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느 자리에서 이렇게 자기소개를 했다는 사람. 그렇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이렇게 당당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이름을 허락하시며 ‘돈이 아니라 가장 귀한 가치에 마음을 두어야 할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귀한 것에 마음을 두며 살다 보니 늘 뭔가 손해 보는 듯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그래서 더욱 당당하다. 나 때문에 남이 밑졌다 싶으면 도무지 속이 편치 못해 더욱 손해라고 생각하는, 그래서 ‘영육간에 위장이 약해 탈이라는’ 사람.
이 책에서 김유심 권사는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과, 그것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일상의 자취를 고스란히 담았다. 60여 년의 신앙생활, 누구나 소설 한 권이 넘는 분량의 절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음직한 연배에 이른 그는 담담하게 고백하듯이 써내려간 43편의 글들을 통해 자신의 일상과 신앙의 자취를 진솔하게 들려준다. ‘이웃집 할머니가 입담 좋게 들려주시는 듯한’ 이야기들마다 세대를 초월하여 공감하고 함께 돌아보며 새겨둠직한 내용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세태를 돌아보며
한때 희곡 작가를 꿈꾸던 문학소녀 김유심은 결혼하여 아들 셋을 키우며 평범한 어머니와 아내로 살아온 한편, 오랜 세월 신우회와 선교장학회를 이끌어 왔다. 섬기는 교회에서는 남들처럼 직분을 맡아 봉사도 했다. 신앙이 바탕이 된 일상에 투영된 그의 자화상과, 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들이 이 책을 이루는 중심축이다.
그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특유의 입담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풍자적으로 자신과 가족, 친구와 이웃, 교회와 세상을 말한다. 그의 글에는 자신을 자신이게끔 하는 모든 것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씨가 스며 있다. 훈훈한 감동은 물론, 옷깃을 여미게까지 하는 글들을 읽어 가다 보면, 우리가 정말 소중히 여기며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는 기독교 안팎을 막론하고 어처구니없는 세태의 이모저모에도 일침을 가하지만, 그 쓴 소리가 비난이나 비판 일색이 아니라 결국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과, 일그러진 모습들의 근원이 결국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한 바가지 마중물이 되어 줄 수만 있다면’
회갑을 앞둔 무렵 낸 그의 첫 책 《이 또한 나의 생긴 대로》(홍성사, 1995, 믿음의 글들 135)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보다 쉽게,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굳이 답답하고 미련하게 살아가는 삶들이 있습니다. 내놓을 것도 없으면서 언제나 당당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것들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바보라고 백안시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무수히 짓밟히고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결코 절망할 줄 모르는 오뚝이! 그들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가 소중히 여기며 진정으로 함께 아파하고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세상엔 참 다양한 부류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누구나 고달픈 삶을 고달프게 살아간다. 그러면서 때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길을 넘나들며 회의懷疑와 방황을 거듭하기도 한다.
그런 우리에게 저자는 ‘우리를 고생하며 근심케 하시는 하나님의 참뜻’을 물으며, ‘우리가 끝내 거룩하고 온전해지도록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게 한다.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그 무엇’을 위해 애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자는 한 바가지 마중물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저자
김유심
1935년 전남 해남 출생
목포여자고등학교 졸업
목우선교회 대표
재단법인 삼호(三昊)선교 장학회 이사장
저서 《이 또한 나의 생긴 대로》(홍성사), 《내가 이 길을 가는 것은》(풀빛목회)
차례
머리말
1부 만인제사장 토끼는 달리지 않는다/지금, 여기에!/지혜와 은혜/사람의 일(人事)/명기도/명설교/ 만인제사장/네가 소돔성의 의인이 되라/참순종/하나님은 무엇을 기다리고 계시나/ 부자가 되어 부자로 살지 말라/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나의 한 달란트/보여주는 삶/옷이 날개/집들이/·R을 PR하기/ 초심지키기 생명 살리기/ 하나님, 안녕히 주무세요/ 마지막 웃는 자/새생활 체조
2부 꿈은 이루어진다 부모도 시효가 있나요/어느 어버이날의 스케치/꿈은 이루어진다/유유상종/유청산/ 유쾌한 독자/바른말 고운말/예의는 사랑의 옷/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곡괭이 침지라도/ 그 한 사람/신 족보타령/각설이 인생/친구/정의定義 놀이/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껍질을 깨고/하이, 히틀러!/사랑스런 내 이름/더 잘하지 못한 죄/ Yes, we believe(예스, 위 빌리브)!
맺음말
책속에서
◀기독교가 내일의 소망의 종교임엔 틀림없다. 내일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믿을 이유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기독교는 또한 절대적으로 오늘의 종교인 것이다. 주님은 ‘어제 거기’의 그 어떤 공로도 ‘내일 저기’의 그 어떤 화려한 청사진도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 주님의 요구는 한결같이 ‘지금, 여기에!’이다. ‘Now, Here!’는 바로 기독교의 요체다. (<지금, 여기에!>, 19쪽)
◀그렇다면 세상적인 사랑과 기독교의 사랑의 차이는 무엇인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 기독교의 사랑의 특성임에도 교회는 이에 너무 무심한 것 같다. 오늘 교회는 사랑보다 ‘사랑 타령’에 스스로 취해 있는 느낌이다. 되풀이하건대 순종은 곧 정직이다. 정직하지 않은 자의 순종은 이미 순종이 아니다. 불의한 인간 때문에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_시 7:11께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을 외면한 순종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참순종>, 59쪽)
◀그러자 다음 순간, 우리가 끝내 이기고 살아남기를 기다리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신 것이 그게 다였을까? 하는 회의가 생겼다. 나는 왠지 그게 전부는 아니실 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 그 남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그저 살아 남는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본질은 살아남는 과정에서의, 또 그 이후의 ‘변화의 아름다움’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냥 살아남기만 하는 거라면 백수든 천수든 무의미한 노릇일 테니 말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다리고 계시나>, 61쪽)
◀나는 죽고 싶은 놈은 그냥 죽도록 놔두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붙잡아 보려고 안간힘 쓰는 실낱만 한 의지만 보이면 나는 그에게 살 수 있는 비법을 소개한다.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그것을 수용하기만 하면 문제는 끝난다. 하! 코가 째졌으니 언챙이지. 바로 거기까지가 문제 아닌가. 맞다. 그러니 그게 어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바꾸어 말하면 나를 통해 일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니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이다. (<나의 한 달란트>, 85-86쪽)
◀“당신은 어찌 그리 항상 당당해” 기다렸다는 듯 나는 냉큼 받아친다. “그야 당연하지. 나처럼 항상 손해만 보고 살면 당당할 밖에. 그것도 당신 앞에선 더더욱!” “하하… 웃기는 여자야.” 진정이다. 나는 늘 내가 좀 밑지면 된다는 주의다. 나 때문에 남이 밑졌다 싶으면 도무지 속이 편치를 못해 더 손해니까. 나는 영육간에 위장이 약한 게 탈이다. 염치 불고하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잘 먹고 씩씩거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사랑스런 내 이름>, 247쪽)
◀나는 애들 앨범마다 맨 앞장에 똑같이 이렇게 시그널 멘트를 해주었다. 李○○!/ 너는 친구들의 자랑이어라/부모의 보람이어라/ 신의 영광이어라/ 너는 자랑이어라/보람이어라/영광이어라 (외울 때마다 가슴 뭉클하지 않을 때가 없다.) 그러면 자, 내가 그 선교사님이 된다. 그대는 믿는가/엄마가 세상에 와서/자랑이요 보람이요 영광인 자식을/ 이 땅에 남기는 게 소망이었다는 것을…… 만약에 놈들이 “Yes, we believe!”를 합창해 주기만 한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못나고 짜잔한 여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일레라. (1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