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우간다로 파견된 코이카 1기 정부파견의사,
유덕종 의사가 받아온 삶의 처방전
코이카 25주년, 코이카 최초 정부파견의사의 23년간의 기록
한국 정부는 1968년부터 40년이 넘도록 우수한 한국 의사들을 개발도상국에 파견해 질병으로 고통받는 현지 주민들에게 질병 예방, 치료, 보건환경 개선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도주의적 사업을 펼쳐왔다. 유일하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해외 원조를 하는 나라로 비약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민의 자긍심과 국제 사회의 관심도 높아졌다. 그 중심에 우리나라의 공적개발원조(ODA) 활동을 담당하는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와 묵묵히 파견 업무를 수행하는 봉사자들이 있다.
코이카는 1991년 4월에 설립되어 올해 4월 창립 25주년을 맞는다. 그리고 때마침 코이카에서 최초로 아프리카에 파견한 1기 정부파견의사(이하 정파의) 유덕종 의사가 우간다에서 23년간 의료 봉사를 하면서 남긴 기록물이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그 열악한 곳에서 고군분투한 그의 일생이 담긴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사반세기를 맞이하는 코이카로서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 대한민국 해외 원조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기록이 될 것이다.
32세 젊은 의사, 우간다로 떠나다
의대생 시절부터 막연히 슈바이처와 같이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저자는 안동에서 근무하던 1991년, 막 창설된 코이카에서 낸 정파의 모집 공고를 보게 된다. 그는 학생 시절 품었던 꿈을 위해 큰 결단을 내리고 병원을 그만두었다. 의사로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떠나려는 그를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고, 부모님도 전도유망한 아들이 고생길이 훤한 아프리카로 간다고 하니 처음에는 많이 힘들어하셨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가 떠날 곳은 1990년대 초반에는 세계 최고의 에이즈 유병률로 널리 알려진 우간다였다. 그는 당시 코이카에 정파의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한 아프리카 나라 가운데, 영어가 가능하고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를 선택했는데, 그곳이 바로 우간다였다. 그의 나이 32세,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는 홀로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에이즈에 대한 우려로 셋째를 임신한 아내와 두 딸은 우선 한국에 남겨두었다.
생각보다 훨씬 열악한 우간다,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잃다
당시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는 한국의 소도시만도 못했다. 치안도 불안해 강도와 도둑이 들끓었다. 강도와 도둑을 막기 위해 모든 집이 쇠창살과 자물쇠로 잠겨 있었는데, 문마다 자물쇠가 잠겨 있어 기본적으로 열쇠를 열 개 정도 가지고 다녀야 했다. 기르던 경비견이 도둑에게 독살당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는 동부 아프리카 최고의 대학병원이라는 물라고 병원에서 의료 봉사를 시작했지만, 중요 시설이라 우선적으로 전기를 공급받는 그곳도 열악한 인프라 때문에 정전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도 의약품과 제대로 된 진단 장비가 태부족이었다. 심지어는 병실에 체온계와 혈압계도 없었다. 살릴 수 있는 환자가 의약품과 장비 부족으로 죽어가는 걸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의사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고통이 그의 마음을 파괴시켰다.
병원을 설립하려는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다
2년 뒤 다른 곳으로 파견 갔던 정파의는 모두 계약을 갱신하지 않아 1기 정파의 가운데 혼자만 남게 되었다. 아프리카 의료 봉사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저자도 말라리아의 위협 때문에 항시 모기를 조심해야 했고, 에이즈로 인해 급증한 결핵 환자를 치료하다가 결핵에 걸렸으며, 잘 들지 않는 바늘로 에이즈 환자의 피부를 봉합하다가 손가락이 바늘에 찔리는 아찔한 사고를 당했다. 비슷한 사고로 총 여섯 차례나 에이즈 검사를 받아야 했다.
결국 열악한 의료 환경 때문에 큰딸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는 사건을 겪는다. 저자 자신이 우간다에서 가장 큰 병원에서 일하고 있지만, 갑자기 뇌수막염 증세를 보이는 큰딸을 제대로 치료할 병원이 없어 집에서 치료해야만 했다. 우간다에 인공호흡기도 하나 없던 시절이라 호흡이 멈춘다면 의사인 그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큰딸이 살아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간다에 가난한 사람들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설립하려는 비전을 세우게 된다.
우간다에서 오히려 삶의 처방전을 받아오다
병원 설립 계획을 들은 독일인 동료는 그를 ‘꿈꾸는 사람(Dreamer)’이라고 놀렸지만, 그는 결국 2002년 베데스다 클리닉 개원이라는 결과물을 얻었다. 베데스다 클리닉은 캄팔라 고아원들의 어린이를 무료로 치료해주고 있다. 커다란 좌절도 겪었다. 한국 의료팀과 함께 의대가 전혀 없는 아테소 지역에 의대를 설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설립학장직을 맡은 그는 현지인의 무관심과 만연한 부정부패를 극복하며 우간다 정부의 허락만 받으면 바로 의대를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내놓았지만,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베데스다 클리닉을 종합병원으로, 열대병 연구소로, 종국에는 의대로 발전시키는 꿈을 꾸고 있다.
이런 20년이 넘는 봉사의 결과로, 물라고 병원 ‘베스트 의사’로 선정되고, 마케레레 의대생에 의해 ‘올해의 교수’로 뽑혔으며, 마케레레 의대는 그의 업적을 기려 명예교수로 임명했다. 또 2,000명이 넘는 제자를 둔 ‘우간다 의사의 스승’이 되었다. 전직 우간다 보건부 장관과 현직 보건부 부장관도 그의 제자일 정도로 우간다 곳곳에서 제자들이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반대로 말한다. 베푼 것보다 얻은 게 더 많다고. 교만했던 자신이 우간다에서 진정한 삶의 방식을 배웠다며, 우간다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며, 이렇게 고백한다. “삶이 허락할 때까지 이곳, 아프리카에서 최선을 다해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의료 봉사를 할 계획이다. 내가 그들을 치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들을 통해 내가 치유받았기 때문이다. 내 병의 처방전은 낮아짐이었다.”(262면) 아프리카에 일생을 바친 의사가 오히려 삶의 처방전을 받아온 것이다. 이 처방전을 독자들에게 공개한다.
‘코이카의 꿈’ 해외 봉사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해외 봉사를 향한 젊은이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덩달아 코이카에 지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991년 코이카 봉사단 37명이 7개국에 파견된 것을 시초로 지금까지 5만 명 이상이 개발도상국 100여 나라에 파견되었다. 현재도 코이카는 매년 전 세계 50여 개국에 4,500명 이상의 월드프렌즈코리아(WFK) 봉사단원을 파견하고 있다.
그러나 해외 봉사를 준비하는 젊은이들은 보람찬 일을 한다는 장밋빛 이상만 생각하면 안 된다. 현실에서는 워낙 많은 변수와 위험 요소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하나의 해결책은 먼저 그 길을 걸어갔던 선배의 발자취를 확인하며 앞으로 벌어질 일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봉사하는 삶을 꿈꾸는 분들에게 간접 경험을 제공하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믿을 만한 가이드가 될 것이다. 특히 코이카를 통해 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끝없는 사투를 펼쳐야 할 봉사자들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