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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사랑의 순교자

18,000

이덕주 지음
2023-04-20
408쪽
138*225mm
ISBN : 978-89-365-0387-1 (0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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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그분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한 결론

주기철 목사 성역 백 주년 기념판

‘사랑의 순교자’로
백 년의 주기철을 다시 쓰다

기독교 역사학자 이덕주 교수는 지금까지의 주기철 연구들이 기자에 의해 현장에서 메모하여 복원된 설교문을 근거하여 이루어져 온 사실을 알고, 순교 전 간행된 신문과 잡지들을 찾아내 총 19편의 원사료들을 발견했다. 이 설교 원문들과 비교해 기존 설교들을 보니 일부 또는 결론이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기자에 의해 복원된 설교문이 의도한 내용은 불굴의 순교자 주기철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원사료들에서 읽은 주기철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별을 슬퍼했던 평범한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다만 그 길을 가는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고, 그분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한 결론이 십자가 순교의 길이었다. 주기철 목사가 감옥 안에서 그 혹독한 고문을 견딘 것은 그의 강한 체력이나 불굴의 의지가 아니라 그와 함께하신 그리스도, 그 사랑의 힘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이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십자가를 지려고만 하면 십자가가 인간을 지고 간다. 그래서 갈보리 산상까지 갈 수가 있는 것이다.”
― 주 목사가 두 번째 검속을 당해 6개월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후 산정현교회 교인들에게 남긴 말

올해 주기철 목사 성역 100주년을 맞이하여 20년 전에 출간되었던 첫 책을 새롭게 전면 개편하여 출간하게 되었다. 이전 책에서 주력했던 사료 비평과 선행 연구에 대한 비평을 빼고, 그 사이 새로 발견된 자료 특히 총독부나 일본 정부에서 간행했던 비밀보고서나 일반 언론지에 실렸던 관련 기사들을 참조하여 내용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주기철 목사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그가 생전에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했던 원사료들의 일부를 본문에 인용하였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각색되지 않은 주기철 목사를 만날 수 있다.

◾주기철 목사 목회 약력
주기철 목사는 1923년 봄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 시절 경남노회 양산읍교회 조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1925년 12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 당회장을 역임하였고 1932-33년 경남노회장으로 사역했다.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취임하여 예배당을 신축했고 1937-38년 평양노회 부노회장에 선임되었으나 신사참배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아 평양경찰서에 구금된 상태에서 1940년 3월 평양노회로부터 목사직 제명 처분을 받았다. 가족까지 목사 사택에서 쫓겨난 상태에서 주기철 목사는 홀로 외롭게 투쟁하다가 1944년 4월 21일 평양형무소 병감에서 순교하였다.

저자

이덕주
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로 한국교회사와 아시아교회사를 강의하였고, 2018년 정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 성경 쓰기와 걷기 묵상에 많은 시간을 보내며, 부탁받은 강연과 글쓰기에 임하고 있다. 그가 홍성사에서 낸 책으로는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 《한국 교회 처음 여성들》,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선교 강국, 한국 선교 긴급 점검》(공저), 《이덕주의 산상팔복 이야기》 등이 있다.

목차

들머리
주기철 목사 전기를 다시 쓰기까지

[1] 고향을 떠나 목사가 되다
1.1 고향 웅천,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의 요람
1.2 정주 오산학교와 서울 연희전문학교 유학
1.3 목회 소명과 평양 장로회신학교 입학
1.4 목사 안수와 부산 초량교회 처녀목회
1.5 순종 목회와 ‘열린’ 목회신학

[2] 말씀에 실린 목사의 권위
2.1 마산교회 부임과 회복 목회
2.2 경남노회장 피선과 엄격한 치리
2.3 명설교가(1): “조선 민족을 구원하자”
2.4 명설교가(2): “죽을 준비를 잘하자”
2.5 명설교가(3): “목사라면 목사답게”

[3]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을 향하여
3.1 평양 산정현교회 부임
3.2 산정현교회 예배당 건축
3.3 총회 새벽기도회 인도: “십자가의 길로 가자”
3.4 총독부의 황민화 정책과 신사참배 문제
3.5 평양노회 부노회장 취임과 수난의 시작

[4] 십자가 고난의 길
4.1 1차 검속과 도미타 간담회
4.2 반역의 길: 노회와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4.3 농우회사건과 2차 검속
4.4 ‘승리한 성도’의 평양 귀환
4.5 고독한 싸움
4.6 타협 거부와 3차 검속

[5] 신사참배 반대운동 신앙인들의 연대와 투쟁
5.1 산정현교회의 투쟁과 시련
5.2 평양노회의 주기철 목사 파면
5.3 산정현교회 폐쇄
5.4 지하교회 신도들의 저항운동
5.5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의 평양 회합
5.6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 일제 검거

[6] 말세에 ‘바른 신앙’ 지키기
6.1 4차 마지막 검속
6.2 선교사 강제 추방과 만국부인기도회사건
6.3 총회 지도부의 ‘친일 협력’
6.4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조직
6.5 한국 교회의 자존심, ‘옥중 성도’

[7] 어린양의 신부, 순교의 영광
7.1 옥중 성도들의 신앙 투쟁
7.2 옥중 전도, 옥중 목회
7.3 순교의 해, 1944년
7.4 마침내 순교, ‘하나님의 축복’
7.5 순교, 그 이후
7.6 남은 가족, 남은 고난

부록
주기철 연보
참고 문헌

책 속에서

“주기철은 나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했고 이별을 슬퍼했다. 다만 그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고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신앙을 포기하고 훼절의 길을 갈 때 차마 사랑하는 그분을 배반할 수 없어 그분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노력했고, 그분이 그런 그를 도왔다. 그 결과는 그분처럼 십자가 순교였다. 태어날 때부터 순교와 완덕을 이룰 인물로 점지된 자는 없다. 모두 부족한 인간일 뿐이다. 다만 매순간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으로 그분의 뒤를 따르려는 의지만 갖고 노력하면 순교자도 되고 완덕 성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순교나 완덕은 신실하게 살기 위해 노력한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선물일 뿐이다.” _pp. 18-19

주기철 목사는 목회를 ‘전쟁’으로 보았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치러야 할 전쟁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세상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을 향한 것이다. ‘교인 죽이기’가 아니라 ‘자기 죽이기’로 목회하라는 충고였다. 그런 의미에서 “죽을힘을 다하라”는 그의 말은 “끝까지 죽어라”는 말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목회자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나 바울의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했던 고백이 그러했다. 주기철 목사에게 목회는 ‘육을 죽여 영을 살리는’ 죽음 체험의 연속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이런 설교와 권면을 한 2년 후 신사참배로 인한 고난과 죽음이 앞서 기다리는 평양으로 목회지를 옮겼다. _pp. 100-101

주기철 목사는 설교 제목을 ‘뜨거운 사랑’이란 뜻의 “열애”(熱愛)로 붙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그 ‘뜨거운 사랑’의 증거들을 찾았다. 모세 율법의 핵심인 신명기와 다윗의 시편이 대표적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구약 후반부의 예언서도 그런 ‘하나님 열애’의 기록이었음을 지적한 후 가장 하나님을 열애한 주인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꼽았다. _p. 192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고 종교의식이 아니다”는 총독부 논리로 교인들을 설득하려는 교회 지도자와 목회자들을 향해 ‘모독배’(冒瀆輩)란 칭호를 쓰며 경고하였다. 그런 그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맹인 된 인도자’, ‘회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들’이란 칭호를 써가며 종교 지도자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마 23:15-36).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에 관한 한 그 어떤 타협도, 양보도 거부하였다. _p. 226

고문과 악형으로 이어지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의 시간 속에서 “죽음은 차라리 축복”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당연했다. 이들은 타협해서 살기보다는 신앙 양심을 지키다 죽음으로 하나님과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는 삶을 보여주기를 소원했다. 한상동 목사만이 아니었다. 형무소 안의 ‘옥중 성도’들은 모두 ‘죽음을 향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주를 위해 죽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죽음은 감사함으로 거쳐야 할 통과의례였다. 그들에게 죽음은 피할 두려움이 아니라 기다리는 은혜였다. _p. 366

주영진 전도사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순교의 길’을 갔다. 그는 주기철 목사로부터 부와 명예, 안락 대신 가난과 고난 목회, 그리고 순교를 세습(世襲)하였다. 주영진 전도사 가족의 고난은 가장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주영진 전도사 유가족은 월남하지 않고 긴재교회 사택에 머물러 살았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0년 10월 평양 수복 때 긴재교회 출신 최병문 장로가 긴재교회를 찾아갔을 때 그는 주영진 전도사 부인이 두 아이와 시할머니(주기철 목사의 어머니)를 모시고 어려운 살림을 살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다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주광조 장로는 일본을 통해 입수한 자료를 통해 “주영진 전도사의 아내 김덕성 역시 ‘당과 정부 정책과 반국가적 선전행위를 감행’한 혐의로 1970년 10월 26일 체포되어 1971년 1월 15일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렇게 해서 대를 이은 목회자 부부의 십자가 사랑, ‘순교역정’(殉敎歷程) 이야기는 완성되었다. _pp. 390-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