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pping Cart

장바구니에 상품이 없습니다.

세일!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11,700

발행일  2001.7.9
상세정보  양장 / 318page
ISBN  9788936506056

품절

잡신의 나라 일본에서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내 나라, 내 문화, 내 이름…… 급기야 내 영혼까지 내줘야 했던 그 절망의 밤에 오직 성서의 빛으로 희망의 새벽을 준비하던 청년 예수들, 유영모 함석헌 김교신 안창호…… 그들에게 처음 예수의‘아름다운 민족주의’를 가르친 큰스승 우찌무라 간조. 회심을 향한 그의 머나먼 구도의 여정은 진지하고 치열한 회의(懷疑)를 지나서야 비로소 영롱한 하나님의 마음에 도달했다.

★초판 《나는 어떻게 크리스찬이 되었는가?》 발행일: 1986년 11월 10일
★개정판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발행일: 2001년 7월 9일

무게 449 g
크기 128 × 188 mm

저자

우찌무라 간조
1861년 에도(江戶)에서 다카사키 한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경외국어대학교(1874)를 거쳐 삿포로 농업대학(1877)에 입학, 거기서 처음 기독교를 접했고 세례까지 받았다. 졸업 후 잠시 농상무성(農商務省) 관리로 있다가 미국 유학을 떠나 애머스트(Amherst) 대학에서 기독교 역사, 히브리어, 헬라어, 서양사 등을 공부했으며 졸업 후 하트포드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 1888년 소명을 품고 귀국한 그는 니가타 현의 호쿠에쓰 가칸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1891년 제일고등중학교에서 가르치던 중 천황의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불경시(不敬視)했다는 이유로 교직을 떠나야 했으며, 이 때부터 본격적인 저술 활동에 들어가 주옥같은 저작들을 쏟아 냈다.
한때 그는 월간 〈성서연구〉를 통해서 신앙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애국과 정의에 관한 견해를 펼쳤으며, 이러한 사상은 김교신과 함석헌에게로 이어져 <성서조선>의 창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기성 교회가 지나치게 의식적이고 조직에 얽매여 있으며 신학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본래의 생명성을 잃어버렸다고 판단, 무교회주의를 주창하며 성서 연구 중심의 기독교 복음 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 몰(歿).

양혜원
1970년 생으로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수료했다. 한국 라브리(L’Abri)선교회 협동간사로 6년간 섬겼으며, 1994년부터 통역과 번역 일을 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이디스 쉐퍼의 라브리 이야기》, 《대천덕 자서전 – 개척자의 길》, 《예수원 이야기 – 광야에 마련된 식탁》,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모자》, 《쉐퍼의 편지》(이상 홍성사) 등을 번역하였다.

서평

지금, 우찌무라 간조를 읽어야 하는 이유
-‘무교회주의’ 오명 쓴 진정한 우상 파괴자 

최근 황석영의 소설 《손님》을 읽었다. 개신교 목사인 류요섭이라는 인물이 한국 전쟁 전후 시기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그 이야기에서, 작가는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이 땅의 ‘손님’으로 설정했다고 말했다.

손님과 기독교

하기사 작가 황석영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기독교를 이 땅에 뿌린 이들이 바깥에서 들어온 손님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여전히 이 땅과 이 민족에게 기독교는 어디선지도 모르게 흘러왔다가 잠깐 머물다 다시 어디론가 떠나 버리는 손님의 정체성으로만 존재한다면, 그건 소설 속의 동족상잔 못지않게 이 민족에게는 비참한 일이 아닐까.
소설 《손님》을 다 읽고 나서, 엉뚱하게도 나의 뇌리에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자 기독교 지성으로 꼽히는 우찌무라 간조(內村監三)의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How I Became a Christian)》가 겹쳤다. 그것은 민속 종교의 숭배자이던 ‘이교도’ 간조가 ‘손님 종교’ 즉 외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회심하는 인상적인 과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책의 개정 작업을 하기 전까지 그에 대해 오래 전부터 가져 온, 정보(그것은 간조에 대한 나의 거의 유일한 정보였다!)도 생각났다. 나의 ‘무지에서 나온 편견’은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에 쓴 김진홍 목사님의 글이 대신 잘 얘기해 준다.
“한국 교회에는 우찌무라 간조가 단지 무교회주의자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무교회주의에 대해서 우리는 교회를 해치는 바람직하지 못한 신앙 사상쯤으로만 인식합니다만, 이것은 많은 오해로 빚어진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의 무교회 운동이 지닌 속뜻은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 나가자는 것이지, 교회를 허물자는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다시, 우찌무라 간조를 생각한다’중에서)
그러나, 우찌무라 간조가 자신을 “세심한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연구한 일기를 토대로 쓴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를 편집하며 그 ‘유일한 정보’가 그릇된 편견임을 알았다, 는 진부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스스로 ‘항해 일지’라고 부른 일기와 함께, 기독교와 기독교 국가, 그리고 자신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간조의 고백과 사상을 만나면서, 그가 진정으로 기독교를 ‘손님’이 아닌 일본의 ‘원천’으로 삼으려 부단히 고민하고 애썼음을 새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왜 지금, 우찌무라 간조인가

사실,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는 이미 15년 전에 홍성사에서 출간한 책이다. 우찌무라 간조의 신앙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이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는가(How I Became a Christian)》라는 이름으로 나온 것은 1986년 11월이다. 그리고 이제 그 책이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라는 새 이름의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것이다. 12쇄를 마지막으로 절판된 이 책을, 40권 분량의 간조 전집을 펴낸 일본 교문관까지 직접 날아 가서 수십 장의 사진을 고르고 사용료를 지불하면서까지 다시 펴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읽히고 또 읽혀야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한국 교회는 세인들의 비난과 조소 속에서 휘청대고 있습니다. 병든 세상을 치유하여 새롭게 하며 바른 미래로 이끌어 가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이런 때에 우리의 이웃 나라 일본에서 바른 교회를 일구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을 세워 나가기 위해 고민하며 살았던 우찌무라 간조의 삶과 사상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큰 의미를 갖습니다.”(김진홍 목사, ‘다시, 우찌무라 간조를 생각한다’ 중에서)
김진홍 목사님의 글이 아니더라도, 이미 “서구 신학의 소비 시장”이라거나 “미국 교회의 지교회”라는 비아냥을 그저 터무니없다고 비판할 수만은 없으리만큼, 한국의 기독교가 스스로 손님으로 전락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를 통해 일본의 정신이 더 성숙해지고 조국애가 승화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성경 연구 운동을 펼치며 조국 일본의 청년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길러 내고 조국을 섬기도록 가르친 그의 신앙 운동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미국의 신학교들은 특별히 미국 교회에서 일할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미국과는 처지가 다른 나라에서 일할 사람들을 훈련시키기에는 이상적인 장소가 아니다. 우리가 씨름해야 하는 대상은 회의적인 흄이나 분석적인 바우어가 아니라, 힌두철학의 미묘함, 중국 도덕주의자들의 비종교성, 그것과 어울려서 신생 국가들의 혼란스러운 생각과 행동들이다.”(‘신학에 빠져들다’ 중에서)

이교도 회심자 간조는 기독교 신앙이 자신이 발 딛고 선 삶의 현장에 어떻게 뿌리내려야 하며,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복음이 일본이라는 땅 안에서는 어떻게 생명력을 드러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자신의 삿포로 농업대학 동기생들과 함께한 ‘교회’ 창립에 얽힌 기독교 선교사들의 파벌(교파) 대립을 겪으며, 참된 교회는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가 반목과 대립, 파벌과 분리에서 벗어나 참된 교회를 찾고 세우려는 노력이, 어느 교파의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교회를 추구하는 교파적 자유함이, 무교회주의로 오해받았던 건 아닐까. 따라서 ‘판정’ 내리기 좋아하고 ‘규정’ 짓기에 익숙한 우리네 의식으로 이러한 간조의 참 교회 운동을 ‘무교회주의’로 단칼에 베어버린 것은 아닐까. 
정작 간조는 온갖 ‘주의’들로부터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갈구했다.
“오, 내 영혼아, 온갖 ‘주의’들로부터 벗어날 지어다. 감리교주의건, 조합교회주의건, 다른 무슨 고상하게 들리는 주의건 간에 상관치 말고 진리를 추구하며 인간으로서 처신하고, 사람들로부터 벗어나서 위를 바라볼지어다.”(‘신학에 빠져들다’ 중에서)
우찌무라 간조에게서 나는, 오늘날 희미해져 가는 치열하고 진지한 구도의 자세를 배운다. 그리고 기독교를 ‘손님’으로 전락시키는 서구적 겉치레를 타파하는 우상 파괴자의 모습을 만난다. 
“내가 앞으로 결코 하지 않을 것 한 가지, 그것은 기독교를 유럽이나 미국의 종교라고 옹호하는 것이리라. 그러기엔 ‘가시적인 증거’가 빈약할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불멸의 영혼을 지탱해 줄 종교는 ‘겉치레’ 증거보다 훨씬 견고하고 심오한 증거 위에 놓여야 한다. 그러나 나는 한때 내 신앙을 그런 짚더미 위에 쌓았다.”

-글/옥명호(편집부)

저자 인터뷰

“사는 것이 곧 싸우는 것이다”

○당신의 사상과 활동은 우리 한국에서도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식자들 사이엔 매우 저명한 인사이다. 물론 당신의 제자들인 함석헌 김교신 등이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는‘전도사’로 일해 왔다. 이번에 당신의 회심과정을 소개한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를 발간했는데 우선 이 책의 배경을 설명해 달라.

– 이 책 또한 나의 중요한 전도 수단인 문서전도의 한 형태로 보면 된다. 사실 일기를 공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책에 수록된 나의 일기는 유년 시절부터 나의 조국 일본에서 형성된 다양한 우상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정면으로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때론 처절하게 또 때로는 격정적 감정에 담겨 전개된다. 나는 나의 이런 고민의 세월이 기독교의 문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또 다른 구도자, 또 다른 우찌무라 간조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이 ‘우상’이라고 표현한 그 다양한 존재에 대해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사실 당신의 우상들 가운데엔 우리 나라 젊은이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도 있다.

– 사실 우리 나라에서 섬기는 신은 무려 800만이나 된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이 신들에게 얽매여 있다. 각 신들은 독특한 금기사항을 가지고 육체적인 복종뿐 아니라 정신적인 복종까지 요구하고 있어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억압하고 있다.
나 또한 이런 신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애국심도 그 중 하나였다. 그래서 외국의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게 마치 조국의 반역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어쨌든 이런 우상의 활동들이 한국에까지 뻗쳐 있다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개종의 과정을 밟았다. 이런 회심의 과정을 통해 당신은 겉과 속 모두 철저한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치열한 구도자의 자세 없이 그리스도인인 양 행세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볼 때 이 책은 우리 한국 교회에 중요한 의미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 나도 삿뽀로 농업학교 시절 학교 친구의 권유로 처음 기독교를 접했을 때는 그저 예쁜 여자들과 함께 교제하는 즐거움에 관심이 컸다. 사실 800만 이상의 신을 섬기다 오직 하나의 신을 섬김으로써 수많은 형식의 예배와 기도는 물론 독특한 금기사항들도 지킬 필요가 없으니 정신적으로도 건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종 이후 회심에 이르기까지 나는 더 깊 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관찰이 필요했다.
내 개인의 만족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이 땅의 충성된 아들이 되기 위해서 나는 조국이란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유 또한 신앙에 기초한 바른 인간이 되는 것, 그리고 그 후에 애국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문제에 더욱 치열하게 부딪쳐야 하고 그 속에서 경험과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4개월 만에 신학 공부를 마무리하고 조국 일본으로 돌아왔다는데…….

– 무엇보다 극심한 정신적 긴장으로 신경이 불안정했고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를 통해 신학 공부를 포기한 것이 돌이켜볼 때 하나님의 인도였다. 미국의 신학교들은 미국 교회에서 일할 젊은이들을 길러 내는 곳이다. 우리 나라의 처지에선 맞지 않았다. 우리가 씨름해야 할 대상은 회의적인 흄이나 분석적인 바우어가 아니라 힌두 철학의 미묘함, 중국 도덕주의자들의 비종교성, 그것과 아울러 신생 국가들의 혼란스런 생각과 행동들이다. 나는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마땅히 자신의 조국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위해 자신의 조국을 향한 하나님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 내 가족은 무사계급에 속한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사는 게 곧 싸우는 것이었다. 이 운명은 회심하기 전이나 회심한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내 일생을 걸고 난 싸울 것이다. 내 하나님을 위해서, 내 조국을 위해서 말이다. 난 특별한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굳이 재주를 대라면 글쓰기뿐이다. 이것이 내 삶의 전쟁터에서 유일한 무기다. 그러기에 내 보잘것없는 저서들이지만 이를 통한 복음전도와 성서연구는 내 평생의 과제요 즐거움이 될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의 저자 우찌무라 간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