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지날 무렵 장대비가 쏟아졌다.
요란한 빗소리가 더위를 조금은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그 시원함이 창문 없는 무신의 방까지
얼마나 도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신 그리고 버티는 삶에 관하여
영등포 타임스퀘어 근처의 한 작은 고시원. 두 걸음 이상 움직일 수 없고 엷은 빛조차 들지 않는 방에 청년 무신이 살고 있다. 가정의 경제적 몰락 이후 대학을 중퇴하고 서서히 가족, 친구들과 관계를 끊게 된 그는 저임금 비정규 노동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더 이상 지금처럼 희망 없는 삶을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탈출구를 찾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한편 그에게는 명우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끝까지 무신을 이해해 주었으며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격려해 주었다. 명우의 그 같은 행동의 동기에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도 자리 잡고 있었다. 명우는 진심을 담아 무신이 신앙을 갖기를, 초월적인 관점에서 긴 안목을 갖고 오늘의 현실을 버티며 이겨 나가기를 설득한다. 무신의 또 다른 친구인 도진은 지적이지만 냉소적인 인물로 등단 후 소설가로 살아가고 있다. 도진은 한국사회가 당면한 위기와 모순을 설명하면서 결국 철저한 파국과 붕괴의 시간을 거칠 때 정화와 재생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명우는 도진의 주장을 ‘무신론’에서 나온 위험한 철학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도진이 니체의 허무주의 철학에 물들었음을 암시한다.
명우와 도진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고시원으로 돌아온 무신은 생각이 복잡해진다. 돈도 떨어진 상황에서 이젠 어떻게 하나 고민하는 가운데 떠올린 선택지 하나는 바로 자살. 하지만 이내 무신은 그 생각을 강하게 거부한다. 아주 작은 행복의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그 순간 무신은 명우가 반복했던 단어 ‘신앙’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그리고 짧은 순간 간절함을 담아 기도한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 구원의 사인을 보여 달라고.
무신, 나락奈落하는 청춘의 이름
주인공 이름이 독특하다. ‘무신’의 이름은 신의 부재를 상징하는 ‘無神’일 수도 있고 신뿐 아니라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일체의 기대와 믿음을 상실한 ‘無信’일 수도 있다. 소설 도입부터 무신은 빌딩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다. 고시원의 좁은 방, 그는 그것을 ‘관(棺)’이라 부르는데, 그렇게 시체처럼 관에 들어가 잠을 자고 종종 빌딩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꾼다. 《창문 없는 방》은 우리 시대의 청춘들의 삶을 대표하는 자화상이자 세상에 호소하는 목소리이다. 단순히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노동이 힘겨워서가 아니라, 그들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준거집단을 상실한 상태에 대한 고발이다. 작품 해석을 덧붙인 《희생되는 진리》 저자 오지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당장 한 사람이 구원을 체감하는 길은 내세의 영생을 보장받는 것도, 사회구조와 제도가 정의를 확립하는 것도 아니다. 둘 다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성취와 지위에 관계없이 존엄한 인격체로서 온전하고 정당하게 인정받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는 이유도 현실에서 그런 사랑과 ‘인정’ 관계를 ‘한 몸의 지체’인 것처럼 체험하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이 한 편의 소설은 개인 영혼의 구원과 사회적인 구원 중 어느 구원이 더 우선적인가 하는 논쟁뿐 아니라, 구조의 틀을 넘어 한 인간이 어떠한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