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다!
마태복음 4장 24절 본문을 보면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고치시더라’는 헬라말로 ‘고치다’라는 뜻의 ‘테라퓨오’다.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고치다’뿐만 아니라 ‘섬기다’는 의미도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인간을 섬기기 위해 오신 분이시기에 인간의 질병을 ‘테라퓨오’, 즉 치유해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왜 주님은 병 주시고 약 주시는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주님은 인간에게 병 주시고 약 주시는가? 인간을 사랑하시면 처음부터 병들지 않게 해주셔야지, 왜 연약한 피조물을 병들게 하고 그다음에야 치유해 주시는가? 적어도 질병에 시달린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솔직하게 던져보았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보면 과연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계신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질문과 의심은 이유 있다. 그리고 해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셨을 때 세상은 평화롭고 인간은 죽지 않는 존재였으나 인간의 죄로 인해 육체의 죽음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동안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결국 육체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의 책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인생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문제투성이로 전락시킨 인간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시고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셨다.육신의 치유를 넘어 진정한 치유로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한 마태복음은 16장까지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과 그에 이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언급 이후로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는 기사는 거의 사라진다. 당신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속에서 죽음의 제물로 멸망해야 할 인간들을 살려내신 것보다 더 완전한 치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 영원한 영적 치유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깨달으라는 이유로 마태복음 16장 이후로는 주님의 완전한 구원만 되새기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연약한 우리는 육체의 질병을 앓게 되면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것이다. 그러나 기도했음에도 병이 낫지 않는다면 마태복음 16장 이후로 믿음의 장을 넘겨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다”(고후 12:10)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병이 오히려 은혜를 구하고 겸손한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인도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약한 육체로는 스스로 인생을 지탱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었고, 약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자기 삶 속에서 넘침으로 자기가 더 강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이 고백은 암선고를 받았던 이재철 목사의 동일한 고백이기도 하다.
※ 이재철 목사 메시지 시리즈
책 뒤표지의 QR코드를 통해 설교 내용을 음성으로도 들을 수 있도록 했다.