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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노크 소리

9,000

발행일  2002.9.25
상세정보  양장 / 280page
ISBN  9788936501938

카테고리:

품절

한밤의 노크 소리 –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영감 넘치는 위대한 설교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타고난 목사요, 설교자이다.”

세상은 그를 ‘투사’로 보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탁월한 ‘설교자’였다. 떠오르는 영감과 시대적 통찰력, 사회적 분석이 조화를 이룬 그의 위대한 설교에서는 세상을 뒤바꾸는 힘이 느껴진다. 킹 목사 전문연구가인 클레이본 카슨의 치밀한 편집과 저명인사들의 서문이 이 책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 책은 ‘마틴 루터 킹 논문 프로젝트’를 통해 10년 넘게 킹 목사의 설교를 오디오로 녹음하고 글로 옮겨 적으면서 그의 많은 설교 가운데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설교들만을 가려내 묶은 것이다. 세간에 알려진 가장 최초의 녹음 기록에서부터 암살되기 며칠 전 행한 최후의 설교까지 총 열한 편의 설교를 엄선했으며, 매 설교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등 저명한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추천사를 썼다. ≪한밤의 노크 소리≫를 통해 우리는 34년 전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느꼈던 그 벅찬 감동으로 킹 목사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위대함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시대의 소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킹 목사는 지상과 천국, 나아가 우주뿐 아니라 이 험난한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어려운 삶에 대해서도 쉽게 말해 준다. 이 강력한 설교들은 청중들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데도르 헤스버그 신부

‘한밤’을 열어젖힐 섬광 같은 메시지가 필요한 시대 
킹 목사가 살았던 당시 미국은 인종차별과 베트남 전쟁의 광기로 얼룩진 ‘한밤’의 시대였다. 그때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21세기 한국 사회와 이 땅의 영적 상황이 결코 ‘햇살 눈부신 아침’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뿐 아니라, 우리 개인에게도 나름의 ‘한밤’은 있게 마련이다. 킹 목사의 메시지는 바로 여기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기에 남아공 성공회 대주교였던 데스몬드 투투는 킹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영적 진리는 늘 의미 있고 적절한 법이다. 그러므로 1968년 킹 목사가 행한 설교를 오늘날에도 정확히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홍수 속에서 정작 마실 물을 찾기 힘든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울리고 나아가 한 시대의 진정한 대안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는 설교를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한밤의 노크 소리≫에 담긴 킹의 메시지에는 시대적 대안과 소명을 새롭게 일깨우는 힘이 있다.
나와 다름을 존중하지 못하는 관용의 공백 상태, 비폭력과 평화의 힘을 신뢰하지 못하는 세상, 마이너리티(소수자)의 아픔을 지고 사는 그들에게 귀 기울이기를 게을리 하는 부도덕한 공동체……. 이것은 흑인에 대한 차별과 전쟁의 광기로 얼룩졌던 킹 목사 시대의 암울한 ‘한밤’과 결코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 ‘한밤’의 적막과 정적을 꿰뚫어 새 시대를 열었던 한 줄기 섬광 같은 그의 메시지는 지금 여전히 ‘한밤’의 적막에 잠들어 있는 이 땅 사람들의 심장을 관통해 신새벽을 열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클레이본 카슨의 치밀한 편집과 헌정 서문 
10년 넘게 걸린 ‘킹 논문 프로젝트’ – 킹의 설교는 대부분 청중과의 문답형식으로 진행되었기에 그 설교를 글로 옮기기란 까다로운 작업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마틴 루터 킹 논문 프로젝트’를 통해 10년이 넘게 킹 목사의 설교를 오디오로 녹음하고 글로 옮겨 적는 과정을 거쳤다.
킹 연구가인 클레이본 카슨 교수의 치밀한 편집 – 청중들의 반응을 괄호 안에 이탤릭체로 처리하여 청중들이 어느 정도 호응하는지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킹 목사가 설교하던 당시의 감격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다. 또한 매 설교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등 저명한 종교지도자들의 헌정 서문을 실어 설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시대별 킹 목사의 의식 흐름 – 세간에 알려진 가장 최초의 녹음 기록에서부터 암살되기 며칠 전 행한 최후의 설교까지 총 열한 편의 설교가 시기별로 실려 있다. 매 설교마다 그 당시 사회 문제에 직면했을 때마다 킹 목사가 어떻게 신앙적으로 대처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독자를 사로잡는 ‘읽는 재미’ – 킹 목사 특유의 아름다운 표현과 명확하고 직설적인 비유들, 그리고 때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된 유머는 독자들에게 책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해 준다.
시대적 소명을 자극 – 킹 목사의 설교는 개인 구속이나 구원의 문제를 넘어 예수가 사회에 던져 주는 메시지에 이르기까지 그 지평을 넓히고 있으며, 당대의 눈물과 고통을 결코 간과하지 않고 인간의 평등·경제정의·평화·자유의 메시지를 기독교 복음의 이름으로 증거했다.

무게 444 g
크기 140 × 203 mm

저자

클레이본 카슨
피터 홀로란

심영우

1966년 생으로 한국외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뉴질랜드 와이카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코리아헤럴드 번역 센터에서 환경부 영문 데이터베이스 구축, 문화관광부 문화예술 영문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담당했고, 코리아 헤럴드 어학원과 세종대학교에서 번역 강의를 했다. 지금은 번역 프리랜서로 일하며, 한국 번역평가원에서 주관하는 민간번역사 선발 시험인 ETAT출제 위원으로 있다.

차례

머리글

잃어버린 가치의 재발견 / 미국 그리스도인들엑 보내는 바울의 편지 / 원수를 사랑하라 / 한밤의 노크 소리 / 아메리칸 드림 / 건설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한 지침 / 온전한 삶의 삼차원 / 왜 예수는 이 사람을 어리석다 하였는가 / 군악대장 본능 / 이루지 못한 꿈들 / 대혁명 동안 깨어 있으라

설교에서 생략한 내용 / 후기

책속에서

“분열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조화를 뻔뻔스럽게 부정합니다. 나아가 인종차별은 ‘나’와 ‘너’의 관계를 ‘나’와 ‘그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정녕 기독교의 기본 철학은 인종분리의 철학과 정반대이며 논리학자들이 모든 변증법을 동원하더라도 이 둘을 나란히 놓을 수는 없습니다.” (53쪽) 

“작은 언덕 위에 심어 놓은 어린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에 이 땅에 태어난 가장 영향력 있는 한 분이 매달려 있습니다. 이 나무는 멀리 있는 영생을 내다보는 망원경이며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망원경입니다. 권력에 취한 세대에게 사랑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상기시켜 주는 영원한 이정표입니다.” (84, 85쪽)

“인간의 영혼을 염려한다고 공언하지만 영혼을 무력하게 하는 빈민가와 영혼을 상하게 하는 경제 조건과 영혼을 저주하는 시 정부에 대해 근심하지 않는 종교는 어떤 종교든지, 메마른 종교요 죽은 종교이며 새로운 피가 필요한 종교입니다.” (179쪽)

“교회에서 의사는 자기가 의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교회에서 박사는 자기가 박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교회에서 변호사는 자기가 변호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어떤 교회든지 ‘교회에 오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오게 하라’는 원칙을 어긴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요, 냉랭하기 짝이 없는 교회요, 보잘것없는 신앙을 지닌 작은 사교 모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212쪽) 

“우리는 반드시 자유를 쟁취할 것입니다. 우리의 요구에는 우리나라의 성스러운 유산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둡고, 아무리 분노하여도, 아무리 폭력적이어도 나는 여전히 ‘우리 승리하리라’를 노래할 수 있습니다.” (262, 263쪽) 

“우리가 이처럼 과학과 기술에서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여 이 세상을 이웃으로는 만들었지만 정작 형제로 만들 수 있는 헌신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245쪽)

“우리는 형제로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바보가 되어 함께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나는 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그 장례식에 가지 못했기에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그 신학자들에게 어찌 된 일인지 계속 물어보고 있는 참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사망일을 알려 줄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검시관이 하나님의 죽음을 확인했는지 알려 줄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천국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에 천국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땅의 현실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의 길고 흰 옷에 대해 말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땅의 옷과 신발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합니다. 새 에루살렘에 대해 말하는 것도 정말 좋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새 시카고, 새 애클랜타, 새 뉴욕, 새 아메리카에 대해서도 우리는 말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러 왔습니다. 이것은 누가 뭐래 해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우리 미국은 국가의 자존심과 오만함 때문에 결코 이런 행위를 단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국가도 얼마든지 제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

서평

[서평1]

“보이지 않는 길, 그러나 보이는 길” 

오늘날 우리는 실로 ‘위기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위기의 시대’라 함은 단적으로 그 앞길이 보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급변하는 한반도의 상황과 시계 제로의 현실, 이 모두가 혼돈과 갈팡질팡 속에서 고통스러운 현실의 짐을 지는 뼈아픔이 있고, 그런 과정에서 이 ‘파국(破局)의 시간’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무도 자신할 수 없는 처지에 빠져 있음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길’이 보이지 않는 현실은 언제나 이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런 때에, 설교자는 이런 우리의 삶에 과연 대답을 마련해 줄 수 있을까?

어떤 설교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설교자의 신념과 행동이 얼마나 실천적이었나 하는 물음과 함께 그 설교가 얼마나 그 시대의 삶의 방식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 그것을 어느 정도 형상화했으며, 설교 속에 담긴 설교자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이 어떻게 우리 모두의 절실한 감동으로 연결되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말씀으로 체득한 설교자의 삶’이 없이는 결코 ‘생명력 있는 말씀’도 우리 모두의 절실한 감동으로 연결되는 ‘살아 있는 체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의 설교에는 ‘말씀으로 체득한 설교자의 삶’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심층부에서 참으로 쉬게 하고 치유하는 맑음뿐만 아니라(설교 ‘원수를 사랑하라’, ‘온전한 삶의 삼차원’), 말씀으로 시대를 읽어 내는 선명한 현실 인식으로 생명과 희망 그리고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준다(설교 ‘대혁명 동안 깨어 있으라’, ‘한밤의 노크 소리’). 

특히, ‘선지자적’이라는 말이 아주 느슨하게 사용되고 있는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 사람들은 선지자적 설교의 역할을 “강단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면서 회중의 태도와 행동을 꾸짖는 것” 쯤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대의 예외자로 때로는 경고하고, 위로하면서 인종차별로 고난받는 이들 편에 서서 말씀을 전해 온 그의 설교는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적 견해와 동일시하려는 모든 시도를 벗어나, 인간이 안고 있는 실존적 고뇌와 당대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명징하게 보여 준다(설교 ‘미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 

지금 세계는 일명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다. 금세기에 들어서서 인류는 두 번이나 엄청난 세계전쟁으로 인류의 생명을 대량 학살한 바가 있음에도 여전히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눈으로 길이 보인다고 하는 교만한 자들의 반복되는 죄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우리는 그 인생의 앞날이 보이지 않아 실수하고 두려워하며 헤매면서 어리석은 자의 유혹과 권고에 그 영혼과 몸을 맡기거나, 아니면 제깐에는 보인다고 여겨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간다. 그 결과는 모두 하나님에 대한 배신과 그 자신의 인생의 궁극적인 패배로 귀결된다. 마틴 루터 킹의 설교는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예리하게 파고든다(설교 ‘왜 예수는 이 사람을 어리석다 하였는가’).

화살로 하여금 ‘활시위를 떠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과녁의 존재이듯이 마틴 루터 킹은 설교자로서의 사명을 자기성찰의 치열함으로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좌표를 정위해 나가는 엄격함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매우 간결하고 단순한 것 같은 그의 메시지는 내면에 절제된 언어가 표출해 주는 정교한 기법을 동반하고 있다. 어딘가 새롭고 내밀한 형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런 제약을 뛰어넘는 넉넉함은 그가 지닌 남다른 선명한 통찰력에 기인한다. 혼돈과 위기의 시대에 그가 그리울 뿐이다.

아 그날이 오면, 하나님의 아들딸들은 새벽 별들과 함께 기뻐 노래하며,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글/한종호(월간 〈기독교사상〉 편집부장)
홍성사, 쿰회보(2002년 11월호)에서


[서평2]

“오래 전 잃어 버렸던 것들, 차갑게 식어 있던 내 마음에 불이 된 책!” 

대학 초년생 때, 최루탄의 냄새를 맡으며 시위대 앞에 서 본적이 있다. 무슨 영문인지 왜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해 많이 고민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이 사회의 불의와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배들과 함께 그 자리에 서 있을 때, 나는 정말로 바른 자리에 서 있다는 자부심으로 당당했었다. 세상이 내가 던지는 이 작은 구호에 의해 바뀔턱이 없다고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외치는 것이 ‘지식인의 양심’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학 2학년 때,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한번도 그렇게 느껴본적 없었던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이전날 가지고 있던 가치관들이 하나둘 붕괴되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다시금 정립되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다. 세상을 향해, 남들을 향해 품었던 의분이라 여겼던 것들이 어쩌면 그들의 자리에 가보지 못했기에 갖는 부러움일 수 있다는 생각과 ‘남의 티를 보며 자신의 들보를 깨닫지 못한’ 성경의 인문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그 자리가 주어졌다면 저들보다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배신이라는 말을 들으며, 이전에 몸담고 있던 곳에서 벗어나 기독교인 안으로 편입되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대학을 졸업했고, 근 4년의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작은 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 흘러간 수년간의 시간은 더 이상 내가 시대와 민족을 보며 통탄하고 나가서 소리쳤던 어린시절의 뜨거움을 식혀버렸고, 그리스도안에서 나의 죄성으로 인해 치를 떨며 다른 이를 향한 비판을 멈추게 했던, 철저한 자기인식도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어 놨다. 사회와 그리스도에 대해서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상태가 바로 나의 상태가 아니였었나 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에게 있어 마틴 루터 킹은 흑인 인권 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 미국의 흑인 차별 정책에 대해서 반대했던 운동가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TV 공익광고에서 들었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문장 몇 줄을 들었던 것이 그에 대한 나의 인식의 전부였다. 너무도 익숙해서 어쩌면 더 깊은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이 한 흑인 운동가이자 목사인, 아니 목사이기에 운동가가 된 인물에 대한 설교집이 어느 날 내 손 안에 들어왔다. 

이 책은 루터 킹 목사가 39세로 저격당하기까지 했던 설교 중 11편의 설교를 간추린 설교집이다. 이 책은 최근에 많이 읽혀지는 다른 목사님들의 글과는 매우 다른 느낌을 갖는데, 이 원고들이 예배당에서 선포된 설교이기도 하지만 또한 거리에서 외쳐진 연설이기도 한 까닭일 것 같다. 시대와 민족을 향해서 그리고 교회에 교회 밖 사람들을 향해서 분명하게 외쳐진 메시지들을 한편 한편 실려 있었다. 그 원고들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사로잡힌 한 설교가이자 운동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책의 표지에는 루터 킹 목사가 설교를 하는 장면이 흑백 사진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 설교자의 뒤에는 4열의 성가대가 위치하고 있고 전면의 성도들을 향해서 설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 손을 높이 들고, 다른 손으로 그의 가슴 켠에 두고 있다. 그의 눈은 아래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늘, 즉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향해 있다. 그리고 그의 강단에는 흔한 마이크도 없다. 나는 이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 그가 설교하고 있는 그 교회에 청중으로 앉을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그 곳은 한 젊은 목사가 미국과 전 세계를 향한 그리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선포하는 곳이었다. 그는 말씀의 깊이와 무게 때문에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목소리는 마치 사자의 울음소리와 같은 크기와 무게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들려졌을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 이라는 그의 설교를 보면,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가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으며 필요한 것을 가지고 문화를 즐기며 교육을 받고 자유를 누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흑인 아들딸들이 그분의 백인 아들딸들처럼 존중받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p131) 

공익광고에 쓰여졌던 이 문장은 그 문장만으로는 최초에 이 문장을 들었던 이들이 느꼈던 강한 충격과 감동 전부를 나눌 수가 없다. 이 문장이 그의 한편의 설교의 대미를 장식하는 호소이며, 격정의 목소리라는 틀 안에서 이해될 때, 그나마 이 문장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미국의 독립선언서의 정신을 살펴보고, 그 안에 모든 인간의 기본권의 의미에 대해 살펴본 다음, 그 모든 인간에게 선언된 위대한 인간의 기본권이 무너진 미국의 현실을 고발하고, 그 현실적으로 무너진 미국의 현실을 하나 하나 언급한 후, 그 사건 속에서 ‘나의 꿈은 부서져 버렸습니다’라는 문장의 반복한 후 나온 결말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교인 ‘한밤의 노크소리’의 경우에는 사회가 아닌 교회의 역할에 대해 목사의 입장에서 강하게 선포되었다. 설교는 누가복음 11:5-6절의 내용 즉, 벗이 여행 중에 한밤중에 찾아와 떡을 달라고 하는 내용과 이 찾아온 벗에게 떡을 주지 않으려는 집 주인의 모습에 대한 글이었다. 저자는 이 ‘노크소리’에 대해서 ‘교회를 향한 떡이 필요한 자들의 노크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전부터 교회는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흑인 노예들에, 전 세계의 전쟁, 수없이 많은 약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밤 동안, 수 없이 많은, 다급한 노크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교회는 약자들의 노크소리를 무시했고 심지어 그 약자들을 억압하는 이들의 손을 들어주며 그들에게 아첨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교회만이 이 불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떡’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또다시 교회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이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새벽은 온다’라는 희망을 외치는 것치는 것이라고 말하며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주장했다. 

1963년에 선포된 이 메시지는 오늘날 한국이라는 다른 배경의 교회에게도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아직도 이 세상은 한 밤이며,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은 여전히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 약자들에 대해 우리는 답하고 있는가? 사회적 강자들의 폭력과 억압 앞에서 교회는 진정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교회의 선지자적인 역할을 찾으라고 외치는 킹 목사의 설교 앞에 한국교회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거리고 있는건 아닌가 ? 

가끔 세상에 좋은 일을 하고 있는, 빈민을 위해, 또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수고하시는 귀한 분들을 볼 기회가 있다. 그들 가운데 기독교계의 유명한 목사님들을 접할 기회도 있다. 하지만 그분들의 귀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선에서 분노를 읽는다. 혹시 그분들이 하고 있는 선한 일들이 ‘있는 자 가진 자에 대한 분노’라는 어그러진 동기 때문이라면 그들의 사역이 하나님께 온전히 열납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움이 사랑의 동기가 될 수 없다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온 그 사랑의 동기로 수고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수고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인권 운동가이기 전에 목사인 루터 킹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사회 정의를 위한 목소리 깊은 곳에 있는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읽게 되었다. 그는 차별 받는 ! 흑인을 사랑할 뿐 아니라 흑인을 차별함으로 존엄성을 잃어버린 백인을 가여워하며 사랑한다. 그가 백인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그는 그 시대에 그 상황 가운데서 그 일을 위해 자신의 짧은 삶을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동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나의 ‘사회정의’에 대한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시대에 대한 의분을 하나님 안에서 표현할 수 있도록 지침을 주고, 사랑의 동기로 정의에 대해 외치는 법을 가르쳐준 책이었다. 설교-들려지고 읽혀진 내용으로-뿐 아니라, 그렇게 삶을 살았던 본을 눈으로 보게 된 시간이었다. 39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통해, 결국 저격으로 인해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한 순교자가 자신의 삶을 마감하면서까지 외쳤던 메시지를 듣는 시간이었다. 그 메시지는 오래전 잃어버렸던 것들, 차갑게 식어져 있던 내 마음에 불이 되었다. 

오늘날 여전히 시대는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있으며, 교회의 문은 그들을 향해 닫혀 있다. 어느 날엔가 나는 그 교회의 문 안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다시금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의 사명을 수행할 것이다. 여전히 울려퍼지는 한밤 중에 교회당을 울리게 하는 그 문 두드리는 소리에 앞에서 그 교회의 문을 열어젖히고 큰소리로 ‘새벽이 온다’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되기 원한다. 그 약자들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스크럼을 짜고, 거대해 보이는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거대한 희망의 무리 가운데 함께 걷는 한 사람의 목회자이고 싶다.

-글/조영민(전도사)
-2003 독후감공모 목회자부문 최우수상 수상작

저자 인터뷰

[저자 가상 인터뷰]

“저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1968년 광폭한 전쟁주의자들로부터 암살되어 39세의 나이로 삶을 마치기까지, 평등과 자유, 비폭력과 평화의 꿈을 불태웠던 아름다운 젊은이. ≪한밤의 노크 소리≫는 킹 목사의 그 치열한 삶을 떠받치는 영혼의 소리들, 곧 위대한 설교들을 한데 엮은 책이다. 다음은 그가 남긴 삶의 흔적들을 토대로 구성해 본 가상인터뷰이다.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와 접합시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의 거대한 불평등과 차별대우에 맞서는 개혁을 시도하셨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노벨 평화상은 바로 목사님의 이런 삶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수 있겠지요. 목사님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시대를 사는 올바른 성직자의 길, 아니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와 설교자의 관심은 결국 하나님과 인간입니다. 물론 저는 천국이 있음을 굳게 믿고 있으며, 천국에 대해 말하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하지만 천국의 희고 긴 옷에 대해 말하는 만큼 이 땅의 옷과 신발에 대해서도 말해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을 찬미하는 것과 함께 우리는 새 시카고, 새 애틀랜타, 새 뉴욕, 새 아메리카에 대해서도 말하기 시작해야 하는 거죠. 우리보다 더 가난하며, 차별당하고, 불행한 이웃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부유하거나, 평등하거나,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흑인과 백인이 하나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많은 일을 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특히 몽고메리에서 있었던 버스승차 거부운동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버스 안에서 백인과 흑인의 좌석이 구별되어 있는 흑백분리법에 대항하여 벌인 이 비폭력저항운동의 대승리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저희 가족은 이 일로 협박전화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폭력에 노출되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기억은 교회까지 이 불평등을 지지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백인 교회와 흑인 교회로 나누어졌습니다. 교회로 들어가는 문에 차별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한낱 피부 색깔 때문에 찢어질 수 있습니까? 이러한 인종차별은 ‘나’와 ‘너’의 관계를 ‘나’와 ‘그것’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정녕 기독교는 인종분리를 결사 반대하며 수많은 논리학자들이 모든 변증법을 동원한다 해도 기독교와 인종주의를 나란히 놓을 수는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북부 대도시의 슬럼가를 중심으로 심지어 흑인 폭력주의자들까지 가세해 목사님의 종교적인 비폭력 철학을 문제 삼았습니다. 특히 베트남전쟁을 반대한 까닭에 더욱 그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 일로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조차 목사님을 떠났지요. 결국 정의는 언제나 이런 희생을 담보로 지켜야 하는 것인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방법과 그리스도의 무기로 싸워야 합니다. 주먹을 들고 싶은 유혹에 절대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저도 무고하게 수차례 감옥을 드나들었으며, 때로는 목숨까지 위협받으면서 마음이 흔들리고 두렵고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은 형제를 미워할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에 반대하고 평화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비굴한 국가의 하수인으로 또 아첨꾼으로 전락하여 성수를 군함에 뿌렸고, 주님을 찬양하며 동시에 전쟁을 찬양했습니다. 온 세상이 지쳐서 필사적으로 평화를 구하는 순간에도 교회는 늘 전쟁을 도덕적으로 눈감아 주었습니다. 특히 제 조국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이 전쟁 범죄를 저질러 왔으며, 이것은 누가 뭐라 해도 사실입니다. 게다가 미국은 이후로도 국가의 자존심과 오만함 때문에 결코 이런 행위를 단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우리 하나님께선 국가라도 얼마든지 제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목사님의 설교에선 언제나 아름다운 표현과 적절한 은유들, 그리고 청중을 사로잡는 설득력과 유머가 돋보입니다. 이번에 나온 책 ≪한밤의 노크 소리≫ 역시 출간 전부터 심상치 않게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저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희망과 용기를 얻고 더 나아가 이 시대의 소명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틀림없이 한밤중입니다. 어둠이 너무 짙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으며, 힘없고 억압받는 나그네들은 지금 이 밤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 평화의 빵을 구하려고 교회의 문을 두드립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한밤의 노크 소리’는 있었고 또 들렸습니다. 매일 밤 저는 이 소리를 듣습니다. 죽는 날까지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남아야 하는 까닭도 바로 이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낙심한 사람들, 그리고 역사적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 무엇보다 절망에 빠진 수많은 흑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길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시련이 닥칠지도 모르고, 어쩌면 저는 이 세상에서 이 일을 끝까지 이룰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뒹굴고, 누구든지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아 그날이 오면, 하나님의 아들딸들은 새벽 별들과 함께 기뻐 노래하며,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정리/김명화(담당 편집자)
홍성사, 쿰회보(2002년 10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