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에 저항한 에스더가 던지는 무거운 질문,
“하나님께서 원하는 정치는 무엇인가?”
에스더서에 ‘하나님’은 없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더욱이 유대인 주인공은 신앙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에스더는 이방인 군주와 결혼하고 유대적 정체성을 철저히 감추고 살았다. 예를 들어, 왕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이름을 히브리 이름인 ‘하다사’ 대신 ‘별’을 의미하는 페르시아 이름 ‘에스더’로 바꾼다. 별이 고대 페르시아에서 우상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름을 바꾼 것은 그가 페르시아 문화에 적응하고 동화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보여준다. 이렇듯 언뜻 보기에 에스더서는 우리가 보통 ‘성서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매우 다르기 때문에 2,000년 전 에스더서가 구약 정경에 포함된 이래 사람들은 이 책이 어떻게 성서가 될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가졌다. 즉 하나님이 언급되지 않은 책이 어떻게 성서가 될 수 있었는가?
기적은 없다, 인간의 정치적 노력의 결과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무드 시대의 랍비들은 에스더서를 ‘구약 성서의 결론적 주제들을 다룬 책’이라 칭했다. 또 성서의 두 부분은 절대로 폐기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바로 모세오경과 에스더서다. 에스더서에 어떤 메시지가 숨어 있기에 이렇게 높이 평가한 것일까?
에스더서는 페르시아 총리 하만이 유대인에 대한 모략을 세우기 오래전부터 유대인들을 노려왔던 보다 은밀한 적과 맞서는 책이다. 디아스포라 이후 다른 곳에서처럼 페르시아에서도 유대인들이 제국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일부 유대인은 이름을 바꾸고 전통까지 버렸다. 에스더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단절된 채 이방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에게, 즉 역사적・종교적・신학적 전쟁터에서 발생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유대인에게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부림절과 연관해서만 읽다 보니 에스더서의 정치적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더욱이 피상적으로 읽은 사람들은 에스더 이야기가 우연, 즉 ‘하나님의 기적’이 연속적으로 발생되어 진행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연구하면 에스더서에 기적은 없음을 알게 된다. 또한 페르시아 유대인들의 구원으로 이어진 정치적 사건들이 모르드개와 에스더에 의해 기획되었으며, 그것은 일반 정치원리에 대한 그들의 명석한 이해와 대담함에서 도출된 결과였음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에 6:1)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와 요람 하조니의 해석은 정반대다. 먼저, 구약학자 존 레벤슨은 “잠들기 위해 왕이 읽었던 궁중 실록이 마침 모르드개의 잊힌 선행에 대한 것이었다는 우연이 없었다면 아하수에로가 어느 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은 사소한 일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왕이 충성스런 신하를 어떻게 축복해야 할지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는 것은 그때 마침 하만이 궁에 들어왔다는 우연이 없었다면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그는 “우연은 하나님이 익명으로 남고 싶을 때의 기적이다”라는 견해로 에스더서를 읽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해 하조니는 에스더의 잘 계산된 정치적 전략이 왕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이유이며, 그가 암살 미수 사건의 기록물을 열람한 계기였다고 설명한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하면서 ‘(왕과 하만을) 제가 그를 위해 마련한 잔치에’(에 5:4) 초청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전략이다. 순수해 보이는 초청 뒤에 있는 에스더의 의도는 왕에게 이상한, 심지어 매우 불편한 요구를 하는 것이다. 왜 한 달 동안이나 남편을 만나는 은혜를 입지 못했던 왕후가 세 사람을 위한 친밀하고 로맨틱한 저녁 연회를 가지길 원할까? 더구나 그녀는 ‘그를 위해 마련한 잔치’에 왕과 하만을 초청한다. 그녀가 초대한 두 남자 중에 누가 ‘그’인가? 그녀는 누구를 위해 잔치를 준비했다고 말하는 것인가?”(167쪽)
“(왕이 잠이 오지 않은) 이유는 왕이 침대에 누웠을 때, 그날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 왕후의 도발적인 말과 행동이 마침내 왕을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오늘 연회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왜 왕후가 총리가 함께 있기를 원했을까? 그녀가 말한 대로 그 연회가 정말 두 남자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나? 만약 그녀가 하만을 그렇게 보길 원했다면, 혹시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하만이 왕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 생각이 깊어질수록 잠 못 이루는 시간도 길어져 간다. 이제 왕의 마음은 그의 통치를 괴롭혀 온 두 가지 큰 두려움 사이에 번민한다. 왕후를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 이 두 가지 두려움이 다시 한 번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손에서 되살아난다. 왕이 불쌍한 사람 하만을 등용한 것은 바로 이런 두려움으로부터 그를 보호해달라는 뜻 아니었는가? 왕을 대신해 왕의 세상을 안정시켜 달라는 말 아니었는가? 이제 그는 누구에게 의존할 수 있을까.”(178-179쪽)
즉 질투를 유발하고 하만의 충성심을 의심하도록 에스더가 하만을 왕과 함께 잔치에 두 번이나 초대했으며, 에스더와 하만 사이에 무엇인가 있다고 오해한 아하수에로는 의심을 품기 시작하고, 그 때문에 밤에 잠을 이를 수 없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개입해서 일어난 기적이라고 알고 있는 사건들이 실은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치밀한 전략에서 유도되었음을 하조니는 밀도 있는 성서 연구를 통해 대담하게 제시한다.
유대인의 정치학 교과서,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조니는 이 책에서 페르시아의 압제 아래 살아갔던 유대인들이 어떻게 생존하고, 나아가 번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답을 구하면서 유대인들 스스로 생존을 위해 노력했음을 밝힌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에스더서를 성서에 포함한 이유가 발견된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구체적인 노력 없이는 절대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정치적 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그 예로 에스더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 일반 세속 정치의 규칙을 따른 능동적 행위들을 통해서 정치적 힘을 획득했음을 기록한 것이다. 즉 에스더서는 유대인의 정치학 교과서 역할을 한 것이다.
나아가 하조니는 유대인의 생존과 번성이 왜 하나님의 뜻인지 설명한다. 그 답은 유대인의 생존과 번성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인류의 공동선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 핵심을 간략하게 풀면, 유대인은 하만과 같은 모든 우상적 독재자에 대항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께서 원하는 정치는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반유대주의’도 유대 민족에 대한 혐오가 아닌 인류 보편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로 확장된다. 이런 파격적인 주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것인지는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하조니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독재적 정부 아래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나아가 기독교인들의 정치는 세상 정치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주체적인 행위인 정치와 하나님의 역사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