의 신기루나 투사일 뿐이라는 불신자와 회의론자의 주장에 반하여 루이스는 ‘변환’이라는 이론으로 대답한다. ‘변환’을 “풍부한 매개체에서 빈약한 매개체로 옮겨갈 때 나타나는 각색 현상”이라고 소개하며 방언과 초자연적 현상을 이 이론으로 설명한다.

‘내부패거리’는 1944년 12월 14일에 런던 대학 킹스 칼리지에서 행한 연례 ‘기념 강연’이었다. 모든 사회에 생기게 마련인 ‘배타적인 특권 집단’에 소속하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고 건전하게 사회생활 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멤버십’에서는 우리가 교회의 멤버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개인주의나 집단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한다.

‘용서’에서 루이스는 결코 용서가 쉽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기가 쉽지 않지만 왜 용서해야 하는지, 어떻게 용서를 실천할지 가르쳐 준다.

‘실언’은 루이스의 마지막 설교로서 1956년 1월 29일 케임브리지의 모들린 칼리지 예배당에서 했다. 늘 그렇듯 루이스는 자신이 평신도임을 강조하며 주제넘게 가르치려 들지 않고 의견 교환을 하고자 한다는 말로 시작하여, 자신의 삶에서 일시적 욕망이 영적인 삶을 약화시키지 않게 하려고 어떻게 씨름하는지 설명한다.

무게 378 g
크기 148 × 210 mm

저자

C. S. 루이스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꼽히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시인, 작가, 비평가, 영문학자. 1898년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출생. 1925년부터 1954년까지 옥스퍼드 모들린 대학에서 개별지도교수 및 평의원으로 있었으며, 1954년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쳤다. 무신론자였던 루이스는 1929년 회심한 후, 치밀하고도 논리적인 정신과 명료하고 문학적인 문체로 뛰어난 저작들을 남겼다. 대표작으로《순전한 기독교》,《스크루테이프의 편지》,《고통의 문제》,《예기치 못한 기쁨》,《네 가지 사랑》(이상 홍성사), 《나니아 연대기》(시공사) 등이 있다. 1963년 작고.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 -타임지
“루이스는 20세기 복음주의계의 어거스틴” -J. I. 패커
“20세기의 존 버니언” -콜린 두리스, 미국 IVP 편집자
“금세기 가장 사랑받았던 사상가이자 작가” -하퍼콜린스 퍼블리셔스
“지난 40년 동안 미국 복음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저술가” -크리스채니티 투데이

홍종락
서울대학교에서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사랑의집짓기운동연합회에서 4년간 일했다. 지금은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으며, 번역하며 배운 내용을 자기 글로 풀어낼 궁리를 하고 산다. 저서로 《나니아 나라를 찾아서》(정영훈 공저, 홍성사)가 있고, 《성령을 아는 지식》,《루이스와 톨킨》, 《루이스와 잭》, 《교회 다니는 십대, 이것이 궁금하다》, 《개인 기도》, 《꿈꾸는 인생》, 《영광의 무게》(이상 홍성사), 《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좋은 씨앗)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했다. <2009 CTK(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판) 번역가 대상>을 수상했다

차례

들어가는 말

1. 영광의 무게 _ 천국과 인간의 영원한 가치
2. 전시의 학문 _ 전쟁 중에도 학문에 힘쓰는 이유
3. 나는 왜 반전론자가 아닌가? _ 전쟁에 대한 태도
4. 변환 _ 방언과 초자연적 현상 이해
5. 신학은 시詩인가? _ 신학을 보는 관점
6. 내부패거리 _ 특권층 지향 욕구 통찰
7. 멤버십 _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넘어
8. 용서 _ 참된 용서 실천 방법
9. 실언 _ 하나님의 주권 인정하기

편집자의 글

책속에서

평범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그저 죽어서 사라질 존재가 아닙니다. 국가, 문화, 예술, 문명과 같은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그것들의 수명은 우리 개개인에 비하면 모기의 수명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농담을 주고받고, 같이 일하고, 결혼하고, 무시하고, 이용해 먹는 사람들은 불멸의 존재들입니다. 불멸의 소름끼치는 존재나 영원한 광채가 될 이들입니다. – ‘영광의 무게’에서

전쟁이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원래부터 있던 상황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될 따름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벼랑 끝에서 살아왔습니다. 인류 문화는 언제나 그 자신보다 무한히 중요한 것의 그늘에서 존재해야 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을 때까지 미뤘다가 지식이나 미를 추구하고자 했더라면 그 추구는 아예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 ‘전시의 학문’에서

저는 과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신학적 관점으로 옮긴 것이 꿈에서 벗어나 깨어난 상태로 옮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기독교 신학은 과학, 예술, 도덕, 그리고 기독교보다 하위에 있는 종교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관점은 이런 요소들은 물론이고 과학 자체와도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저는 태양이 떠오른 것을 믿듯 기독교를 믿습니다.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 ‘신학은 시詩인가’에서

저는 경제적 동기나 성적 동기가 우리 도덕주의자들이 ‘세상’이라 부르는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거기에 야망을 보탠다 해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선택된 소수에 들고 싶은 욕심, 내부에 들고 싶은 갈망은 야망으로 단정 짓기 어려운 많은 형태를 띱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내부패거리로부터 구체적인 이익을 바랍니다. 권력, 돈, 규칙을 어기는 자유, 일상적 의무의 회피, 징벌의 모면.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더해 은밀하고 달콤한 친밀감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 ‘내부패거리’에서

저는 기독교의 궁극적 관심사가 개인도 집단도 아님을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영생을 상속할 수 없습니다. 자연적 자아도, 집단적 대중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이 영생을 상속할 수 있습니다. – ‘멤버십’에서

한 번의 큰 모욕을 용서하는 건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끊임없는 자극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은 다릅니다. 들볶아대는 시어머니, 윽박지르는 남편, 바가지 긁는 아내, 이기적인 딸, 거짓말쟁이 아들을 계속해서 용서하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 ‘용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