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 윤영휘 교수 신작!
19세기 영국 노예무역 폐지 운동이
21세기 한국 정치·사회에 던지는 질문
정치가의 사명은 무엇인가
1787년 5월 22일 12명의 신사들이 런던에 모여 역사상 처음 노예무역 폐지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노예들의 권리를 위해 법정에서 싸웠던 그렌빌 샤프, 클락슨 같은 국교도 복음주의자가 주요 멤버였던 이 위원회가 설립된 후, 영국에서는 반노예제 감정이 빠르게 대중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이 가장 먼저 논의한 일은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의회로 가져가 과업을 이뤄 낼 인물을 찾는 것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인물은 28세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였다.
노예무역의 시작은 위원회 설립보다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62년 존 호킨스(1532-1595)라는 해적이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스페인 선박을 약탈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항해를 떠났고, 몇 달 간의 항해 끝에 도달한 곳은 아프리카 서해안의 시에라리온이었다. 호킨스가 선택한 교역품은 300여 명의 흑인 노예였고, 이들을 태운 호킨스는 1563년 생도맹그(지금의 아이티)에 도달하여 백인 농장주들에게 노예를 판매한 돈으로 설탕, 진주, 모피 등을 구매하며 이 거래로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호킨스의 항해 이후 영국인들이 노예무역에 가담했고, 약 1세기 동안 노예는 상아, 금, 향신료, 인디고 등과 더불어 아프리카 해안의 여러 교역 품목 중 하나로 거래되다가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가 새롭게 재배되면서 가장 큰 비중의 교역품이 되었다. 당시 흑인노예들이 겪은 참상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을 태운 노예선은 바다 위를 떠다니는 무덤과도 같았다. 되도록 많은 노예를 실어 이익을 높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중간 항로에서 숨지는 노예들을 감안하여 과적을 하여 실었다. 좁은 선실은 질병이 쉽게 확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온종일 노예들을 묶어 놓았고, 화장실은 존재하지 않아 누운 채로 생리 현상을 해결해야 했으며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였다. 노예들을 통제하기 위해 온갖 속박 도구들을 활용한 폭력이 가해졌다.
지옥 같은 노예선의 상황을 견디지 못해 일부 노예들은 음식을 거부하고 죽기를 택했지만, 선원들은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가 의회에서 폭로한 증거들에 따르면 선원들은 음식을 거부한 노예의 입을 강제로 벌리려 했고, 안 되면 이를 부러뜨리고 음식을 부었으며, ‘스페큘럼 오리스’(억지로 음식을 입에 넣는 기구)를 이용해서 강제로 입을 벌리고 음식을 쑤셔 넣었다. 노예선은 그야말로 떠다니는 무덤이었고 어느 정도의 비율로 사람이 죽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거리였다. (…) 어떤 계산을 따르더라도 최소 200만 명 이상의 생명이 대서양 한가운데서 사라졌다. _1장. 서막: 노예무역의 그림자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한 사람의 입법기관’이
수십 년간 대중과 국회의 지지를 얻기까지 싸운 끈질긴 인내의 기록
윌버포스는 어린 시절 삼촌 부부에게 맡겨지며 그들의 신앙을 따라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 등 감리교의 영향을 받았다. 대학에 진학하며 잠시 신앙의 궤도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하원의원으로 지내며 스승이던 아이작 밀너와의 여행 중에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그의 윤리적 신념은 노예무역 폐지 운동이라는 정치적 사명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수십 년에 걸쳐 ‘한 사람의 입법기관’으로서 소명을 다하기까지 ‘클래팜’이라는 공동체를 통한 연대가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일평생 좌절을 거듭하고 오해와 비방들을 견뎌야 했지만, 국가의 명예를 지키고 인간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그의 소명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1807년 (처음 노예무역 폐지위원회가 설립되고 20년 후) 법안이 통과되어 노예무역은 영제국 전역에서 폐지되었다. 다시 26년 후 1833년에는 윌버포스가 죽은 뒤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 운동이 21세기 한국 정치‧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이 책의 서브 제목(Statesman, 정치가의 길)이 그 방향을 내포하고 있다. 윌버포스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몇몇 악습 개혁 폐지를 넘어 영국 사회 시스템의 질적 성숙을 목표로 개혁을 시도했다. 그가 주도한 반노예제 운동은 사회 전반에 걸친 영국인의 가치관의 변화를 형성하여 경제적 이익을 상당 부분 포기하면서도 노예 해방을 위한 국가적 결단을 이끌어 내었다. 이에 저자 윤영휘 교수는 윌버포스를 가리켜 ‘조용한 혁명’을 수행한 정치인이라 표현한다. 윤영휘 교수는 오래전 클래팜파의 관습 개혁을 다루는 연구를 서울대학교에서 시작한 이래 윌버포스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 특히 최근 윌버포스가 젊은 시절 보냈던 케임브리지 대학에 객원 펠로우로 초빙을 받아 1년의 연구년을 보내며 윌버포스를 추적한 흔적들을 이 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