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영성의 5가지 특징
1. 원하는 사람을 골라 친구 요청을 보낸다. 2. 친구 요청은 선별해서 허락한다.
3. 알리고 싶은 것만 보여 준다. 4. 내키는 대로 로그아웃한다.
5. 책임은 지지 않는다.
1. 21세기 그리스도인이 가장 무시하는 가치, 정주(定住)
《하나님은 복으로 장사하지 않는다》로 ‘돈’을 성찰한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가 이번에는 1,700년 전 ‘수도 영성’을 들고 나왔다. 저자는 범죄율이 아주 높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더럼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 여러 책을 통해 교회와 문명이 처한 현실을 성찰하면서 대안을 제시해 온 저자는 《페이스북 영성이 우리를 구원할까?》를 통해 ‘정주(定住)’라는 가치를 내보인다.
3·4세기 수도자들은 시대정신을 거슬러 살기 위해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고, 그 시대의 악령과 맞서기 위해 자신이 있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 결과 수도자들은 철저한 정직성과 통찰력을 갖추게 되는데 정주하는 삶을 통해 성장하면 자기를 속이는 집착과 망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늘 새것에 주목하고, 신상품이 나오면 바로 구입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이 시대는 더 높이, 더 멀리 가는 것을 성공으로 여긴다. 교회 역시 더 외형적으로 성장하고, 더 멀리 가서 선교하는 것을 성경적이라고 여긴다.
저자는 예수를 전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녔으나 외로움만 커진 자신의 경험,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에 전념한 수도자들을 진리에 굶주린 많은 사람이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야곱과 예레미야가 전하는 정주하는 삶의 역설을 펼쳐 보인다.
《머드하우스 안식》(복있는사람)을 쓴 로렌 위너는 “정주하는 삶은 21세기 그리스도인이 가장 무시하는 미덕이면서도 우리가 속히 받아들여야 할 미덕”이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 더 높은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위태위태한 경쟁을 벌이는 시대에 ‘땅’, ‘머무름’을 주목하는 《페이스북 영성이 우리를 구원할까?》는 야곱의 사다리가 땅에 든든히 박혀 하늘에 닿았듯 구체적인 곳에서 구체적인 사람들과 살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깨우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신앙은 시대정신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2. 영적으로 좋은 것만 골라 섭취하려는 시대
세미나, 집회, 치유 프로그램 등 영적으로 좋다고 소문난 곳을 쫓아다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은 질문한다. 내 입맛대로 하나님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맛있는 음식을 탐하며 맛집을 찾아다니는 모습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르냐고. 저자는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영적 생활을 그만두라고 일갈한다. 이곳저곳 은혜를 쫓아다니는 것은 마치 “여기저기서 꺾은 나뭇가지를 가지고 나무를 만들려는 시도”나 마찬가지다. 나뭇가지를 아무리 많이 모아도 생명이 있는 나무를 만들 수는 없다. “자꾸 움직인다 해서 약속의 땅에 다다르는 것은 아니”므로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려면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입맛에 맞는 교회를 골라서 마음에 드는 설교를 듣고, 내 취향인 사람들과 교제한다면 결코 성장할 수 없다. 머무른다는 것은 “변화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아니라 늘 새로워지겠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3. 선교: 머무름과 떠남 사이의 건강한 긴장
이스라엘의 바빌론 귀양은 하나님의 심판인 동시에 하나님의 전술이다. 예레미야는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라고 예언했다. 적국에 끌려간 하나님 백성에게 이 말은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모든 곳, 모든 것이 거룩하며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선교를 시작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절 조지아 주에서 시작된 다인종 공동체 ‘코이노니아’ 농장은 KKK단의 위협과 불매 운동으로 폐가 위기를 겪으면서도 땅을 떠나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 “‘농장을 팔고 떠나는 게 어때’는 ‘어머니를 파는 게 어때’와 같습니다”라는 말에 땅의 철학, 땅의 신학이 담겨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선교가 “탐욕, 식민지 이해관계, 온정주의, 폭력”에 얼마나 휘둘렸는지 가까운 선교 역사를 들춰보라며, 정주하는 삶을 통해 사랑의 뿌리를 내리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안전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코이노니아’에서 해비타트 운동이 출발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