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먹느냐가 건강을 결정하고,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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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교수(감신대 통합학문연구소 소장) 추천
1. 임락경 목사, 그가 만난 한국 교회사의 인물들
2010년 11월부터 2014년 7월까지 월간 〈복음과상황〉에 ‘한국 신학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이 소개되었다. 《임락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는 이 연재 원고를 토대로 하여 내용을 보완하고 다듬어 묶은 것이다. 학교 안 가고, 병원 안 가고, 농약 안 쓰고 살아온 농사꾼인 저자가 만난, 혹은 간접적으로 들은 한국 교회사의 인물들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보는 저자는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인 까닭에 일찍이 제도권 내에서는 스승을 만나지 못해 스승을 찾아 나섰다. 무엇보다 동광원의 이현필(1913~1964) 선생을 뵙고자 하여 1961년 여름, 광주로 가서는 무등산으로 이현필 선생을 찾아 올라간다. 그러나 매일같이 피를 토하는 이현필을 직접 만날 수 없어 당시 82세 된 노인 목사님과 한 방에 기거하게 되는데, 그분이 애양원을 세운 최흥종(1880~1966) 목사였다. 비록 이현필과 최흥종 목사를 몇 년 모시지 못했지만 그들의 신앙하는 태도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그 철저함을 본받게 된다.
1972년에는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 다석 유영모(1890~1981) 선생을 직접 뵙는다. 다석은 김교신, 함석헌, 이현필 등이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던 인물로 1일 1식을 행하고, 널빤지 위에 늘 무릎을 꿇고 앉으며, 노망이 들어서도 실수하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수신(修身)하며 산 인물이다. 기독교는 물론, 불교와 노장, 공맹 사상을 두루 꿰었던 유영모는 한국이 내세울 대철학자로 주목받고 있다.
2. 학교 가지 말자, 고기 먹지 말자, 약 쓰지 말자
저자는 이 땅에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세종(1883?~1942), 이현필이다. 이세종은 전남 화순에서 3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지게 목발이 닳도록 열심히 일을 하여 머슴살이에서 벗어나 부를 모으게 된다. 마흔 살쯤 되어 예수를 믿게 된 그는 남의 물건을 훔친 것, 남의 논밭을 빼앗은 것을 서너 배로 갚고는 늘 거지꼴로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 구제에 힘을 쓴다. 이름을 ‘李公’이 아닌 ‘李空’으로 고쳐 불리었던 그는 철저한 자기 비움으로 예수를 전하며 산다. 신사참배를 피해 화학산 등성이 각씨바위 밑에 움막을 짓고 산 이세종은 성경 하나만 보면서도 앞일을 꿰뚫어 보았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한다.
이현필은 이세종의 제자였다. 청년 시절에 이세종을 따라다닌 이현필은 이세종의 사상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구현한 인물이다. 머리가 명석하고, 곤충까지 살생하지 않으려 한 이현필은 전쟁고아를 거두고자 동광원을 시작하였고, 이현필의 지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함께하고자 들어온다. 이현필이 자주 했던 말이 ‘학교 가지 말자’, ‘고기 먹지 말자’, ‘약 쓰지 말자’ 등이었다.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을 말이었으나 지금 돌아보면 교육 정책 잘못되었다고 대안학교가 줄줄이 생기고, 고기를 많이 먹어 병이 생기며, 병원 안 가도 고쳐질 병을 약을 먹어 더 키우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의 말이 시대를 앞선 예언이었다 하겠다. 이현필은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아, 기쁘다, 기뻐. 내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3. 교인을 양성하는 선교사, 예수 잘 믿는 선교사
저자는 자신이 소개하고픈 인물들에 앞서 어렸을 적 자신의 고향에 왔던 선교사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한다. 마을 사람 절반이 먹을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받아먹고, 당시 귀했던 사과를 찾아 식후에 설탕을 쳐서 먹으며, 동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실내 버너에 불을 붙이고 프라이팬에 돼지고기를 세 점 깔아 기름을 내고, 그 기름에 빵을 구워 먹고, 계란 한 개를 익혀 이것저것 음식들과 함께 먹었던 선교사의 모습. 저자는 예수 잘 믿으면 이처럼 배불리 먹고살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꼬집는다. 저자는 이런 선교사를 기독교인을 많이 양성한 선교사라고 이름을 붙인다.
이에 반해 예수를 잘 믿었던 선교사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서서평(1880~1934), 유하례(1893~1995), 고허번(1920~2003) 선교사 등이다. 서서평은 1880년에 독일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가 되어 1912년,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간 한국을 선교지로 택하여 온다. 서서평은 주로 광주제중병원(현 기독병원)에서 민중 구제사업에 몸을 바쳤다. 당시 불치병이었던 나병(한센병)환자를 돌보았고, 걸인들을 보면 집에 데려와 밥 먹이고 옷을 주어 평생 두 벌 옷을 지니지 못하고 살았다 한다. 또한 여성을 위해 학교를 세워 교육을 받게 하고 간호협회와 부인조력회(여전도회)를 조직하여 일제에 저항하고 우리 민족과 아픔을 같이하였다. 저자는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한 일들을 복음전파, 병원·학교·사회사업으로 분류한다. 저자가 꼬집는 부분은 호화로운 생활을 해가며 전하는 변질된 복음, 돈 버는 곳이 된 병원, 건물이 커지고 등록금이 올라가는 학교, 세우면 커지고 원장이 부자가 되는 고아원, 양로원 등이다. 그러나 서서평 선교사는 이웃 사랑을 일회적으로 실천했을 뿐 사회사업을 하지 않아 그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