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은혜’의 희년 공동체를 꿈꾸며
6인의 학자가 함께 쓴 희년 교과서
예수원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레 25:23)라는 말씀이 적힌 돌비를 볼 수 있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분리될 수 없다”라고 했던 대천덕 신부는 살아생전 줄기차게 성경적 토지법을 전파해 왔다. 토지는 모든 인간 생활의 근거이자 생산의 본질적 요소로서 대부분의 사회문제의 배경에 이 토지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대천덕 신부는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사람은 평등한 토지권을 갖는다’는 성경적 근거 토대 위에《토지와 경제정의》(홍성사, 2003)를 썼다. 그 뜻을 이어 받아 오랫동안 성경의 희년 사상을 연구하고 그것을 한국 사회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해 온 ‘토지+자유 연구소’는 6인의 학자(김근주, 김유준, 김회권, 남기업, 신현우, 장성길)와 함께 《희년, 한국 사회, 하나님 나라》를 펴냈다. 이 책은 각 분야의 전공 학자들이 구약, 신약, 기독교 역사에서 희년 사상이 어떻게 구현되어 왔는지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희년 사상을 적용할 수 있는지 연구해 온 결과물이다. 각기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희년에 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했기에 마치 한 권의 교과서를 읽는 듯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접근임에도, ‘희년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핵심 원리이고 그것이 한국의 여러 사회 문제를 해결해 줄 경제체제’라는 것에 데 뜻이 하나로 모아진다.
한국 사회는 지금 새로운 경제체제가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는 사회 곳곳을 병들게 하고, 빈부 격차와 계층 간 소득 분배는 심한 불균형을 보인다.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가난한 사람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해답을 희년이라 제시한다. 희년의 핵심 원리인 토지제도를 성경의 원리로 바꾸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이 희년을 선포했던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을 먼저 실천하자는 것이다. 토지소유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분명 불편한 요청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토지는 여호와의 것”이라고. 구약성경이, 예수님이, 사도들이 꿈꾸던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기심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의 희년 사상, 예수가 삶을 통해 실천한 하나님의 긍휼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 책을 꼼꼼히 읽어 보면, 그 변혁적 삶의 힘이 의외로 쉽게 내 탐욕과 이기심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각 장의 내용 요약
먼저 김회권은 1장에서 희년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되지만 인간의 순종과 믿음을 통해 역사 속에 뿌리내린다. 즉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에 대한 사람의 순종과 응답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어떤 순종이 요구되는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땅 위에 구현하고자 했던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면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율법을 주셨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이 담겨 있고 그것은 곧 희년으로 집약된다.
희년은 일곱 째 안식년 그 다음해 즉 50년째 되는 해를 가리키는 말로, 땅과 노예들을 자유하게 하는 해방의 축제절기다. 즉 희년법에는 거류민과 가난한 자의 생존권을 확보해 주려는 하나님의 자비가 흐르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 시대로 이어져,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을 인용하여 희년을 선포하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 또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사상을 이어받아 유무상통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결국 희년 운동은 성령에 감동된 개인이 주도하는 운동인 셈이다. 이 장에서는 희년법을 지키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었고 이런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와 성령의 힘을 입은 교회 공동체의 실천이 필요함을 말한다.
2장에서 장성길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희년법을 이야기한다.
희년법의 기초는 애굽의 노예 신분이던 히브리 사람들에게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며 정체성을 상기하는 데서 시작한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언약을 지키면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던 출애굽기 19장 말씀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다. 즉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희년법은 그 언약을 유지해 가는 수단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희년법이 레위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게 된다. 이것은 곧 희년법이 제의적 성격을 지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삶으로 드려지는 제사로서의 성격을 띤다는 말이다. 희년법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이 법을 지킴으로써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어떠한지 보여 준다. 그리하여 모든 열방 사람들이 그 법을 함께 지켜나가도록 이끌어 가는 책임이 있음을 보여 준다.
3장에서 김근주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칙이 무엇인지에 의문을 갖고 성경을 살펴본다.
저자는 구약의 여러 본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두 기둥이 공평과 정의임을 밝힌다. 그런 점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긍휼을 근본으로 하는 희년법이 공평과 정의에 기반한 하나님 통치와도 연결됨을 말한다. 공평과 정의라는 하나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는 희년법을 통해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이사야 11장은 여호와의 영이 임한 새로운 다윗이 행할 통치의 방식을 표현한다. 그 통치의 핵심은 바로 ‘공의’다. 저자는 하나님이 이를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과 우리를 부르고 택하셨다고 한다. 모든 땅은 하나님의 것이되 이스라엘에게 유업으로 주어졌고, 모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이되 자유케 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그 땅 위에서 자유를 누리고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 곧 우리의 존재 이유임을 이 장에서는 강조한다.
4장에서 신현우는 신약성경에서 희년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설명한다.
신약성경의 하나님 나라는 예수를 통해 도래한 영적 희년에 해당한다. 사탄이 왕노릇하던 시대가 가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시대가 온 것이다. 희년법에 담긴 노예 해방과 기업 회복이 신약에서는 주로 영적 차원에서 나타나지만, 신약을 잘 살펴보면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를 통해 희년법에 담긴 물질적 차원이 연속됨을 알 수 있다. 희년법은 남의 것을 돌려주라고 명하는데 ‘코이노니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이고, 희년법은 나에게 종살이하는 노예를 해방하라고 명하는데 ‘디아코니아’는 내가 남의 노예인 양 섬김으로써 남을 주인처럼 만드는 것이다. 신약 시대에 와서 희년법은 그 근본 의미를 더 철저하게 적용한다. 이 글에서는 코이노니아나 디아코니아보다 좀더 기초적인 노예화 방지 장치로서 ‘토지법’에 초점을 맞춘다. 과연 예수는 희년 토지법을 지키라고 하셨을까?
저자는 바로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다각적인 접근을 통해 찾는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에게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는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다. 하지만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갔다”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셨다. “재물이 많은 고로”에서 헬라어 ‘끄떼마’는 문맥상 재물보다 토지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토지를 많이 가진 것은 명백하게 율법에 위배되기에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요청에 부자 청년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글에서는 예수께서 토지를 평등하게 소유하라는 희년법을 폐기하지 않으셨고, 그러하기에 우리 또한 예수의 가르침에 철저히 응답해야 함을 말한다.
5장과 6장에서 김유준은 초대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의 희년 사상을 연구한다.
초대 교부인 암브로시우스,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소유물을 축적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탄식과 사회정의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특히 공의로운 사회질서를 세우기 위해 청중의 의식을 일깨워 ‘황금의 입’이라 불린 크리소스토무스는 희년 사상의 중심개념인 토지에 대해 “사용권이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소유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태양, 공기, 토지, 물처럼 공동의 것으로 만드시고 동등하게 분배된 것을 누군가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할 때 싸움이 생긴다”라고 했다. 예수님 처형 후 하나님 나라 운동이 영적인 형태로 변해 갈 때, 초대 교부들은 부와 빈곤의 인과관계를 알리고, 토지와 천연자원을 독점함으로 인간을 노예화하는 당대의 불의한 경제체제를 희년 사회로 개혁되도록 강단에서 외치며 삶의 현장에서 실천했다.
6장에서는 루터와 칼뱅의 희년 사상을 살펴본다.
루터는 토지를 통한 지대 차액을 노리는 상업활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것은 레위기의 희년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토지 불로소득의 금지 개념이다. 루터는 “토지를 사는 것이 돈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봄으로써 토지매매를 금하는 희년의 원리를 밝혔고, “토지를 담보로 지대 차액을 누리는 것은 참된 소득이 아님”을 강조했다. 칼뱅의 경제사상에 대해 저자는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경제체제 즉 희년 사상에 기초한 지공주의(地公主義)적 요소와 연관하여 고찰한다. 루터와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초대 교부들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희년 사상에 입각한 경제체제와 신앙 윤리를 강조했다.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에 함몰되어 있는 현대인에게 희년법에 기초한 공평과 정의의 경제사상을 외친 종교개혁자들의 희년 사상은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7장에서 남기업은 희년 사상을 어떻게 한국 사회에 적용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희년 정신을 담은 경제체제 즉 희년의 경제모델을 어떻게 한국 사회에 그려야 할 것인지를 차근차근 살펴보고, 그것을 위해서는 네 가지 영역의 정의가 필요함을 말한다. 그 네 가지란 토지정의, 기업정의, 노동정의, 노사정의이며 이들 네 가지 정의의 영역은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즉 하나이지만 유기체적 관계 안에 있기에, 한 영역의 정의는 반드시 다른 것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정의는 토지정의이며, 토지정의의 핵심은 토지 불로소득을 모두 환수하는 것이다. 토지 소유자들은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토지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것이 경제를 더욱 활성화하고 복지의 필요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며, 구체적인 예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